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교훈 로마史 Digest-71
카, "동맹국 소호를 위해 적을 처부수는 것은 로마人의 전통이다" 一戰 不辭
로마군단은 긴급 소집된 확대작전회의에서 장병들에 대한 카에사르의 질타와 훈시로
게르만族 공포에서 깨어나 헤드위族長의 길 안내로 7일간의 강행군 끝에 37킬로 거리의 적군진지까지 접근했다.
이를 안 게르만군 두목 아리오비스토우스는 자기 지배 하의 지역에 카에사르 측이 왔으므로 이 상황에서면 회담해도 좋다는 뜻을 사절을 보내 카에사르 측에 전해왔다.
카에사르도 응낙했다.
회담장소는 양군 사이에 가로놓인 넓은 고지대, 날짜는 5일 후로 결정되었다.
양 수뇌를 수행하는 호위병은 步兵이 아닌 騎兵이 좋겠다는 아리오비스토우스의 요구대로 카에사르는 수락했다.
게르만족은 유명한 로마군 重裝步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군의 주력을 보병보다 기병으로 거느린 게르만족에 반해 로마군의 騎兵團은 헤드위族을 주축으로한 갈리아族들로 구성된 비주력부대임에도 카에사르는 적의 제의를 서슴없이 받아드린 것이다.
해서 外人 호위병에 대한 불안을 느낀 카에사르는 갈리아기병을 말에서 내리게하고 대신 제10군단의 중장보병을 태와 회담장으로 향했다.
양방에서 접근한 두 수뇌는 고지 오르막길 3백미터 지점에서 호위 기병단을 대기시키고 게르만측의 요구대로 10기만을 거느리고 고지 정상에서 馬上會談에 들어갔다.
먼저 카에사르가 입을 열었다.
발언요지는 서신교환 중 언급한 내용 그대로였으며, 카에사르는 다음 말로 결론을 맺었다.
<동맹자이며 우호관계에 있는 민족의 힘을 북돋우고 나아가 보다 번영되고 명예를 높이도록 노력하는 것은 로마국민의 전통이다.
그 로마인 누구가 제 동맹관게에 있는 헤드위족의 소유물이 약탈되는 것을 보고도 못본척할 수있겠는가?
본관은 귀측 사절에 기전달한 요청을 되풀이 할따름이다.
헤드위족과 그 동맹부족에 대해 싸움을 걸지말 것.
그들로부터 앗아 간 인질을 송환하고 포로도 반환할 것.
이미 갈리아땅에 이주해 살고 있는 게르만인을 돌아가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더이상 라인江을 건너오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이에 대해 아리오비수토우스의 반론도 주고받은 서한에서 밝힌 것의 반복이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게르만인이 멋대로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갈리아인이 불러서 도하했다는 것이다. 요컨데 이미 로마의 속주가 된 남부 이외의 갈리아에는 카에사르도 손을 대지말라는 것이다.
손을 대면 전쟁 날 수밖에 없고 싸움이 나면 로마와의 우호관게가 깨진다고 카에사르가 말하지만 본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장에서 카에사르가 죽으면 로마에서는 많은 귀족들이 좋아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호의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이라는 것이 게르만인들의 생각이다.
로마에서의 元老院派와 카에사르 간의 알력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정보통임을 의미했다.
여기에 대한 카에사르의 반론이 막 시작되려는 찬라였다.
아리오비스토우스를 수행해 온 게르만기병이 카에사르측 기병에 접근해 돌을 던짐으로써 사태가 위급해졌다.
카에사르는 발언을 중지하고 기병대 쪽으로 달려와 그곳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보병끼리라면 제1-군단은 무적이지만 적측은 생소한 기병이다.
급조한 기병단에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총사령관 카에사르의 명민한 판단이었다.
아마도 카에사르는 회담 전에 이미 전투는 필지라고 판단했음이 틀림 없다.
그렇더러도 회담에 응한 것은 휘하 장병과 멀리는 로마에까지 회피하는데 전력을 다했으나 전투는 불가피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카에사르가 예측한대로 양군은 전쟁을 향해 서로 접근해갔다.
게르만 측의 전력이 얼마였는지 카에사르는 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12만이라는 기록이 앞에 있던 것으로 미루어 카에사르가 쓴 갈리아전기에서 <적의 엄청난 수에 대해 아군은 소수였다>고 한 말은 타당한 서술이었을 것이다.
특히 기병은 갈리아기병에 의존해서 고작 4천인데 비해 게르만 측은 6천으로 단연 우세했다.
게르만족의 전투 방식은 로마인과 달리 정주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녀자들까지 전장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상레이므로 가족을 태운 마차를 배수의 진으로해서 아리오비스토우스는 그들의 격려에 힘입어 분전을 불사했다.
