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아랫목
11월 하순 아침, 온돌방에서 등을 폈다. 날씨 추운 날, 온종일 들판을 헤매던 노동에서 늙은 등짝과 허리가 해방되는 듯한 아침이다. 어젯밤 저녁을 먹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들어 온돌의 은근한 불기운을 느끼면서, 온몸이 개운한 청량함을 맛보았다.
어제 오후에 일하던 중, 짬을 내어 아궁이에 장작 몇 개를 올려놨었다. 밑불은 갈퀴나무(소나무 낙엽)로 불을 일구고 작은 삭정이 가지를 올린 다음, 밑불이 붙으면 큰 장작을 올려 아궁이의 불을 안정시키면 되었다. 그러면 장작은 스스로가 알아서 서로서로 몸을 기대고 에너지를 나눠 체온을 건네주면서, 혹은 몸을 뒤척이면서 불꽃을 일으키며 타는 것이었다. 그러니 장작불은 불 땐답시고 아궁에 앞에 오래도록 쪼그려 앉아 있지 않아도 좋았다.
온돌구조를 보면, 어쩌면 인생사 알뜰함과 그리도 닮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솥을 데우며 밥을 짓고 나면, 재아궁이엔 재만 남고 불은 ‘부넘기’를 넘는다. 고래로 연결되는 자그마한 언덕이다. 재는 부넘기 앞에 모두 모아져 거름으로 쓰이게 되고, 불은 고래라는 이름의 길을 따라가면서 방의 구들장을 덥히다가 바람막이턱을 향해 나아간다. 불은 바람막이 턱에서 마지막 온기까지 온돌을 향해 쏟아 붓고, ‘개자리’ 홈에 이른다. 개자리에서 불은 삶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불의 그을음과 티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가라앉는다. 그리고 마지막 굴뚝으로 그동안 키워온 나무의 모든 삶의 흔적들이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진다. 한마디 잡언(雜言)이나 미련조차 없는 깨끗한 모습이다.
그 알뜰함으로, 나는 시골집에서 일요일 아침이면 오래도록 온돌의 온기를 즐기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속에 오셨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통하는 부엌문 바로 앞자리에 몸을 누이시면서, 천국에서 잠깐 쉬러 오셨다고 하셨다. 얼마나 기뻤는지 “어머니 아예 가시지 말고 여기서 삽시다.”고 했더니, 곧 가야한다며 거듭 재촉하는 나에게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시다 잠을 청하셨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저승세계의 신참이고,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정해진 규칙이어서 마음대로 어길 수 없는 일인가 싶었다. 곧 가신다니 주무시는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운 얼굴 그대로, 어머니는 달게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나 잠시 뿐. 뜻하지 않은 어머니와의 상봉에 기쁜 마음 그대로 잠을 깼다. 큰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 다녀간 흔적은 방안 아무 곳에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누우셨던 그 아랫목 자리를 바라보았다. 오직 여자들만이 오가는 부엌 앞 작은 공간. 큰방 문이 남자들만이 오가는 통로였다면, 방안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그곳은 여자들만의 문이었고 통로였다.
어머니는 내가 철이 들던 어느 시절까지, 그러니까 삼촌들이랑 후실(後室)로 들어온 할머니가 집안에 계실 때까지 한 번도 밥상에서 식사를 드신 적이 없었다. 언제나 부엌에서 먹었고, 언제나 반찬 한두 가지에다 국 한 그릇을 놓고 드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은 남자들과 어른들은 상 위에서 먹고, 대개의 여자들은 부엌에서 밥을 먹었을 때였다. 남존여비(男尊女卑), 가부장제(家父長制) 하에서 여자들은 그렇게 살았었다. 그러나 시집온 뒤부터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까지 어머니는 아무런 불만 없이 그런 차별 속에서도 열심히 당신의 소임을 다하며 사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봄가을은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지만, 비바람이 불거나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엔 부엌에서 식사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름 폭풍이 불거나 눈보라 치는 겨울엔 가끔씩 방에 들어오셔서 식사를 하셨다. 여전히 밥상 없이 방바닥에다 밥 한 그릇과 반찬 한두 가지, 국 한 그릇을 놓고 드시는 것이었다. 그 자리가 그 부엌문 앞 아랫목이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혼자 드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안쓰러워 내 밥을 갖고 어머니한테 가서 함께 먹곤 하였다. 물론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밥상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런 어머니 곁에서 밥을 먹곤 하였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그 부엌문 앞 아랫목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아버지가 앉아계시는 아랫목만큼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온기가 제법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다. 넓이는 손뼘으로 한 둘레 정도, 어머니 엉덩이가 차지할 만큼의 면적. 조금 벗어나면 냉기가 느껴지는 그 자리는 분명 다른 곳보다 더 따뜻했다.
궁금해서 그 까닭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한번은 집 개축하는 공사가 있었단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일은 기술자가 하는 일이었지. 오래된 방안 구들을 뜯어내고 새로 구들을 놓는 일인데, 그런데 그 공사를 우리 친정 친척오빠가 맡았더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커온 오빠는 나를 무척 아꼈고, 시집 온 후로도 고생하는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우리 정실이(정씨집안으로 시집오셨다 해서 친정에서는 ‘鄭室이’라 불렀음) 추운 겨울에나 따뜻하게 밥 먹으라고, 오빠는 고래길을 이곳으로 터서 불길을 조금 이 자리로 끌어오게 만드신 거란다.”
가엾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시대, 남자만 대우받던 시절에 그 자리는 친정오빠가 베푼 따뜻한 위로의 자리였을 것이다. 어머니 역시 자리에 앉을 때마다, 친정오빠의 배려에 작은 위안이나마 받았을 것이고. 친척남매 사이에 오간 말없는 사연이었지만, 나에게도 잊지 못할 어머니의 자리였다. 시할아버지부터 시아버지, 시어머니, 나중엔 후실 시어머니까지 줄줄이 모시고 나서도 삼촌들 제금낼 때까지 한 번도 밥상 앞에 앉아보신 적이 없는 어머니를 추억하는 자리는 매운 연기만큼 잊혀지지 않는다.
모진 시집살이, 아니 시집와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다간 그 헌신과 희생의 흔적이 화석처럼 굳어진 부엌문 앞 아랫목이었다. 그곳을 바라보면, 앉아있기가 허용되던 날의 여름 비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겨울 눈보라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어른들 상에 올리고 남은 처진거리 반찬과 멀건 국물만으로도 만족해하며, 어머니는 당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고 가셨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는 내 눈동자만 오늘도 젖어 있을 뿐이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있을 사람이 없다. 시골집은 아버지만이 집을 지키고 계시다가 당신께서도 지난 8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셨다. 이제 시골집은 내가 주말마다 농사일을 하러 다녀갈 뿐, 다른 식구가 없어서 그 자리는 오직 어머니의 자리로 남아있다. 이후로도 아무도 그 자리에 앉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아랫목 자리는 추억 속의 어머니가 되어 따뜻한 온기를 지닌 채, 오늘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또 언제 어머니는 지난밤 꿈처럼 천국에서 잠시 쉬러 오실지 모른다. 오시면 바로 그 자리에서 또 잠을 청하시겠지 싶어, 손으로 쓸어보고 걸레로 닦아본다.
정재학
자유논객연합 부회장, 시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자유교원조합 중앙고문, 국가유공자, 데일리저널 편집위원, IPF국제방송 편집위원, US인사이드월드 편집위원, 전추연 공동대표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