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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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센터 준공, 극동건설 단 일원에 낙찰되다 !
무역협회 총회 결의로 일부 수입액의 1% 를 징수해 K O T R A 지원과 기타 수출 진흥 사업에 쓰기로 한 자금으로, 당시 김 정렴 상공부 장관의 주도로 실현될 수 있었다고 한다. 경쟁국인 대만과 홍콩도 같은 방법으로‘수출연합 진흥비’및 무역발전기금’을 각각 설치해, 수출 진흥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현대건설 등, 7 개 회사가 입찰에 참가했는데 개찰을 하고 보니 극동건설이 단돈 1 원을 입찰했다.
나는 날림공사를 연상하여 책상을 치고 화를 냈는데, 건설위원회는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극동건설은 의외로 착실한 공사를 하고 있었고, 일건 무역센터의 준공 협회 임직원 - 건설위 혼연일체 추진. 朴대통령 흉상 들어갈 공간 만들어 88 올림픽 개막 10 일 앞두고 개관식 협회 임원진과 직원이 일체가 되어, 공사에 매달린 결과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드디어 88 올림픽 개막식 10 일 전인
9 월 7 일, 200 여 명의 무역협회 회원 및 내외의 귀빈이 참석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제 한국무역센터는 국내외 무역업체에 필요한 모든 서비스와 편익을 제공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됐고 무역한국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역센터로 부상하게 됐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것은 수출이었고, 수출의 기관차 역할을 한 것은 누가 무어라 해도,
박 정희 대통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공사가 최종 단계에 이르렀을 때, 어디엔가 박 대통령 동상을 건립할 자리를 물색해 보라고 건설 본부에 지시했다. 건설 본부장은 지금의 트레이드타워 입구 오른쪽에 한 자리가 있다고 도면을 그려 왔다. 그러나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 내리는 판국이니 지금은 동상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후세에 언제인가는 박 대통령을 평가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상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특히 노 진식 건설 본부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 추진에 몰두했고, 외부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 후 임기 만료 후, 공항터미널 사장, 한국무역정보통신(KT - NET) 사장으로 활약했는데, 불행하게도 1998 년 10 월에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정말로 아까운 인재였다. 나는 그의 비문을 썼다. 무역자유화의 발자취“우루과이라운드 지지”민간 외교“농업은 공산품과 달라야”주장도‘1985 년의
국제적 인물 선정 영예. 1985 년 8 월 23 일 나는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센 타 바버라에서 열린, 세계무역엑스포에서 내가 무역 자유화를 통한 무역의성장 발전에 기여했음을 인정하여‘올해의 국제적 인물(International Man of the Year)’로 선정되었음을 축하한다는 편지였다.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으로 기금가치 하락에 사업규모 줄자, 신축건물 임대로
장학사업 등 유지 기고 - 강연 - 저술 다양한 대외활동 외환위기 - 민주화의 과정에서 민주화 진통에 구조개혁 발목 잡혀, 한보사태로 정경유착 실상으로 드러나, 외국채권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1997 년 11 월 외환위기로 한편 수입개방에 따라, 선진국의 제조업은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값싼 제품과 경쟁할 수 없게 되자, 서비스와 자본 수출로 눈을 돌리고 후진국에 서비스 산업과
자본거래의 자유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중 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개혁 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경제개발에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국제정세는 바야흐로 개방화와 세계화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1997 넌 11 월 외환위기기 발생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I M F 사태의 원인과 대책’이라는 논문에서 그 원인을 상세히 설명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민주화,
세계화의 역사적 추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개혁 개방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동남아시아국가들의 외환위기가 우리에게 파급됐다는 것이다. 오늘은 민주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1987 년 노태우 대통령후보의 6·29 선언을 기점으로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경제는 이른바‘4 고(高) 3 저(低)’ 즉 고임금, 고금리, 고지가, 고물가와 저 기술, 저 능률,
저부가 가치라는 난제를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자면 전면적 구조개혁이 불가피했다. 1996 년 경상적자 237 억불. 격렬한 노사분규, 부동산 투기, 집단 이기주의가 민간과 정부의 투자와 구조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수 출은 미국 경기의 회복과 일본의 엔고(高), 중국 특수 덕분으로 1995 년에는 1,000 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 나, 수입이 거의 완전히 개방된 상태에서 지가상승으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들의 수입수요가
급증하여 1996 년에는 사상 최대의 경상적자(237억 달러)를 기록했다. 경제부총리 7 번 경질 문민 YS 문민정부는 세계화의 구호를 내세웠으나, 그에 대응하는 구체적 시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구 중앙청 건물 철거, 외인아파트 철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월드컵 유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유치 등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을 자랑했다. 경제 침체로 여론이 악화되면, 경제 각료를 경질하여
국면전환을 시도해 문민정부 5 년 동안 경제 부총리가 일곱 번이나 경질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부패 청산이 정치 일정으로 등장하여, 그 과정에서 전직 두 대통령이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한보그룹 부도를 계기로, 정경유착의 연결 고리가 백일하에 드러나 은행장, 국회의원 등 공직자와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됐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마저 교도소에 수감됐다. 국민들의 실망은 고사하고,
국제 금융계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외환위기 - 세계화의 과정에서 외압에 빗장 푼, 자본시장 개방. 한국 고금리 현혹된 외국자금 밀물, 당국 단기부채 실태도 모르고 방치 1990 년대 초부터, 상품시장 개방과 함께 자본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외국의 압력이 점점 더해져 갔다. 나는 1995 년 2 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행한‘개방화 시대의 경제정책’이라는 연설에서 자본시장을 개방하자면,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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