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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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건설 진출과 원자력 발전소 건설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해 승낙을 받았다. 그래서 1980 년 11 월 11 일 이 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이 내달부터 컬러 방송을 시작한다고 발표하게 된 것인데, 정부가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자면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 어느 날 나는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전자교환방식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전자산업의 낙후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5 개년 계획사업으로 그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옆에 있는 오 원철 경제 제 2 수석비서관에게 의견을 물었다. 오 비서관은 조심스럽게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전자시대를 열다 “전자식 전화 도입” 공표하자, 시 끌. 기존 업체 반대로비 거셌지만, 강행 교체 후 전화 적체현상 사라져 인재는 적재적소 배치 1976 년 2 월 경제 각의의 의결을 거쳐 경 상현 박사가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전자교환기 도입의 타당성 조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1977 년 한국통신연구소가 개설됐다.
통신기술 연구와 개발을 위해 설립된, 이 연구소에는 경 박사가 선임 연구부장으로 취임했다. 이리하여, 정부 내의 추진체제는 완전히 정비된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자교환기의 국제경쟁 입찰을 시행하게 됐는데, 벨기에 B T M 사의 기종(M10 CN)이 선정됨으로써, 서독 지멘스사의 E M D시스템 독점체제는 막을 내렸다. 1977 년 10 월 경제기획원이 삼성전자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 E)사의 합작투자를 인가함으로써,
전자교환기 생산이 다원화되고 경쟁체제로 돌입했다. 전자교환기 도입에 따라 가입 전화는 1978 년 187 만 대에서, 1982 년에는 400 만 대로 증가했고, 이후부터 전화 적체는 옛날이야기가 됐다. 정보화시대로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다. <28> 중동 진출, 고급 건설기술 습득 - 오일달러 유입 중동진출 3 년 새 무역외 수입 5 배로 사우디 정주영 회장 창의력에 감탄도 1975 년 12 월 경제기획원은‘대(對)중동 진출 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외화 가득[稼得]액 극대화, 행정지원체계 정비와 창구 일원화, 건설 및 기술인력 진출의 내실화를 위한 방안이 건의됐다. 경제기획원 차관을 중심으로 하는‘중동경제협력실무위원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또 해외건설 사업소득 및 근로소득에 대해 소득세를 50% 감면하며, 수주질서를 확립하고 과당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해외건설 촉진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취득한 외화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해외건설자금 운영요령’을 제정하고 관민(官民)합동 경제외교를 강화하는 내용 등도 포함됐다. 한편 이 시기에는 중동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해 정부는 물론이고, 학계나 민간단체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건의해 1976 년 1 월 중동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초대 소장으로 정재석 씨(후일 경제부총리가 된다)를 임명하게 됐다. 그 후 1977 년
이 연구소는‘국제경제연구원’으로 개편됐고, 1982 년에는‘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으로, 1984 년에는 다시 산업연구원[産業硏究院]으로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와 건설업계의 긴밀한 협력으로 중동으로부터의 외화 수입이 급속히 증가했는데, 그것은 국제수지표의‘무역 외 수입’란에 반영돼 있다. 당시의 국제수지 통계에 따르면, 중동 진출 초기인 1975 년의 무역 외 수입은 약 8 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1976 년에는
16 억 달러로 배가 됐고, 1978 년에는 44 억 달러에 이르렀다. 중동 수입은 제 2 차 석유파동으로 크게 증가한 원유 수입대금의 약 30% 를 상쇄해 국제수지 방어에 크게 기여하는 동시에 1970 년대 후반기의 고도성장과 중화학공업 건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기업이 중동 진출을 통해 건설 및 관리의 고급 기술을 습득해 후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참고로 2007 년 해외건설 수주실적은 398 억 달러였고, 2008 년에는 476 억 달러에 달했다. 우리 기업은 해외 건설에서도 탁월한 경쟁력을 발휘했다. 1978 년 대통령 특사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 때, 주요 건설현장을 돌아본 일이 있다. 그때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주바일 방조제 공사 현장으로 나를 안내했는데, 그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 대역사(大役事)를 국제 경쟁 입찰에 부쳤고,
다른 나라의 기업들은 13 억 달러 내외의 가격을 써냈는데, 현대는 9 억 3,000 만 달러를 써내 낙찰 받게 됐다는 것이었다. 정 회장에게‘그러고도 수지가 맞느냐' 고 물었더니 현대는 울산조선소에서 공사에 필요한 모든 철재를 가공해 바지선(뗏목처럼 바닥만 있는 화물선)으로 운반해 오면, 공사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어서 충분히 수지가 맞는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창의와 결단력에 다시 한 번“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9> 경제외교 - 미국과 프랑스에서 4 차 5 개년계획 100 억 달러 필요. 경제사절단 이끌고, 미[美] - 유럽 순방 차관공여 - 원전 건설 협력 이끌어내, 1973 년 10 월 제 1 차 석유파동에 직면해 원자력발전이 도마에 올랐는데, 원자력발전소 하나를 건설하자면 10억 달러 내외의 막대한 비용이 든다. 원자력발전소 건설뿐만 아니라, 제 4 차 경제개발 5 개년 계획(1977∼1981 년)을 추진하자면, 대략 100 억 달러의 외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1976 년 5 월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미국 및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16 일간의 여정으로 먼저 워싱턴으로 향했는데, 다행히 내 순방일지가 남아 있기에 경제외교의 실상을 전해 두고자 한다. ‘4 차 5 개년 계획’58 억 달러 확보 <30> 경제외교 - 영국과 스위스에서 영국[英國]서 무역장관 등 만나 투자요청. 스위스 PICA 연설로 순방 마무리, 127 일 만에 서울로 돌아와서
나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 4 차 5 개년 계획에 필요한 100 억 달러의 외자 중, 현재까지 5 8 억 달러가 확보됐고, 이번 순방을 통해 나머지 외자 조달에는 별로 문제가 없다는 전망과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에게도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3 일간의 교섭 끝에 임계댐(강원 정선군) 건설용 5,000 만 달러, 현대 종합공장 건설용 4,000 만 달러, 현대디젤엔진 공장용 200 만 달러, 온산(울산 울주군)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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