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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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엄청난 반대를 한 미국
정유공장용 1,150 만 달러, 서울 팔당 수원지 500 만 달러 등, 모두 2 억 7,000 만 달러에 대한 지급보증을 확약 받았다. 원전 건설자금 조달. 미 독[美 - 獨]서 고배, 불[佛]서 장기차관 약속, 종자돈 마련. 재처리 연구시설은 미[美]반대로 무산. 전회에서 본 바와 같이 나는 1976 년 5 월 외자도입을 위해 외국 순방길에 올랐고, 첫 번째 목적지인 미국 워싱턴으로 갔다. 먼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윌리엄 케이시 미국 수출입은행장을 찾아갔다. 케이시 씨는 후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수장이 된 사람이다. 이 은행은 이미 웨스팅하우스사의 원자력 발전기 2 기 구입자금을 융자한 바 있었는데, 나는 추가 자금이 필요했다. 그에게 방문 목적을 말했더니, 국별 한도가 차서 더는 지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안해하면서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오찬을 같이 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됐다. 첫째는 미국 의회에서 수출입은행이 미국 대기업의 물건을 팔아주기 위해, 정부 돈으로 개발도상국에 저리융자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수출입은행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한국의 인권문제가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전부터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던 그였던 만큼,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후일 경북 울진군에 건설한 1, 2 호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시발(始發)이다. 이에 앞서 1974 년 과학기술처는 별도로 프랑스 프라마톰사와 교섭해,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얻어 핵연료 재처리에 관한 연구시설을 우리에게 팔기로 계약을 맺고 있었고, 이는 상기 원전(原電)을 구매하는 부대조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가 이것을 알고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핵 확산방지를 위해, 핵연료 재처리는 국제적 관리 하에 두어야 하고
개별적 국가가 아니라, 지역단위의 국제적 재처리공장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일개 연구 시설에 불과하니 이해하라고 촉구했으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한국이 연구시설을 이용해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만들면 그로부터 플루토늄을 추출해 원자탄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 계약을 취소하라 ? 강력히 압력을 가하고 있어, 나는 후일
바르 총리를 다시 만났을 때,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국 한 - 프랑스 양국 정부는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975 년 이후, 사상 최대 호황국면 수요 인플레 - 부동산 투기를 불러 왔고, 부동산 거래신고제 등 도입 제 1 차 석유파동의 충격으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후퇴 국면은 1975 년 여름 최저점에 도달한 뒤,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국도 그해 3 분기(7∼9 월)부터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고 수출도 예상외의 신장세를 보였다.
농업생산도 풍작을 이뤄 국내 경제활동이 상향 추세를 지속함으로써, 한국 경제는 다시 고도성장 궤도로 복귀하게 됐다. 1974 년 중화학공업의 수출 증대, 중동으로부터의 건설 수입(收入), 국내의 왕성한 개발투자, 소비의 폭발적 증가가 합세해 사상 최대의 호황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경제기획원(E P B)은 이에 고무돼 1976 년‘하반기 경제전망 및 대책’을 수립해 경제성장률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이때는 기획원, 재무부, 통화 당국이 합세해 과속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는데,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는 논거로 고도성장을 내세우고 있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76 년 13.4%, 1977 년 10.7%, 1978 년에는 11.0% 라는 경이적인 고속 성장이 계속됐다. 이 같은 경기과열로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표면화되면서, 수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 재무부는 늦게나마 1977 년 5 월 저축성예금 증가액의 40%, 요구[要求]불 예금 증가액의 70% 를 동결하는 유동성 규제 강화 조치를 취했는데, 건설부 소관인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는 어느 날 강경식 물가국장을 불러서 일본에서 부동산 정책에 관한 서적과 일본의 정책 자료를 수집해 오라고 지시했다. 빨리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야 하는데,
그에 앞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8 월의 휴가철이라 대통령이 경남 진해시 저도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청와대 비서실에 연락해 시급한 사안의 결재를 받아야하니 그곳에 갈수 있도록 연락을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나는 해군 함정을 타고 저도로 갔다. 매우 간소한 대통령 별장이지만, 6 홀 골프장도 있었다. 부동산 입법안을 보고하자, 대통령은“해결책은 있구만,”하며 흔쾌히 결재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골프를 치고 가라고 말했다. 저도에서 돌아온 후, 나는 1978 년 8 월 8 일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地]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여담이지만, 몇 년이 지나 일본 의회에서 우스운 일이 있었다. 한 의원이 부동산 투기 방지 대책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한국의 거래신고 및 허가 제도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일본 정부 당국은 우리가 모방한 법안을 만들어 놓고도
시행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그 의원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가세[附加稅]를 강행했다가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 朴대통령 경제장관 포함 11 부 개각 경질 20 일 만에 다시 靑경제특보로 부가가치세법은 1976 년 12 월 국회를 통과했고, 1977 년 7 월에 시행됐다. 예상대로 부가가치세에 대한 반발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영수증을 주고받자면, 우선 금전 등록기를 비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감췄던 세원이 드러나
납세액이 증가하고, 비자금 마련도 어렵게 되니 기업에는 매우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영수증을 주고받는 것을 야박한 것처럼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영세 상인들의 아우성이 들끓었다. 그들은 모두가 투표권자들인데, 납세액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납세자의 수로 따지면 전체의 80 ∼ 90% 를 차지한다.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은 1977 년 6 월 관계 장관들을 소집해 부가가치세 실시를 놓고 의견을 물었다. 난상토론이 있었으나,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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