텡고(tango),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탱고 음악을 꼽으라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OST「여인의 향기」와「트루 라이즈」에 삽입된 'Por Una Cabeza'(뽀르 우나 까베사 : 간발의 차이로)를 주저없이 이야기 한다. 역시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인상깊게 남는 장면은 장님으로 분(粉)한 주인공 알파치노가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추는 탱고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이다.
우수에 젖은 바이올린 선율과 긴장감 넘치는 피아노 연주, 그리고 반도네온의 육감적인 음색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 곡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탱고로 남아 있다. 이 곡은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탱고의 왕」카를로스 가르델의 1930년대 초반 작품이다.
“shall we tango”
“한국 중년 남성이 마음 붙힐 곳이 없어져 가고 있다. 몰락의 이유 중 하나로 권위의 상실을 꼽는 경우가 많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으로서 의무는 동일하다. 그런데 권위만 사라졌다. 중년 남성이 슬퍼진 이유다.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 가정에서 소외되면서 올드보이는 고독해져 가고 그들은 고독에 취해 탱고를 춘다. 남자는 여자를 리드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한다. 탱고는 남자가 에너지를 만들어 내 여자에게 전달한다. 잃어버린 권위를 잠시나마 탱고가 찾아주는 셈이다”
“고독에 취해 탱고를 춘다” 모 일간지의 헤드라인 제목이다. 한때 모 방송에서도 '여인의 향기'라는 동명드라마도 있었다. 생을 마무리 하는 여행 중에 여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낯선 곳에서의 낯선 남자와 추었던 인상적인 '눈물의 탱고'의 장면이 지금도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년의 고독을 탱고와 연계시켜 올드보이들의 고독을 어루만지고 있다. 도대체 탱고가 뭐길래? 새차비로 지난 시절 잠시나마 '내 머릿 속의 풍차’를 돌리게 만들었던 탱고의 흔적을 책장 서랍에서 끄집어 내 본다.
탱고의 고향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 시인 호루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저녁과 밤이 없이는 탱고(tango)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듯, 탱고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탱고(영어로는'탱고', 스페인어로는 '땅고'라고 함)의 애처로운 가락들 만들어 내는 반도네온(bandoneon : 독일인 하인리히 반트(heinrich band)가 만든 아코디언형 악기)이 연주하는 'Quejas de bandoneon(반도네온의 탄식)', 그 가장 순수한 탱고 가락을 들을 때 우리의 가슴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 광활한 초원(pampas)와 플라타 강(Rio de la Plata)의 하구 사이에 위치한 대도시, 이 도시는 어떤 원거리감 같은 것을 지닌 온갖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항구도시이다. 널리 퍼져 있는 조크로서 이 도시 시민들, 즉 ‘뽀르떼뇨스(portenos)들은 스페인어를 말하고, 스스로를 영국인이라 생각하며, 프랑스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들은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유태인, 폴란드인, 등의 이민들이 그 조상이다. 이들의 자손과 그 손자들이 이 도시의 상징인 탱고(tango)를 만든 것이다.
흑인사회에서 생겨난 탱고
탱고의 기원은 어디인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는 흑인 사회의 영향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19세기엔 탱고라는 말이 옛 노예들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흑인사회는 와해되었는데, 독립전쟁과 뒤이은 내전, 1871년의 황열병(yellow fever)의 유행으로 인해 무수한 흑인들이 목숨을 잃고 또한 이주민들과 피를 섞이게 됨으로써 흑인들은 점차 자취를 감춘다. 아무튼 탱고의 기본 발동작(staps), 즉 꼬르떼(corte)와 께바라(quebara)는 이 흑인들이 축제 때 거리를 활보하는 동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흉내낸 도시의 건달들이 그 자세(figure)를 약간 변형시켜 두 사람이 서로 맞잡고 추는 밀롱가(milonga)로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탱고의 원형(prototype)이다.
