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목별 짚어 보기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보다 7개월 전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그때도 지역 계엄령이 선포되고 1 공수, 3 공수, 해병 1 개
연대가 부산, 마산 지역으로 투입되었고
군의 진압답게(?) 아주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진압이 되었다. 심지어는 차지철같은 사람은
"탱크로 깔아 뭉개자"는 말까지도 했다는 것이 10.26 재판 과정에서
증언되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당시 해병 하사관으로 계엄군에 있었던 필자의 친지에 의하면 해병대의 진압이
아주 혹독했다고 자랑(...)까지 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역 직후였고 전역 전에는 전방 9사단에서 복무하였는데
뉴스에서 시위하는 것을
보면 군이 가서 강력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군인들도 상당히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10.26이 발생했고 거기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 과정에서 당시에는 서울 종로에 있었는데 허구헌날 데모에, 나날이
격해지는 전국적 시위,
최루탄 연기로 조기 퇴근을 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래서 무언가 극단의 조치가 있지 않으면 나라 꼴이 볼만 하겠다는 생각까지 하던 중에
광주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모든 언론은 검열되고 심지어는 외국잡지 타임, 뉴스위크 드에 광주
관련 부분은 검게 칠해져
있었고 약간의 특권을 이용하여 미대사관에서 볼 수는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고는 "아무리 계엄군이라도 이건 아니다."라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1. 광주시민들만
민주화 운동을 하였는가?
당시에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이 시위에 휩싸였으며, 서울에서는 아주
격렬했다.
그전에도 있었지만 5월 13일에
더 격렬해 지더니 5월 15일에는 서울역 지상광장에 10만명 이상이
모였고 각 대학의 학생회장은 물론 이수성 당시 서울대 학생처장까지 참여하였으나 군이 개입할
명분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지도부가 정부와 협상하여 해산하고 정상 수업을 받기로 하였다.
이후 경찰과 국방부가 합동 수사를 했으나 주동자와 주요 관련자들을 한 명도 체포하지 못했다.
그만큼 서울 시위 지도부는 영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광주는 그렇지 못하고 더 심해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시위진압을
하던 경찰들에 대한 폭력이
도를 넘을 정도였고, 당시에 전경으로 광주에 근무하던 친구 동생의
탈출기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이었다. 그는 광주일고 출신이었다.
2. 김대중이
선동하였는가?
일반적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시나리오인데, 이는 김대중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이다.
김대중은 정치적으로 보면 거의 여우 수준이며, 지략이나, 계략이나, 실행 등을 감안해 봐도 현재
존재하는 어떤 정치인도 그를 넘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근처에도 못 간다.
물론 시위대 요구사항에서는 "김대중 선생을 석방하라"라는 게 있지만, 김대중 본인은 그것이
자신을 석방하기는 커녕 더 위험에 빠뜨릴 것이며 정국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모를
리가 없고 그 정도의 노회한 사람이 그런 일을 사주 한다는 건 더 더욱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미 무죄 판결이 나와 있다.
4. 북괴군이
개입하였는가?
이는 지만원씨를 비롯해서 여러 명이 끊임없이 주장하는 바이나, 이들은
군작전이나 심리전을
너무 몰라서 자기 상상 속에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여겨 진다.
1) 600명이면 보병으로 말하면
1 개 대대 그것도 알짜 전투병력이다. 이는 특전사 1 개
여단
규모이다.
전투를
하려고, 혹은 전투 지원을 하려고 무장을 제법 갖추고 들어 온다면 단번에 난리가
날 것이고 이는
광주시민들이 단박에 진압군 편이 되어서 그들과 싸웠을 것이다.
자꾸만 전라도, 특히 광주사람들을 빨갱이 종북으로 몰지만 그들은 엄연히 대한민국 사람들이고
시위에 참여한
많은 젊은이들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장교.하사관들도 꽤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몽땅 빨갱이들이란 말인가?.
그들이 계엄군이
왔다고 모두 한 마음으로 김일성이 편을 들어 북한군을 환영하고 협력할 리도
없고, 그런 기미가 있으면
민심은 당연히 돌아설 테고 그런 정보가 누설 되면 전면전이 발생한다.
후방에 특수부대가
600명이 넘게 침투해 있는 데 군 지휘부가 가만히 있겠는가?
겨우(?) 특전사하고 당시 시위진압 전문부대인 20사단만을 보냈겠는가?
이 특전사는 종합
전투력이 강한 부대가 아니라 특수전에 특화된 부대이며, 당시 20사단은
허구헌날 시위
진압훈련을 받던 부대이다.
2) 그들은 전투임무가 주가 아닌 선동 심리전문가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전투를
하기 위해서 그 많은 병력이 광주에 집결을 하면 어떤 식으로 위장을 하던
시민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정신나간 전략가가 1 개 도시, 그것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도시에 장비 만으로는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는 곳으로 심리전문가를 600명씩이나
투입한단
말인가?
