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애
"정애가 죽었다구요?"
"시집도 안 가고 엄마랑 살다가 죽었습니다."
房部長이 나에게 전해준 말이다.
옆 사무실 房부장은 지기(知己)로 그는 나와 많이 친했다.
서너 살 많은 그와 나는 형님 동생하는 사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그의 고향이 安山의 옛지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애의 고향이 그 지역의 옛 지명 '와리'였다는 사실이 기억 나
혹시나 하여 그녀의 소식을 물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 전의 일이라
조금을 생각하다가 알듯하다며 그에 관한 것을 말해 주었다.
몸은 많이 약했고 형제남매들은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 했다.
아버지가 조그만 복숭아 과수원을 했으나
형편이 어려웠다는 등의 얘기가 내가 아는 사실과 같았다.
윤정애(尹貞愛)
그러니까 내가 군복무 시절,
제대 두 달을 남겨 놓았을 때
고참을 지나 ‘갈참’이므로 하루 세 끼 먹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가진 것은 시간뿐이다.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샘터'誌의 뒷 부분에 실린 독자隨感이 눈에 들어왔다.
法頂스님의 글을 읽고
감상을 적어 보낸 짧은 글로서 투고자 '윤정애'란 이름이 예뻤다.
말년에 한가롭기도 해서 종이 한 장도 다 채우지 못한 편지를 띄웠다.
그 당시는 상세(詳細)주소가 게재(揭載)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보름 쯤 지난 뒤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글씨도 예뻤고 장수로 넉 장이 왔다.
동료들이 돌려 보고 부러워했다.
그런데 고민거리가 생겼다.
어떻게 답장을 쓸 것인가.
글씨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그녀의 환상(幻想)적인 글에
도저히 흉내도 내지 못할 나의 글재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도 많이 보고
글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을 하며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나 어쩌랴!
며칠을 끙끙대며 답장을 만들어 보냈다.
흡사 열병을 앓고 난 것 같았다.
열흘 후쯤 답장이 또 왔다.
이번엔 여섯 장이다.
이렇게 두 세 번 편지를 교환하고 제대를 하게 됐다.
사단보충대에서 소지품검사에 이 편지가 지적되어
압수될 위기에 있었으나 간곡한 사정으로 모면(謀免)했다.
제대 후 어느 날,
어머니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날 좀 보자고 하신다.
정애가 보낸 편지 내 놓으며 누구냐고 채근하신다.
"군대서 심심풀이로 펜팔했던 여잡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은 군대로 끝내야지
집에까지 연장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별 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셔요.
제가 어디 어린앤가요?"
"부모의 눈에는 자식이 군대를 갔다 왔어도 아직 어린애다.
잘 처신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 후 학교를 다니며 편지는 계속되었다.
그 동안 정애의 편지내용을 미루어 보면 그의 사정이 기구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형편도 그랬지만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딸들은 제외가 되었다.
그녀는 공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해서
또래의 교복 입은 친구를 볼 때마다 부러움과 노여움이 사무쳤다.
그래 집을 나가자.
내 혼자의 힘으로 배우리라.
그녀는 무작정 上京해서
신문배달과 구두닦이 등을 해가며 공부를 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갖은 고난 끝에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자격을 땄다.
그 과정에서 영양실조와 병으로 쓰러지면 잠시 집으로 돌아왔으나
집이 그녀를 잡아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家出을 몇 차례를 반복해서
끝내 그녀는 所願을 이루었고 지금은 대학입시 준비 중이다.
그의 어려웠던 實例를 몇 가지 들어 본다.
먹을 것이 없어 보리밥에 간장으로 비벼 먹고
그나마 밥도 사치스러워 라면으로 배를 때우는 날이 훨씬 많았다.
하루 세 끼를 다 먹은 날이 거의 없다.
겨울에는 연탄이 없어 냉골에 체온으로 버텼고
자고 나면 몸이 펴지지 않아 한참을 애써야 했다.
손 발이 부르트고 동상이 걸려 피가 났다.
뚱뚱 부운 손으로 신문을 돌렸고 구두를 닦았다.
사나운 개에게 물려가며 돌린
신문대금을 떼어먹고 이사를 간 집도 많았다.
그 떼인 돈은 전부 본인의 책임이란다.
개에게 물렸어도 위로와 보상을 해 준 집이 없었고
떼인 신문대를 감면(減免)해 준 신문지국장도 없었다.
어린 나이의 그녀 눈에 비친 어른들이란 존재가 얼마나 無心했으랴?
그녀는 그러나 무섭게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그것만이 그를 위로해 주는 유일한 樂이었다.
순전히 獨學을 했으므로 사회성이 좀 부족하여 辭典에는 있으나
현실에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그녀의 편지에 간혹 있었다.
예를 들면,
철비(鐵扉)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 철문(鐵門)과 동의어였다.
