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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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중화학 공업육성으로 선진화를 꿈꾸다.
경영이 사회문제로 부각했고, 국회에서도 은행 여신이 소수 가족 중심의 재벌에 편중됐다 하여 논란이 되고 있었다. 1974 년 5.29 조치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개발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하면서도 이런 사태를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결국 그것이 1974 년 5·29 조치로 나타났는데, 전례 없이 내각에 보내는 특별지시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대통령의 결단을 강조하고자 했던, 청와대 측근들의 발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지시문의 내용은 공개법인에 대해서는 금융, 외자 도입, 세제 면에서 특별 지원을 하되, 비공개 대기업에 대해서는 여신 납세사항을 종합 관리하고, 은행에서 신규 사업자금을 조달하려 할 때에 주식 공매를 의무화하며, 대주주에 대한 세무 관리와 외부감사를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금융 민영화, 기업공개, 외부 감사, 경영의 투명화는 선진화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일관되게 시행하지 못했고,
1997 년에 외환 위기를 당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구조 조정이 이루어졌다. <16> 중화학 공업의 발상 경공업만으론, 수출 증대 한계에서 대통령 “경제 명운 걸고 추진을” 자금조달 방안 마련 동분서주 첫째는 미군 7 사단의 철수, 베트남전쟁 휴전에 따른 국제정세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자주국방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서는 중무기의 대미 의존을 줄이고 국산화로 가야 하는데, 그것은 중화학공업 없이는 불가능했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경공업만으로는 수출 증대에 한계가 있으므로, 이제는 일본처럼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경제 발전 단계의 당연한 순서라는 생각이었다. 박 대통령은 1973 년 1 월 12 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중화학공업 선언[重化學工業 宣言]을 발표했다. 그 전에 이미 상공부,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 주도 아래 상공부, 과학기술처가 참여하는 중화학공업 개발계획 입안이 진행되고 있었다.
뒷날 보고 된, 개발계획은 철강, 비철금속, 조선, 전자, 화학 등 6 개 분야의 생산시설을 건설한다는 매우 야심 찬 내용이었다. 그러 나, 유감스럽게도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자금조달 방안에 관해서는 관계부처와 협의가 전혀 없었다. 대통령이 그들의 실물 계획을 재가하면, 재무부는 어쩔 수 없이 대책을 마련하겠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재무부는 언제나‘노(N O)’부터 하는 부처니까, 입안단계에 참여시키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화학공업 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나는 중화학공업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은 나의‘반론’이 크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나를 집무실로 불러서 타이르듯이 말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이 있다. 나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경제의 명운을 걸고 중화학공업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어서“장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해 봅시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잘“알겠습니다. 자금계획을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나 자신도 중화학공업에 부정적인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장예준 상공부 장관은 신발이나 섬유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은 얼마 가지 않아 후발 개발도상국들에 비교우위를 잃게 될 것이므로 중화학공업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대구의 섬유업계는 상공부 장관이 섬유산업을 경시한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장 장관의 견해가 백번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건설에 따르는 문제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먼저 시장 확보가 문제라고 생각됐다. 일본은 인구가 1 억 3,000 만 명에 가까워 국내 잠재시장이 크기 때문에 국내 시장을 통해 중화학 제품의 품질을 테스트한 다음 해외시장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써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인구가 3,000 만 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내수 시장이 작고 처음부터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기야, 우리 기업들의 수출 능력으로 미뤄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필요한 내자와 외자를 조달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중화학공업 개발을 위한 자금조달 방안을 보고해야 할 숙제를 안고,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국민투자기금[國民投資基金]이라는 발상을 하게 됐다. 이 착상은 일본 대장성의 자금 운용[運營]부 계정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일본 정부는 공무원연금과 같은 공공성 기금의 일정 비율을 채권을 주고 기금으로 흡수해,
산업 개발 혹은 사회복지사업에 사용했다. 이것은 정부 예산 밖에서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일종의 편법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공무원연기금 군인연기금 사립학교교원연금 산업재해보상기금 가족계획연구원기금 수출보험기금연금 국민저축조합 예금 등 공공기금이 있는데, 이 기금들은 은행에 예치돼 은행 대출 자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예치 자금을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을 주고, 투자기금으로 흡수하면
상당한 재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재무부 간부를 불러 내 생각을 말해주고‘국민투자기금’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창설하자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용만 이재국장의 보고에 따르면 공공성 기금의 동원만으로는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크게 미달한다는 것이었다. 일[日]대장성 연기금 운용에서 힌트 얻어 은행예금 채권인수 방안 마련 23 조원을 조성, 중화학공업 투자 즉 금융기관의 저축성예금 연간 증가액의
일정률(20%)만큼 국민투자채권을 인수(구매)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금을 요구[要求]불 예금이 아니라, 저축성예금과 연간 증가액에 한정한 데에는 이론적 근거가 있다. 즉 저축성예금 범위 내의 투자는 인플레이션 요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금융기관이 저축성예금 증가액만큼을 리스크가 없는 정부 채권에 투자한다는 것은 금융원리에 배치되지 않고, 큰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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