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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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패망에서 우리들이 배운 교훈
소파에 앉더니, 그는 두 손으로 빨래 짜는 시늉을 하며 “남 장관, 쥐어짜지만 말고 업계의 사정 좀 돌봐줘” 하는 것이었다. 1970 년대 초의 위기상황 1970 년대 초, 한국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앞으로 설명하는 8·3조치, 방위세, 중화학공업 투자는 이 위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1971, 72 년의 위기 상황을 간략히 짚어보기로 한다. 월남전이 한국을 포함한 참전국의 노력은 점차 실패할 기색이 농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내외의 압력을 받고 있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이때 그가 발표한 새로운 대외정책은 이른바‘닉슨 독트린’으로 알려졌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이제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포기하고 앞으로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다른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공산주의 국가를 무조건 적대시하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1973 년 1 월 27 일 휴전협정이 체결돼,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은 전부 철수했다. 남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돼, 이로 인해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 유행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베트남 다음에는 한국이 공산화될 위협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닉슨 독트린에 따라, 이미 1971 년 3 월 한국에서, 미국 제 7 사단이 철수해 휴전선 155 마일 경비를 국군이 담당하게 됐으니, 국민의 안보 불안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후보는 박 정권이 종신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학생들은 교련(학생에게 가르치는 군사훈련) 반대 데모를 확산시켰다. 박 대통령은 1971년 12 월“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 2 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돼, 1970 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고, 1971 년 수출이 10 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 이후, 세계경제가 침체되면서 국내 경기도 냉각됐다. 장기적 인플레이션 속에서“단기자금”으로“장기투자”를 감행해온 기업들은 은행 부채와 사채의 “빚더미”를 짊어지고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져 있었다. 미증유[未曾有]의 내우외환에 직면 ,박 대통령은‘국난[國難]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네 가지 정책으로 대응했다. 두 번째로 1972 년 11 월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그에 따라 정치 통제를 강화했다. 세 번째로 자주국방을 위해 무기 국산화를 촉진하는 율곡(栗谷)계획을 추진했고, 네 번째로 8·3 조치를 통해 기업들을 사채의 족쇄에서 해방시켜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을 적극적으로 개발 육성하기로 했다. 경제장관들은 항상 정치적 불안을 걱정하면서도“정치는 내가 맡을 터이니, 임자들은 경제개발[經濟開發]에 전년[專念]하시오”라는
대통령의 말에 힘입어 임기응변의 경제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면서도“진퇴유곡”의 난국에서 박 대통령이 보여준 책임감[責任感]과 결단력[決斷力]에 탄복하기도 했다. ⑪ 사채를 동결하라 ! 대통령‘사채 동결’입안 명령 2 금융권 - 중기[中企]신보기금 구상 I M F 담당관을 만나 협조 요청, 경제난국의 돌파구를 1972 년 8·3 조치에서 찾으려 한 데에는 당시 재계의 영향이 컸다. 김 용완 경제인연합회장의 강력한 요구에 의하여,
어느 날 김 용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박 정희 대통령에게“사채를 동결하지”않고서는 살아날 기업이 없다고 호소했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위해, 그리고 자주 국방력을 배양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을 키우는 것이 제 3 차 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목표인데, 기업이 이렇게 힘이 없다면 계획의 성패는 번 한 일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사채 동결 결단 유사이래[有史以來]전무후무[前無後無]
대통령은 1972 년 초여름의 어느 날, 김 정렴 비서실장, 김 용환 경제특보, 그리고 나를 한자리에 불러놓고, 자신의 결심을 토로하고 극비[極秘]리에 사채동결방안을 입안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주무장관으로서 걱정이 앞섰다. 사채는 문화적 요인과 이자율의 통제에서 유래하는 것이니, 사채를 동결하더라도 금리를 자유화하지 않는 한, 사채가 다시 생겨날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화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힌 계와 사채를 한 번쯤은 응징함으로써, 타성[他性]을 타파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그 방법과 효과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됐다. 나는 세 가지 정책적 요건을 생각했다. 첫째는 사채에 대한 조치가 자유경제체제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채 동결조치 후에 사채가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새로운 금융시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중소기업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사채를 채권이나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해, 이자제한법의 취지에 따라 사채업자의 재산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들을 증권시장으로 유도해 사채놀이 대신 주식 투자를 하게 하면, 자본시장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문제는 1970 년 초부터, 구상해온 제 2 금융권 개발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문제인,
중소기업에 대한 특별 배려에 대해서는 각 은행에 중소기업신용보증기금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하기로 결정, 김 용환 경제특보가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만약 국제 통화기금(I M F)이, 이 조치를 문제 삼아 재정안정계획을 완전히 파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 끝에 이용만 이재 국장을 대동하고,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서 장관 체면을 무릅쓰고 I M F 의 한국담당관에게 이 비밀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장장 3 시간을 설득해, I M F 가 이를 양해할 것과 이런 협의 때문에 비밀이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다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브카라는 인도 출신의 담당관은 개발도상국의 사정을 이해하고, 우리의 요청을 수락했으며 성공을 빈다고 말해줬다. 8·3 조치 1972 년 8 월 3 일 제정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선포, 금융 4 개 법안 통과 후, 경제 긴급명령 신고한 사채는 대출금으로 전환, 기업 금융비용 3 년 새 절반으로 천신만고 끝에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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