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 Digest-75(完)
BC.753연 로물루스가 이탈리아반도 중부 테베레강 가에 로마를 건국한 이래 王政과 共和政을 거치면서 7백년이 흐르고 카에사르에 의해 世紀 직전, 帝政의 터전이 닦이는 과정까지를 前篇 로마史 Digest-75회로 연재를 마감하고 超大國 帝政로마 역사는 後篇으로 적정 기회에 재연재 하고자 합니다.------
8년간 전역을 치룬 갈리아(현 프랑스 일원)의 당시 인구는 천 2백만이었으며 그중 백만이 전쟁으로 희생되고 백만이 로마인의 노예로 전락했다.
BC.52년 알레시아(Alesia) 전투에서 5만 병력으로 34만 적에 완승한 카에사르는 다음해 戰後處理까지 8년 갈리아(Gallic)戰役을 종료하고 알프스를 넘어 北伊屬州로 향한 것은 BC.50년 여름이었다.
北伊 라벤나로 들어가는 도중 카에사르의 귀에 들어온 정보 하나는 副長 라비에누스에 元老院파가 접근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리아전쟁 8년간 문자 그대로 일심동체로 싸와온 그에게 카에사르는 북이속주 주둔 군단의 지휘를 맡기고 있었다.
카에사르가 북이에서 월동할 수있던 해에도 갈리아에 머물러온 라비에누스를 북이속주에 주둔시킨 것은 순전히 그에 대한 카에사르의 위로의 뜻에서 전쟁 염려없는 평온지역에서 휴식을 만끽하라는 것과, 두번째 執政官 출마를 노려 북이속주를 연고지로하기 위해 가장 신임하는 라비에누스를 거기에 보내고자 함이었다.
카에사르와 크랏수스와 함께 三頭政의 일두에서 원로원파로 변신한 폼페이우스로부터 조상 대대 자기의 小作人이었던 라비에누스에 회유의 손길이 뻗힌 사실에 카에사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결국은 루비콘江 도하 시점에 심복 라비에누스는 카에사르를 배반한다.
*院老院 反카에사르파의 집요한 공격
삼두정의 한쪽 크랏수스는 동방의 페르시아전역에서 전사했고 남은 폼페이우스를 원로원파로 끌어들여 카에사르를 로마정계로부터 고립시키려는 것이 원로원의 목적이었다.
BC.50년 말로 총독임기가 끝나는 카에사르는 생애 두번째 집정관이 되고자 했다.
국법에 따라 총독 임기만료와 함께 휘하 군단병력을 해산하고 국경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에 귀향해야 했으나 카에사르는 무장해제인채 로마에 들어와 집정관 입후보를 할 경우 재야신분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법률위반 소추사건에 휘말려 집정관 입후보 자체가 무산될 위험을 걱정했다.
총독임기가 끝났음에도 군단병을 해체 않는 것은 중대한 국법 위반일뿐 아니라 원로원의 본국 소환명령에도 불복함으로써 마침내는 원로원에 의해 국적으로 단죄 위기에 몰린 카에사르는 자파 護民官 입법을 통하여 갈리아전후처리를 이유로 총독임기 1년 연장을 주장했다.
그러나 BC.51년도 집정관 反카에사르파 마르케루스 제안에 의한 카에사르 최고사령관 해임 결의안이 원로원을 통과하고 본국소환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동시에 the Sanate Ultimatum<元老院 최종권고>이 자파 호민관 안토니우스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강압 의결되어 국가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군단해체와 함께 본국 귀환을 거부할 경우 카에사르는 國賊으로 재판 없이 처형되는 위기를 맞는다.
한편 원노뤈은 카에사르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임페리움 즉, 절대통수권을 부여하고 군비명령을 내렸다.
BC.49년 1월7일이었다.
그가 요구한 총독임기 1년 연장요구는 묵살되고 귀국명령에 불복해 이미 국적으로 단죄된 상황에서 카에사르가 할 수있는 것은 폼페이우스군에 앞서 현재 병력으로 로마에 진격하는 길 밖에 없었다.
北伊 주둔지 라벤나는 국경의 강 루비콘을 지나 로마령 북단도시 리미니로부터 50킬로 북방. 수하 병력은 1개군단뿐이었으나 갈리아에 잔류 중인 나머지 군단병력에 후속 참전 명령을 내리고 출진한다.
