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 51 =
자주국방을 위해 율곡사업을 계획하다.
국제정세 긴박 무기 국산화 ‘율곡 계획’입안 재원 마련 위해 방위세 신설 1970년대 초 미군 7 사단의 철수와 베트남전 휴전으로 인한 급박한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해,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운 4 대 국정과제의 하나가, 자주국방[自主國防] 체제의 촉진이었다는 것은 지난 칼럼에서 말한 바 있다. 당시의‘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라는 표어가 말해 주듯이 박 대통령의 근대화 개념에는 남한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자주국방과
경제개발이라는 양축이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국방부에서는 1974 년부터‘전력증강 8 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있었고, 박 대통령은 이것을‘율곡(栗谷)계획’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율곡 선생이 유비무환의 경륜으로 10 만 양병책[養兵策]을 주창한, 고사(故事)를 생각했던 것이다. 율곡 계획은 남북 간의 전력 비교가 50 대 100 이라는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차 야포 함정 잠수함 전투기 등의 국산화와 외부 조달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누구라도 중화학공업[重化學工業]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계획이 요구하는 재정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 하는 것인데, 이 과제는 또다시 나에게 떨어졌다. 분명한 것은 조세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는 것인데, 기존 세제[稅制]하 에서는 그것은 불가능[不可能]했다.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협의한 끝에, 방위세[防衛稅]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날 나는 방위세 안을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과 독대했다. 보고를 마치고 나자, 대통령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김일성이 또다시 남침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부전선[西部戰線]에서 미군[美軍]을 빼는 일이야.” 나는“전쟁이 났는데 왜 미군을 뺍니까?” 대통령은“아냐, 빼야 돼.” 나는 대통령은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군을 빼지 않으면 미국 병사들이 뻣뻣이 서서
총을 쏘다가 모두 거꾸러질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TV는 물론 신문 기자들이 그 참상을 낱낱이 보도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미국 의회와 언론이 화전(和戰) 양면으로 분열돼, 전쟁 개입에 대한 결정이 늦어지고, 그러는 동안 미 8 군 사령관은 작전 수행이 어렵게 될 것이다. 그 리고, 만약 이런 상태가 한 달만 계속되면 우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예방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전쟁 발발 직후
미군을 서부전선에서 철수시키고, 38 선 전역을 우리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북은 평소에 공격 태세를 완비하고 있었으니까, 당초 일주일 동안은 우리가 밀릴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아군이 반격으로 전환해 밀고 올라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코리아는 역시 베트남과 다르다. 그들은 자력으로 싸우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방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 다”고 하면서, 공군 지원과
병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에 기대할 것은 공군과 병참이고, 육상 전투는 전적으로 우리가 맡아야 한다. 듣고 보니 대통령의 통찰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방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자주국방의 개념과 충돌할 이유는 없다. 다만 자신의 힘을 기르는 노력을 하지 않고, 외세에만 의존하려는 것은 자주국방이라 할 수 없다. 힘이 모자라서 적에게 먹히는 것보다
대통령의 자주국방은 바로 이러한 개념이었다. <23> 중화학공업, 말썽도 많았지만 … 세계적 불황기에 판로개척 어렵다. 언론“중화학 과잉투자”연일 비판 1974 년 8.5% 성장. 주춧돌 역할 국내 과잉투자와 두 번의 오일쇼크가 몰고 온 인플레이션, 국제수지 악화를 무릅쓰고 박차를 가해 온, 중화학공업 사업들이 완성 단계에서 세계적 불황으로 판로를 찾기 어려운 상태에 놓이고 있었다. 국내외 경제학자들과 언론들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 때문에 한국 경제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다. 설상가상으로 중동에 대한 과다 진출이 초래한 건설업의 부실 경영과 이에 따르는 금융부조리가 언론에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과잉투자를 조정하고 생산업체 간의 교통정리를 하느라 정부가 크게 고심했지만 만약! 그때 ! 중화학공업을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80년대 들어 각종 대형 설비 및 원자재 가격은 오일쇼크 이후 몇 배나 올랐고, 국내에서도 임금, 토지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는데, 만약 이 시기에 중화학공업 건설에 착수했다면 건설비만 하더라도 3, 4 배는 더 들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1980 년대에 달라진 국제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외자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1980 년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화학공업을 추진할 만한
정치력[政治力]이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생각해보면, 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적 타산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경제학 사전에도 없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경제가 황폐화된 일본에서 1950 년대 초에 제철 자동차 선박 등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게 된 이면에는 일본 통산성의 적극적인 지원과 흔히 말하는 ‘정경유착’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앙은행 총재를 비롯한 일부 정책 가와 경제학자들은 일본 경제의 실력을 도외시한 망발이라고 정부를 비난했다. 그러나 업계와 정부가 일체가 돼 수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노력한 결과 일본을 세계 경제강국[經濟强國]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非常]한 결단과 추진력이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과 대통령경제 제 2 수석비서관을 지낸 오 원철 씨가 말하는 산업군단[産業軍團] 그리고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재정 금융의 관료조직이 있었기에, 과업을 해낼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만약 그것들이 없었다면, 1973 년 10 월에 몰아닥친 제 1 차 석유파동의 충격 앞에서 우리는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경제이론만으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1970 년대 초의 건설 기를 지나면서, 중화학공업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석유파동으로 1974년 하반기부터 선진국이 불황 국면으로 접어들어 미국과 일본은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