영어단어 Suicide를 찾아보니 자살(自殺)이란 뜻이었다.
이렇게 그의 문장은 어려운 단어가 언뜻언뜻 보였고
대체로 문체(文體)는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히 詩人 김남조(金南祚)의 글을 많이 본 것 같아
나중에 물어보니 그렇다고 했다.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와리"가 그녀의 주소이다.
지금은 바뀌어 "경기도 안산시 와동"으로 되었다.
그녀는 나이 스무 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농삿일을 돕는다고 한다.
나는 그 해 여름방학 정애의 시골집을 방문키로 했다.
농번기라 바쁠 것을 예상하고
날짜는 정하지 않은 채 비오는 날을 택하여 가기로 했다.
비가 오는 어느날,
전철로 안양을 가서 수암면을 가는 시골버스를 탔다.
당시엔 마이크로버스라는 스무 명쯤 타는 차로서
일어서면 머리가 천정에 닿는 그런 작은 버스였다.
흙탕물을 튀기며 얼마를 달린 후
운전기사에게 물어 '와리'에서 내렸다.
비는 어느덧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났다.
얕으막한 경사에 펼쳐진 작은 동네는
정적으로 휩싸여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비 온 뒤에 난 햇살이 더웠고 땅에서는 열기가 올라왔다.
어느 집에 할머니가 계셔 정애를 물으니
동네 맨 윗쪽 대문집을 가르쳐 주었다.
열려진 문으로 들어가 인기척을 냈으나 아무도 없다.
대문 앞에서 얼마간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어느 지게 맨 아저씨가 다가왔다.
"이 동네 윤씨 성을 가진 정애를 찾는데 혹시 아십니까?"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청년이 최00란 사람이오?"
"아니? 저의 이름을 어떻게!"
"내가 정애의 애비되는 사람이오."
"아! 그랬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정애는 지금 밭에 있으니
집에 들어가 잠시 기다리면 그 애를 들여 보내리다."
"농삿일이 바쁠텐데 제가 밭으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애 아버지와 같이 오솔길을 따라 밭으로 가던 중
"우리 정애가 청년과 편지를 하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우.
안 그래도 청년이 궁금했고 한 번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하고도 싶었소.
어찌 되었든 참으로 반갑구려."
"정애가 고생하며 공부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다 이 애비가 못난 탓이라오."
복숭아 과수원에 도착하자
원두막에서 기다리라며 정애 아버지는 밭으로 갔다.
얼마 후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흰 남자 와이셔츠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손에는 호미를 든 아가씨가
고개를 숙이고 내 앞에 오더니 넙죽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정말 오셨군요. 제가 정애입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예! 내가 최00입니다.
편지로는 구면(舊面)이지만 얼굴로는 초면(初面)이군요."
어렵게 고개를 든 그녀는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옆 얼굴로만 얘기를 한다.
그 동안 고생한 그늘과 시골티가 섞여 갸날프기만 했다.
집으로 안내되어 마루에 앉자
정애는 부산히 움직이며 부엌에서 무엇을 한다.
얼마 후 대소쿠리에 노란 옥수수를 수북히 삶아 내왔다.
더운 날씨에 뜨거웠지만 맛있게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떻게 해서 나에게 답장을 하게 되었나요?
내용도 빈약하고 별로 성의를 들이지 않았던 편지였는데."
정애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저도 모르겠어요. 그저 우연였겠지요."
"샘터를 보고 정애한테 보내 온 편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일 수 십통에서 많은 날은 백여 통이 왔습니다."
"엣! 그렇게 많이? 그런데 그것이 왜 부끄러웠나요?"
"동네가 수근거렸고 집배원 아저씨에게 미안했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동네 꼭대기까지 와서
편지를 쏟아 놓고 가는 아저씨에게 죄 지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에 그가 하는 말이
아가씨만 아니면 이 동네에 올 일도 없다며 툴툴거렸고,
동네에서는 웅성거리며 말들이 많아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온 편지가 얼마나 됩니까?"
"다 셀 수는 없었으나
지게 바소쿠리로 두 번을 가져다 밭에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아니? 그렇게 많이!
샘터지의 위력을 인정해야겠군요.
그런데 그 중에서 답장을 몇 군데나 했습니까?"
또 한 번 그녀는 얼굴을 숙이며 붉어지더니
"오직 한 군데만···"
정애가 방으로 들어가서 상자를 가져와 내 앞에 밀어 놓는다.
꽃무니를 장식한 예쁜 상자이다.
열어 보니 그 동안 나 한테서 받은 편지가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나는 주택복권 두 장을 책갈피에 넣어
함께 포장한 한문 玉篇을 선물로 주고 왔다.
그녀는 편지에서 복권의 희망을 간직하며 산다고 했다.