탱고가 자라온 환경
탱고의 발상지는 무질서하고 부패한 변두리 사회이다. 1880년 당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거대한 목장을 찾아 수많은 유럽인들이 이주해 오던 시끌버끌한 항구로 1895년에 이르러서는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53%를 차지했다고 한다. 또한 아르헨티나가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에 접어듦에 따라 전직 군인들이 이 수도로 몰려 들었다. 당시 시 전체는 풍족한 상류층 지역과 하층민 및 신이주자들이 사는 변두리의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서로 적대하고 있었다. 사회 저변에는 암흑세계가 그 망을 뻗치고 있어서 매춘이 크게 성행했으며 국제적인 백인 인신 매매업자들이 도시의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폴란드, 호주, 프랑스, 독일, 벨기에, 터어키 등지에서 돈 많은 신랑감을 찾아 이곳으로 몰려온 여인들이 사창가에 발을 묶이게 된다. 탱고는 처음에 이런 사창가에서만 볼 수 있었다. 이 밑바닥 세계에서 뚜장이(pimp)는 가장 존경받는 존재로서, 최초의 탱고 가사들은 그들을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뚜장이 인생의 기복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공작새처럼 몸을 치장하고 화장까지 하고 다녔으며, 그들의 여인들은 스타킹 대님(garter belt) 속에 단도를 숨기고 다니며 그들의 총애를 얻으려 서로 싸우곤 했다.
상류사회로 진출하는 탱고
이 뚜장이(pimp)와 창녀가 최초의 탱고 춤(tango dance)의 짝이였다. 이 초기의 탱고는 두 사람의 관계를 생생히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창가를 찾는 노동자 계급의 건달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또한 상류층 남자들도 이 말단 인생들과 하룻밤의 방탕을 즐기고 난 뒤 마치 거기서 얻은 전리품인 양 거기서 배운 탱고를 버릇삼아 춰 보이곤 했던 것이다.
이렇듯 탱고는 그 때까지 금지된 음악, 저급한 춤이라는 딱지(label)가 붙어 있다가 마침내 상류사회로 파고들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기 전 탱고는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해야만 했다. 즉 댄스로서 과도한 성행위 흉내를 억제하고, 음악으로선 더 추상적이 되면서 영역을 넓혀 인생의 모든 단면들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1920년대에 접어 들면서 탱고는 매우 세련된 음악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파리에서 각광받게 되는 탱고
그러던 중 파리로 건너간 탱고는 파리쟝(parisian : 파리시민)들에 의해 열광적인 애호를 받았는데, 파리에서 탱고가 인정받고 난 후에야 이를 천대시 했던 아르헨티나의 상류층들은 비로소 탱고를 다시 평가하게 된다. 파리에서의 탱고 열풍은 다른 모든 유행을 무색케 했는데, 당시 풍자만화가이자 사회평론가이던 셈(sem)은 1912년 릴뤼스트라시옹지에 이렇게 썼다. '이 탱고 열풍은 무섭게 파고 들고 있다..그것은 파리 전역에 퍼져 나가 저택의 응접실, 야간 카바례, 대형 호텔에 침투했다..파리의 한 쪽 절반이 다른 쪽 절반을 비벼댄다. 도시 전체가 경련한다. 탱고는 파리 깊숙이 파고 들었다.'
이리하여 새로이 탄생된 탱고는 1차대전 후의 20년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제 탱고는 외국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가우초(gaucho : 남미판 카우보이)복장을 한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가운데 남자 댄서(gigolo)와 세련된 귀부인(femme du monde)이 황홀한 자태로 춤을 추면서 탱고는 그 미의 극치에 도달하게 되고 급기야 헐리우드로까지 진출하게 된다.
