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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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진흥 5개년 계획" 과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다.
1974 년 상반기 국민총생산(G N P) 성장률이 전년 동기대비 ― 3%,― 3.7%로 각각 급락했다. 반면 한국은 G N P 성장률이 1973 년 14% 에 이어, 1974 년에도 8.5% 를 기록했는데 이는 주로 수출이 급신장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중화학공업 제품 덕분이었다. 그리고 1982 년부터 중화학공업 제품 수출이 경공업 수출을 앞지르게 됐고, 이후 중화학공업 제품이 우리나라 수출의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이다.
<24>“나에게 100 억 원을 줄 수 없나? “이젠 우리 자신을 알아야할 때”朴대통령 문화예산 증액 지시 전국서 유적 보전사업 등, 투자 결정 박 대통령 문화예술 진흥 사업을 직접 챙겨, 대통령은 넌지시 나를 보더니,“부총리, 나에게 100 억 원을 줄 수 없나?” 하고 묻는 것 이었다 “어느 정도 경제 개발이 됐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한국인 자신을 알자면, 전통 문화를 되찾아야 하고
이 민족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조상들이 어떻게 외적과 싸웠고, 호국 충성을 다했는가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앞으로 예산당국은 이 점을 고려해 주기 바란다.” 대통령의 말씀은 감동적이었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담이지만, 숫자를 조정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혹시 대통령의 특별한 요구가 있을까 하여, 약간의 여유자원을 감춰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8 년부터 제 2 차‘문예중흥 5 개년 계획’이 시작됐고, 그해의 예산은 140 억 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2 배로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많은 문화사업과 유적 보존사업이 이뤄졌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1962 년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됐으며, 고전 국역(國譯) 사업, 정신문화원 창설, 현충사 중수, 경주의 종합개발 등이 추진됐다. 한산도 충렬사, 광주의 표충사, 700 의총(사적 105 호 지정), 행주산성, 세종대왕 능,
안동의 도산서원, 강릉의 오죽헌 등, 유명한 유적치고 박 대통령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분명히 그것들은 국민들의 민족적 긍지와 애국심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했다. 경제개발 초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고민한 것은 농업 개발이었다. 농민들은 가난에 찌들어 의욕이 없고, 조상 전래[傳來]의 빈곤[貧困]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못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체념하고 있었다. 막연히 나라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희망과 의욕이 없으니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고, 농한기나 겨울에는 도박이나 술판으로 날을 보냈다. 더러는 마을의 지도자가 모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보자고 권유해도 협동이란 손해 보는 일이라 생각하여 나서기를 꺼렸다. 그러던 중, 1970 년 봄에 또다시 심한 가뭄이 왔다. 박 대통령은 4 월 22 일 가뭄피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지방장관회의를 소집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대책을 결의한 다음,“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재난을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근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 방법으로 농촌재건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시발(始發)이다. 처음에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했는데 점차,‘새마을 운동’으로 이름이 통일됐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71∼1984 년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자금은 총 7 조 2,000 억 원으로 연평균 5,177 억 원이었다.
총액의 57% 는 정부 투자, 11% 는 주민 부담, 나머지 32% 는 새마을성금 같은 민간단체의 찬조금으로 이뤄졌다. 용도별 투자 명세를 보면, 소득 증대 42.8%, 환경 개선 27.5%, 생산기반 확충 22.2%, 정신 계발 2.8%, 도시 및 공장 새마을운동 4.7% 등으로 돼 있다. 정부 투자는 같은 기간 정부 세출(歲出) 총액의 약 4%에 해당하는데 이것을 매개로 해 거의 같은 액수의 민간 자금을 동원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새마을운동이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중국은 물론 베트남 필리핀 러시아 콩고민주공화국 몽골을 비롯해 133 개국에서 4 만여 명이 방한해 새마을운동을 시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 집무실을 찾아오는 개발도상국 귀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질문을 했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외국에 나가 한국 경제발전 경험을 이야기할 때에도
새마을운동을 빼놓을 수 없었다. 나는 외국인들에게 새마을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줬다. 가난을 숙명으로 여겨 ‘빈곤 악순환’1970년 대통령“농촌재건운동”제의 中 - 베트남 등 133 개국 4 만 명 시찰 첫째, 농촌 개발에는 주민들의 정신 교육이 필수이다. 한국은 처음부터 자조, 근면, 협동의 전통적 가치를 가르치고,“하면 된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농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환기하자면,
초기에는 정부 주도와 재정 원조가 필수이다. 그러나 소액이라도 농민 자체가 부담하는 부분이 있게 해, 자조의 정신을 배양했다. 셋째, 농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유도하기 위해, 유인(誘因)과 경쟁이라는 두 가지 지렛대를 사용했다. 따라서 정부 지원은 자조 노력을 전제로 했다. 넷째, 농민에게 가시적 이익을 가져오는 사업부터 시작해 농민들의 자발적 참가와 협동을 유도했다. 그 다음 농민의 관심이 많은 사업을
우선적으로 시행하도록 지도했다. 다섯째, 정부의 농업 개발사업과 새마을사업을 연계해 양자가 상승효과를 발휘하도록 배려했다. 여섯째, 농민들의 협동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모든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도록 지도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 민주주의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라고 여러 번 지시했다. 전자시대를 열다. (1) 컬러TV - 전자교환 식 전화 도입 전자산업의 발전을 위해 물밑 추진,
여론 반대 - 기업 이해 맞물려 난항, 전자식 전화기도입은 주무부 체신부가 반대 제 4 차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자시대를 열어가는 데에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전자산업과 TV, 통신수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975 년 미 8 군 AFKN이“내년부터 컬러 방송을 시작한다.”고 발표, 그 후 4 년이 지나 1980 년 9 월 국무총리로 다시 정부에 돌아오자, 나는 전자산업 진흥을 위해 컬러 방송이 필수적임을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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