비록 당첨에서 떨어진 복권은 종이지만
그녀는 그것에 희망을 化石으로 새겼다고 한다.
그것이 당첨금액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한테 받은 편지가 하나도 없다.
보관할 소중한 가치가 충분해서
그것을 부탁하고 누님께 편지를 맡겼다.
나중에 그것을 찾았으나 누님은 분실(紛失)했다며 주지 않았다.
아마도 버렸거나 불 태웠으리라.
어느 해 봄날 낚시를 갔다.
水仁線 협궤열차가 다니고
水路낚시가 잘 된다는 '고잔'이란 동네를 갔다.
워낙 솜씨가 없어 고기는 별로 잡지 못하고
그곳에서 만난 어느 선배 대학생과
술을 몇 잔 마시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올 때는 그 협궤열차를 다시 타고 인천으로 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수인선은 주로 생선아줌마들이
인천이나 수원으로 行商을 가는 열차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많이 났다.
그런데 그곳이 정애가 사는 동네의
바로 앞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라며
진작에 알았더라면 편의(便宜)를 봐 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복학을 하고 누님 댁에서 얼마간 기숙(寄宿)을 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누님의 얼굴이 곤혹스러웠다.
웬 와이셔츠 상자로 된 소포를 내 놓으며 풀어보라고 한다.
정애가 보낸 것이다.
그 안에는 각종 산나물이 곱게 다듬어 꼭꼭 눌러 담겨져 있었다.
풀어 헤쳐 놓으니 대소쿠리에 가득했다.
누님은 웬 떡이냐 싶어 내심으론 좋았으나
상대가 누군 줄을 몰라 다그쳐 물었다.
적당히 설명하자 신중히 알아서 하라고 했다.
한 달후 쯤 정애한테서 또 상자가 왔다.
이번에도 제 철 산나물이다.
이번에 누님은 좋아하기 보다는 걱정을 더 했다.
"너는 별반 아무런 생각이 없다지만 상대는 다를 수도 있다.
이만한 정성에는 의미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너만 홀로 無心하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 처녀와 너의 장래가 서로 맞지 않는다면
관계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 누님도, 별것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합니까?"
"넌 잘 모른다.
나는 같은 여자의 처지에서 한 얘기니까 잘 알아서 하도록 해라."
그날 옥수수를 배불리 먹고 정애와 뒷산에 올랐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바닷물은 썰물 때라 보이지 않고 갯벌만 보였다.
정애가 손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가 내가 낚시를 했던 고잔이란 동네란다.
협궤철도가 마치 장남감의 그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 고잔이라는 동네는 안산시에 편입되어 지금은 중심상권이 되었다.
많은 얘기를 하다보니
서산으로 해가 많이 기울어 그만 가겠다고 일어섰다.
올 때와는 달리 산 넘어에도 버스가 다니므로
동네를 거치지 않고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정애는 가지고 온 옥수수 보따리를 내 손에 들려 주었다.
이윽고 버스에 올라타고 출발하면서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정애가 답례로 손을 흔들다가 언뜻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며
그의 눈에서는 방울방울 빛나는 보석이 주르르 떨어졌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해서 갔고 나는 학업에 열중했다.
특히 복학을 하고 나이도 먹었으니
서너 살 아래의 후배 동급생들에게 여간 조심스럽지 않아
학업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정애한테서 그 후로 몇 번 편지가 왔으나 답장을 못한 채 겨울이 왔다.
한동안 뜸했던 정애한테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입시학원에 등록했다는 편지가 왔으나
그동안 나의 무성의가 부담이 되어 그것마저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한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房부장의 자세한 설명을 이랬다.
정애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정애는 결혼도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얼마간을 절에서 요양을 했는데
좀 차도가 있어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몇 달 전 마흔 살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정애는 솜씨가 좋아서 자수를 썩 잘했고
동네 여자 아이들의 머리를 곱게 땋아주고
떨어진 단추나 찢어지고 튿어진 옷가지를 꿰매주었으며,
특히 짜집기를 감쪽 같이 하는 등 손재주가 남 달랐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글짓기와 그림도 가르쳐
백일장과 그림대회에서 入賞하는 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한 때는 건강도 많이 회복하여 얼굴이 하얗게 예뻣다고 한다.
가난으로 부모가 자식을 위해 별로 해준 것은 없고
제가 알아서 크고 학업을 마쳐 능력을 갖췄지만,
결혼도 안하고 어미를 앞서 不歸의 客이 된 딸을
가슴에 묻고 혼자 사는 늙은 어미의 恨을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가능할 것인가?
그때는 너 나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니
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렵게 배워 익힌 그녀의 학업과 文才가
세상에 쓰이질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하겠다.
그러나 그녀가 희생하여 배운 오빠와 남동생들이
지금은 다 잘되어 부러움 없이 산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