이는 심리전에 대한 몰이해에 오는 헛소리이다.
3) 그들은 과연 어떻게 그곳 광주에 집결할 수가 있는가?
간첩
몇 명 침투는 북에서 남으로나 남에서 북으로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몇 십명 단위는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더구나
600명 이상이라는 것은 상륙작전이나 대규모 전선 돌파전 외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만원씨는 육군 대령출신이고 기다란 가방끈을 자랑한다. 당신이 한번
600명을 침투시킬 수 있는
작전을 짜서 제시해 봐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침투작전에 신이다.
* 침투용 잠수정 : 침투요원 4~5명 / 소요 척수 100척
--- 그런 숫자는 북괴군은 없었다.
--- 있었다고 쳐도 100여 척이나 되는 잠수정이 기동하는 데 한 척도 탐지가
안 되고 그 먼 거리를 왔다가 돌아 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군은 소요사태 특히 심한 소요사태
때에 비상이 걸리는 게 일상이다.
* 고속 단정 : 침투요원 6~7명 / 소요 척수 60척
--- 영광군, 함평군이 상륙지점이어야 하는 데
그게 거리가 얼마인가? 과연 고속 단정이 그런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가?
--- 그리고 상륙 후에 배들을 어디에 숨기나?
* 복귀 : 작전 후에는
철수를 해야 하는데 탈출은 육로로 하기로 하였는가?
그러면 그 배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상륙 후에 공선으로 돌아 갔는가?
한국 해군은 수십 척이 그 먼 거리를 왔다가 돌아가도 전혀 까막눈이었는가?
아니면 육로로 월북을 하였는데 그런 소요 시에 전방은 당연히 엄청 경계령이 강화되었을
텐데 아군은 600명이 넘는 적들이 DMZ를 넘어가도 한 명도 탐지하지 못했고 흔적마저도
발견 못 했단 말인가? 필자도 전방에서 복무하였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현재보다는 장비가
부족했지만 그 정도로 엉성하지는
않았다.
5. 왜
무장 폭동으로 변하였는가?
여기에는 북괴군 개입부터 다양한 설이 있는 데, 서로의 주장이 목소리만
높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모한 진압작전과 시위대의 감정격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위대 지휘부가
장악력이 없어서 서울역 회전의 경우처럼 군 개입을 우려하기는 커녕 선동했던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시위가 격화되어서 경찰이 통제 불능상태가 되면 경찰은 군에게 요청하도록 되어
있는 건 어느 나라나,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유도된 군의 개입은 없었으나 감당이
불가능해 진 경찰측에서 군에게 요청하였는데 여기서 군의 판단(대통령, 계엄사령관)이 문제였다.
군은 어떤 작전을 결정할 때 지휘관이 맘대로 결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면 뭐하러 참모진이 있는가? 군단장도 사단장들과 토론하여 결정한다.
더구나 군단급 작전을 전두환 혼자서 가라 마라 할 처지는 아니며 당연히 계엄사가 결정했을
것이다.
문제는 왜 하필 시위진압 능력도 없는 특전사를 투입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거기에는 '특전사가 투입되면 시위대가 당연히 쫄아서 자진 해산할 거다' 하는 믿음이 있었을
것인데 이건 부마민중항쟁에서 공수부대와 해병대 투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 데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당시 특전사 지휘관들도 투입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고 격화의 엑스커레이터를 탔다.
시민 시위대에게 무서운 군대가 왔고 총격이 있으니 "에구머니나!"하고 풍비박산이 날것 같아도
이미 시위대에는 군필자가 많았음을 깜빡한 것이다.
만약 서울역 시위대에게 군이 포위하고 발포를 하였더라면, 결코 해산으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군끼리 전투가 벌어졌었을 지도 모른다.
군은 국가 편이고 국민 편이지 국민에게 총질을 하는 군인들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국민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총질할 대상이 절대 아닌 것이다.
사실 5.18때에도 포위된 광주 내부 상황을 외부 특히 서울에서는
강한 언론 통제로 그 정도인 줄은
몰랐고 소문은 많이 돌았으나 "설마?" "잘 해결될 거야!" 수준이었다.
전반적인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년 후였다. 그것도 불분명하게.....
필자는 대화 중에는 분명하게 "광주사태"라고 칭하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민주화운동이라기 보다는 부마와 마찬가지로 항쟁이며 과정 중에 양측 멍청이 지휘자들로 인하여
엄청난 피를 흘린 역사의 아픔이라고 여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은 광주만 한 것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은 광주만의 전용어가 아니다.
그리고 너무 울궈 먹고, 너무 독단적이며, 너무 확대 재생산하는 건 찬성할 수가 없다.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매년 바닥까지 휘젓으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보기에 아름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