한편 카에사르가 취한 진형은 배수의 진이라기보다 뭔가 여유가 있어보인다.
첫째 6개군단에 각각 군단장을 배치하고 지휘는 카에사르가 맡기때문에 그들은 지휘관이 아니며 다만 각 병사들의 전투 모습을 체크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서 카에사르는 병사들이 勇戰하면 반드시 사령관 카에사르의 눈에 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장에 임하게 만든다. 카에사르의 少數精銳 운용의 묘가 여기에 있다.
갈리아戰役 제2전이 되는 이 전투에서 카에사르는 배수의 陣을 치지 않았으며 敵情을 정확히 파악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敵陣의 右翼이 약체라고 판단되면 거기에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게르만軍은 갈리아人들처럼 서전에서는 돌격력이 우세하지만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힘이 약해지는 결함이 있다.이것을 간파하고 치고나가는 카에사르의 전술력은 뛰어났다.
임기응변의 전술을 구사하는 카에사르의 전투지휘술은 로마군의 구성이 중대, 대대, 군단의 순으로 정비되어 있고 전술이 바뀌드라도 각 대형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효과를 발휘했다.
로마군단의 전통적인 기본 전술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여기에 대해 게르만군은 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式의 大型의 密集隊形으로 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는 전방 공격은 강할 지모르나 측면은 허술해진다.
기병 하나하나는 강하지만 지휘관은 기병단으로서 정돈된 상태에서의 기동력을 활용 할줄은 몰랐다.
하지만 數는 많은 경우에 한 몫을 한다.
2배 이상의 적에 공격을 받아 열세에 몰린 로마軍의 右翼을 구한 것은 젊은 용장 크락수스의 솜씨였다.
폼페이우스와 함께 3頭政의 일익으로 발티아(페르샤)침공전에서 분사한 아버지 크락수스의 장남인 청년장교는 기병단 지휘가 맡겨져 있었으나 제3軍列의 병사들이 활용되고 있지 않은 점에 착안, 그들을 이끌고 右翼 지원에 달려갔다.
그것이 승패를 가른 것이다.
적은 모조리 등을 돌렸다.
게르만군은 戰場으로부터 7.5킬로 거리의 라인江을 향해 패주해 갔다.
그것을 카에사르의 진두지휘 하에 로마군 기병단이 추격했다.
그 뒤를 대열도 흐트리지 않은채 보병군단이 딸았다.
뗏목이나 작은 배를 발견해서 강을 건넌 적병은 소수였다.
아리오비스토우스의 두 명의 처와 딸 하나는 살해되고 다른 한명의 딸은 포로가 되었
다.
게르만군에 붇들렸던 갈리아인들은 전원이 자유를 찾아 풀려났다.
이 전투 결과가 알려지자 라인江 도하를 노려 강변에 운집해 있던 게르만의 수베비(Suwevi)族은 갈리아 이주를 단념하고 저들 살던 터로 되돌아갔다.
두목 아리오비스토우스는 가족을 버린채 라인강 동쪽으로 도망가는데 성공했나 그 1년 뒤 외롭게 죽었다는 후문이다.
갈리아戰役 초년을 두 번의 戰勝으로 장식한 카에사르는 9월 중순이면 월동휴전기는 아니었으나 전군에 긴 겨울휴식기간을 주기로 했다.
로마군의 갈리아전 첫 冬營地는 세쿠아니族의 본거지 부잔손으로 정했다.그 위치에서 보면 갈리아보다는 라인강 쪽을 감시하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동영지의 최고 책임은 부사령관 라비에누스(루비콘강에 주사위를 던질 때 카에사르를 이탈, 폼페이우스에 가담)에 일임하고 카에사르는 內政과 司法 업무가 기다리고 있는 北伊와 南佛 그리고 지금의 슬로베니아 지역의 과범위한 지역의 屬州總督 임무 수행을 위해 전선을 떠났다.
BC.58년, 이 해의 戰役은 많은 점에서 후세에까지 미치는 영향의 시초가 되지만, 그
중에도 특기해야 할것은 국가 로마의 基本防衛線으로 시사되는 카에사르의 구상일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방위선으로는 배후가 가려진 山脈보다도 감시의 視野가 트인 河川이나
바다가 적합하다는 로마人의 기본 전략개념의 기초가 놓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카에사르의 게르만 대책의 철저를 기한 두 번에 걸친 라인江 渡河作戰과 북동부갈리아, 즉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지역의 평정, 그리고 도버海峽을 건너 역시 두번에 걸친 잉글랜드 침공전 등을 성고리에 수행했다는 사실만을 포괄적으로 언급하는데 그치고 갈리아전역 최종 決戰場이 되는 알레시아(Alesia)전투를 끝으로 카에사르의 갈리아戰記의 대단원의 막을 내릴까 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