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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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아웅산에서 북괴의 테러로 우리의 인재를 잃다!
몸매가 날씬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정신과 사고가 매우 맑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유 솜(USOM·미국 대외 원조 처)의 위촉으로 한국의 통화정책 개선방안을 연구하던 중이어서 그에게 한국은행의 통계자료 수집을 부탁했다. 그가 자료를 가지고 올 때마다, 미국 경제학과 대학원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경제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미국으로 가라고 조언을 했다. 마침내 김 재익은 하와이대로
유학을 가게 되어 그곳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 과정을 위해 스탠퍼드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1968 년 내가 스탠퍼드대 대학원의 초청으로 그곳에 가게 되어 김 재익을 다시 만나게 됐다. 거기에서는 김 재익 외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곽수일(후일의 서울대 교수), 김 대영(후일의 건설부 차관), 김 윤형(후일의 동력자원부 기획국장, 한국외국어대 교수) 등의 수재를 만나 이들과 담론하며,
실로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몇 년 후 김 재익이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로 돌아와서 나를 찾아왔기에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았다. 나는 당연히 대학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정부에 들어와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전혀 거절하는 눈치는 아니었기에, 그를 경제기획원(E P B)의 경제기획국장 자리에 앉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부 직제(職制)에 따르면, 기획국장 자리는 고등고시를 거쳐
관료의 승진 코스를 밟아온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일반직’이고, 비서관과 같이 고등고시를 거치지 않고 장관과 진퇴를 같이 하는‘별정직’은 임명될 수 없는 자리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김 재익을 우선 나의 비서관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관료제도의 폐쇄성을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총무처 장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김 용휴 총무처 장관은 나의 부탁을 들어주어 기획국장에
별정직 공무원도 임명될 수 있도록 직제를 개정했다. 예정대로 김 재익을 경제기획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새로운 안목으로 제 4 차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을 편성했고, 기획원을 찾아오는 외국 신문기자나 기업인들에게 한국 경제의 실상과 개발계획을 재치 있게 설명하여 그들을 감탄하게 했다. 그로 인해 E P B 의 대외적 이미지가 높아지고, 동시에 투자유치에도 긍정적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전자교환기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위해, 나를 크게 도와주었다. 전두환 대통령 인제등용결단, 그는 철두철미한 안정주의자였다. 경제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 서, 종 종 전통적 관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수석비서관이 된 것은 한국 경제를 위해 크나큰 다행이었다. 그는 전 대통령이“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할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한국 경제의 숙제인 물가 안정화에 큰 몫을 했다. 물론 전 두환 대통령의 영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3 년 10 월 전[全]대통령이 동남아시아 순방길에 버마(현 미얀마)에 들렀을 때, 아웅산에서 북한이 공작한 폭탄테러가 발생해, 내가 그렇게도 아끼던 김 재익(경제수석비서관), 서 석준(부총리), 하동선(해외협력 기획단장), 이 기욱(재무부 차관)을 비롯해, 이 나라 최고 인재들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땅을 치며 울고 싶었다. 결국 내가 김 재익을 정부로 불러들여, 그를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닌가! 그의 유족들을 볼 때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53> 무역협회 회장으로 경험 못한 통상업무 도전, 흥미 사무자동화 - D B 구축 등, 추진 새로운 무역센터 건설도 구상. 1982 년 1 월 국무총리를 사임한 지, 2 주 만에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임명됐다. 이 회의의 의장은
최규하 전 대통령이고, 위원에는 허정 유진오 윤 치영 백낙준 유달영 씨 등 당대의 저명한 원로들이 포함돼 있었다. 회의 안건은 주로 대북정책과 경제정책에 관한 것이고, 회의에는 국무총리 이하 관계 장관들이 출석했다. 회의 결과는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무역센터 자체에 대해서는 배울 것이 많았다. 세계의 대표적인 무역센터에는 오피스, 전시장, 회의실, 통신시설, 연수원, 쇼핑센터, 호텔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서
무역관계자들에게 최고의 편익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만이 대규모 무역센터를 건설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수출입국’의 나라 한국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초라한 전시장과 중구 회현동의 무역회관이 무역센터의 전부였다. 나는 새로운 무역센터의 건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선 출마제의 정중히 사양하며“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역센터”역설, 대통령 재가 얻고 건설계획 박차 1984 년
전[全] 대통령에게 대선출마 제의를 받다. 1984 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안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3 년 후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노태우 장군이 당연히 차기 후보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의외의 말씀이었다. 아마도 대통령은 만일에 대비하여 문민 후보를 물색해 두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나는 대통령이 될 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은, 무역 센 타 건설이고, 나의 최대 관심사는 첫째로 부실공사를 예방하는 것과 둘째로 물자 구매와 각종 계약 과정에서 있을지 모르는 부정과 잡음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었다. 협회의 노 진식 전무를 건설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기술본부장에는 대형공사 경험이 있는 성 기영 씨를 임명했다. <55> 무역센터 건설 중 있었던 일, 사무동 공사 극동건설‘1 원 입찰’호텔 - 백화점
럭키 - 현대 갈등 중재 공항터미널은 실무자 설득 애먹어 무역센터를 건설하려면, 먼저 약 2,000 억 원의 건설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였다. 무역[貿易]특계 자금’과 서울 중구 회현동 무역회관 및 기타 보유 재산을 매각해 충당하고, 부족한 부분은 은행 대출을 받아 건설 후 사무실 임대보증금으로 갚기로 했다. 참고로 무역 특계 자금은 1968 년 제 11 차 수출확대회의 결정과 1968 년 12 월 27 일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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