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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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에 국무총리로,
전갈 면담 후, 얼마 안 돼서 총리로 임명, 1980 년 흉작 우려. 美 와 쌀 교섭 서울에 와서 이 장관을 만났는데,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찾아갔다. 전 위원장은 어쩌다가 중책을 맡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경제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는 대로 대답을 하고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과도기의 혼란을 극소화하기 위해 계획적이고 질서 있는 민주화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이 “지금 한 말을 나의 비서관에게 다시 한 번 말해 달라”고 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이번에는 유 학성 중앙정보부장의 전화였다. 정보부장은 8 월 말까지 꼭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오시면 알 것이니 꼭 오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무엇인가 조사할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오라고 하니, 안 갈 수도 없어서 미완성의 논문 원고를 맡겨두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알고 있던, 서정화 씨(다음 날 내무부 장관이 된다)가 지프로 비행기 승강대까지 달려오더니 나를 태우고 시내로 질주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축하합니다. 내일 국무총리가 되실 겁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 다시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부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나의 재산상태 조사했다고, 다음 날 전 대통령은 나에게 사령장을 주고 나서 소파에 앉자 “또다시 어쩌다가 중책을 맡게 되었으니 잘해보자”고 한 다음 그동안 나의 재산 상태를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과도기를 넘기면,
곧 사임할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진언했다. 구시대의 인물이 새 정부에 남아 있으면 폐가 된다는 말도 했다. 총리가 되고 보니 우선 금년에 흉작이 된다는데, 식량 사정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신 병현 부총리에게 P L 480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계획)을 교섭할 필요가 없는지, 농림부에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쌀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회답이 오자, 나는 곧바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교섭에 들어갔다.
늦으면 쌀 파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본권 신장 - 3 권 분립 - 간선제 골자, 헌법개정안 10 월 국민투표로 통과 1981 년 전두환 대통령 5 共출범, 새 헌법에 따라 1981 년 2 월 11 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정당별로 4 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3 당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선거인단 5,272 명 가운데, 90% 이상의 득표로 제 12 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로 이행하는 제 9 차 헌법 개정 작업이 뒤따랐고, 이로 인해 노태우 후보는 제 13 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 사건 5·18 민주화운동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에서 김대중 씨가 내란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당시 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이 일본에 왔다가 한국에 들러 1980 년 9 월 3 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美 대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에게
지미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그날로 돌아갔다. 미 국무부와 우리 정부는 보도진에 친서의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김대중 씨의 재판에 관한 것임은 명백했다. <51> 경제정책의 전환 고물가 - 수지악화 - 성장둔화 3 중고, 경제 활성화 처방 … 81 년 6.6% 성장 “과도기 넘기면 물러날 것”약속 지켜 돌이켜보면, 나의 내각은 강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대통령이 선택한 사람들이지만,
모두가 식견과 경험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경제팀으로는 신 병현 부총리와 이 승윤 재무부 장관, 서 석준 상공부 장관, 박 봉환 동력자원부 장관, 김 주남 건설부 장관, 고건 농수산부 장관 등 모두가 실력 있고, 나와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신 부총리는 경제 안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이 장관은 우리나라에 현대금융이론을 도입한 학자다. 게다가 김 재익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배치되었으니, 경제정책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됐다. 다만 신 부총리가 정책 조정에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관계 장관들을 오찬에 초대해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곤 했다. 경제성장 - 4.8 에서 - 6.6% 1981 년의 주요 개혁 사업으로는 4 월에 종래의‘공정거래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을 대신하는‘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모든 예산 지출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는 이른바,‘제로베이스 예산 시스템’이라는 예산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81 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석유 및 수입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고 정부의 경기 활성화 정책이 주효해 경제 성장률은 전년의 ―4.8% 에서 6.6% 로 반등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 사령장을 받을 때, 과도기를 넘기면 사임하겠다고 진언했었다. 나의 말을 지키기 위해, 연말 국회에서 예산을 통과시킨 다음,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대통령은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나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게 된다고 하니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982 년 1 월 3 일 개각이 단행되었는데, 나 때문에 이 승윤 재무부 장관과 박 봉환 동자부 장관 등 다른 장관들이 함께 사임하게 된 것은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전 대통령은 1 월 16 일 나를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아 ~ 아 ! 김 재익에게 한은 자료 수집 부탁하며, 첫 만남. 경제기획국장 임명. 관계[官界]에 입문시켜, 아! 아웅산 테러에 산화하다니 … 내가 한국은행에 다니던, 김 재익을 처음 만난 것은 서강대에 있을 때였다. 그는 어느 날, 연구실로 나를 찾아와서 초면 인사를 했다. 한문(漢文)에 인품을 표현하는 말로, 백석정간(白晳精桿)이라는 말이 있는데 김 재익을 보자, 나는 이 문구가 생각났다. 얼굴이 희고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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