음악으로서의 탱고와 불멸의 스타 가르델
이즈음 번성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신흥 중산계급은 탱고를 사회적, 미적 경험으로 인정했다. 이제 탱고가 그 고전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카바레, 음악당, 까페 등에선 교양있는 관객들이 그 풍부한 화음, 새로운 음악의 화려함, 우아함을 칭찬했다. 관현악이 위주가 됨으로써 탱고를 추는 사람은 줄어들고, 대신 이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또한 여러 가수들이 탱고를 노래함으로써 탱고는 바야흐로 인기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듯 탱고가 대중의 사랑를 받는 가운데 한 스타가 탄생된다.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 그 사람이다. 그는 사생아이자 건달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 운명이였으나 마술처럼 상류사회에 떠올라 성공을 이룬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blondes of new york', 'the lights of buenos aires' 등의 대 히트곡을 내었다. 이러한 그가 1935년 비행기 사고로 숨을 거두었을 때엔 아르헨티나의 온 국민이 비애에 젖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반영하는 탱고
1930년, 군사쿠데타가 아르헨티나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압살함에 따라 대두된 냉혹한 사회 현실과 절망적 분위기, 빈곤과 실업, 압제와 부정이 탱고의 주제가 된다. 이후 악명 높았던 30년대에 들어서자 탱고는 생동하는 대중오락으로서 자취를 감추고, 그저 문화적 가치만 중시되어 이의 보전작업이 개시되면서 1936년에 탱고의 역사를 다룬 책이 최초로 출판되었다. 한편 탱고는 이상적인 영화음악으로 간주되어 유명한 가수들이 영화의 주제가로 탱고를 부르게 된다. 40년대에는 그 리듬의 요소가 강조되기 시작하여 탱고는 사교 춤(social dance)으로 유행되어 도처에 무도장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중요 인물로는 아니발 뜨로일로(Anibal Troilo)가 있는데 197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명실 상부한 탱고의 왕자로 군림했다.
오메로 만지(Homero Manzi)와 까뚤로 카스티요(Catulo Castillo)의 시에 곡을 붙여 거작을 만들어 낸 그는 엘바 베론(Elba beron), 로베르또 고이예네체(Roberto Goyeneche) 등의 가수를 키어냈다. 또한 그는 로큰 롤(rock′n′ rol)이 맹위를 떨치던 50년대에 탱고의 전통과 그 순수한 특징들을 유지하는데도 공헌했다. 오늘날 탱고는 순수주의자들에 의해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간주되면서 카페, 음악회 등에서 일류급 쇼(show)와 더불어 외국 관광객들에게 제공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중문화 쪽에서는 전통적인 탱고가 인기인이 몇몇 등장하는 저녁 시간 TV show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탱고 아르헨티나의 성공
매혹적이고 침울한, 영광스러우면서도 끈적끈적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향수처럼 기억되고 있는 탱고(tango), 탱고는 하나의 자극, 예절바른 자극이다. 그것은 장난기 심하면서도 그 건방진 셩격에 절묘한 솜씨를 감추고 있다. 소설가 사보토(E⋅saboto)는 탱고를 일러「반도네온의 음울한 황홀경」(the gloomy ecstacy of banodoneon)이라 말한다. 탱고는 엄숙하고 농도짙은 변덕이 있다. '더 이상 울지 않으리'하고 난 뒤 또 흐느끼다가는 다음 순간은 미소짓는 탱고, 탱고의 가사는 번역이 필요없다.
'탱고 아르헨티노'(Tango Argentino)의 무용수들의 춤을 보노라면 우리는 그것이 흠잡을 데 없는 기교를 초월하여 곡예와 같은 묘기로 육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는 썰물처럼 밀려나가게 하여 평범한 사교춤의 차원을 벗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서로가 활홀경에 싸여 서로 한가지 운명의 포옹 속에서 종교의식과 같은 자태를 펼쳐 보일 때, 우리는 모든 예술가들을 향한 쟝⋅꼭도(Jean Cocteau)의 충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형이하학적인 것의 연장으로 생각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