*루비콘江에 뿌린 카에사르의 苦惱
카에사르는 고민했다.
시국관은 다르지만 출신 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큰 키에 마른 체격과 결단력 있는 성품으로는 짝통인 과거 25년전의 적, 독재자 스츠라와는 달리 카에사르는 그러나 法治를 따르고자 많은 타협안을 냈으나 원로원에 의해 묵살될 때마다 쓴잔을 마시면서 일념 갈리아전후처리에 힘을 쏟았다.
사상 전무후무한 20일간의 神에 바치는 戰勝紀念祝祭까지 인정한 원로원이 오늘에 와서 카에사르를 결사 배척한다.
원로원에는 카에사르가 두번째 집정관이 되면 종신독재자나 왕이 되어 국정을 전횡할 것이라는 기우가 팽배했다. 그리되면 7백년 전통의 원로원 권위는 실종되고 원로원 귀족들은 신분격하의 신세를 면치못할 것이라는 것이 카에사르 타도의 주 이유였다.
카에사르의 꿈은 달랐다.
테베레강가의 촌락같은 로마가 지중해를 內海로 할만큼 유럽 일대를 제패하여 초대국이 된 지금 원로원 중심의 寡頭政으로는 방대한 영토에 통치권이 미치기 어려우므로 강력한 帝國統治權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카에사르의 현실인식이었다.
이같은 인식의 차이가 원로원과의 마찰을 빚은 데해한 카에사르의 고민은 컸던 것이다.
일단 원로원 최종권고를 받아 국적으로 몰린 카에사르의 입지는 항복이냐 도전이냐 택일의 기로였다.
루비콘江 앞에 선 카에사르는 국법을 犯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보다 국법을 범해서까지 결행해서 일어나는 결과 내지는 여파가 무엇이냐를 생각했던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지다
BC.49년 1월 12일 아침 루비콘강을 어떻게 건넌느냐를 카에사르 자신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의 <內戰記>는 병사들이 결의를 외친 것을 쓰고 줄을 바꾸어 <그들의 마음을 안 후 군단과 함께 리미니를 향해 떠났다>고만 되어있다. 극적인 장면이면서도 극적 표현을 즐기지 않는 카에사르의 담담한 면모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주둔지 라벤나에서 루비콘강까지 35킬로 거리를 야간 행군으로 도착한 것은 아침 7시였다.
강기슭에 선 카에사르는 곧장 도하를 주저했다.
휘하 13군단 병사들도 말없이 최고사령관의 등뒤를 바라본다.
마침내 뒤돌아선 카에사르는 가까이 있는 막료들에게 말했다.
<여기를 넘으면 인간세계의 慘狀. 남지 않으면 우리의 破滅.>
그리고 바로 자기를 바라보는 병사들을 향해 망설임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친다.
<나아가자. 諸神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를 모욕한 敵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젔다!>
그 유명한 카치프레이즈 <주사위는 던져젔다>는 마지막 말한디가 마침내 로마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이후 내전 중 원로원파 폼페이우스軍을 저항자는 섬멸하고 귀순자는 관용으로 포용하며 로마 마지막 外敵 동방의 폰토스왕국을 평정하면서 유명한 전황보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vidi,vici)>를 로마원로원에 보냈다.
카에사르는 또 유명한 게정年歷 율리우스歷(현 글레고리력 전신)을 만들어 정확한 달력을 보급했고 누이동생 손주벌의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지명,제정로마 초대황제에 즉위케하면서 많은 국정개혁을 단행 중 비운의 날을 맞는다.
BC.45년 3월 15일,원로원 등원길에 비무장인채 잠북중이던 14명의 자객에 의해 23곳의 상처를 입고 殞命한다.
거기서도 또 유명한 이승에서의 마지말 <부루터스 너도야?>하며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도 흐트러진 토가(스커트) 매무새를 바로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한시대 영웅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完)
로마사 이야기의 성격상 마무리가 카에사르 개인에 치중되었음을 말씀드리면서 연 75회에 걸친 歷史교훈 로마史-Digest 전편 王政 共和政篇 연재를 마칩니다.
천년 帝政편은 약속한대로 준비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2부로 이어지는 로마史 帝國篇은
이 게시판의 1페이지 1번부터
6페이지 74번까지읽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