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 Digest-31-
고대로마사는 우리로 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라해도 좋을 것입니다.
땅을 파헤치는 고고학으로 봐도 되잖나싶구요.
동양의 문명이 목재와 흙으로 시작되었다면 서양의 문명은 석재와 철로 이뤄졌다고해서 헛말이 아닙니다. 그래 수 천년 남아서 전해져오고 있는 것이죠.
그리스語 라틴語는 말할 것없고 기념으로 남긴 각종 건축물이나 조각들까지 옛날 일어났던 사건 史話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史家 폴리비우스, 로마史家 리비우스 등 많은 역사가들의 史料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사에서도 대표적 사례가 카에사르의 <갈리아戰記>, <한니발戰記>가 그것입니다.
특히 전쟁에 임하는 사령관들, 스키피오 같은 명장들은 記錄副官을 반드시 대동 했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죠.
게다가 로마 지성들은 bilingual이였습니다. 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해서 로마史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픽션이 아니라 다큐먼트로 보면 됩니다.
*로마의 戰後處理
여기서 기왕에 우리가 역사의 敎訓을 얻고자 한다라면 한니발과의 싸움 제2차 포에니전쟁 이야기 이전에 이긴 측의 로마와 진쪽의 카르타고가 전후처리를 어떻게 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제2차 포에니전 사이는 23년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이 23년간을 로마人 카르타고人 아무도 필지 전쟁 재발을 사이에 둔 단순 休戰期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은 재발했다.
종전과 함께 로마에 찾아온 두두러진 현상은 그리스文化에 경도하는 모습이었다.
아테네가 건재하던 시대로부터 그리스文化의 근거지였던 시칠리아島 시라쿠사의 문화수준은 남 이탈리아 어느 그리스人 도시들보다 비할 수없을만치 높았다.
로마의 良家 자제들이 그리스문화 열풍에 휩싸이는가 하면 로마에서는 그리스喜劇을 모방한 라틴희극이 처음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희극작가는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였다.
그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BC.240년에 라틴文學史가 시작된다고까지한다.
그는 그리스語를 읽지 못하는 서민들을 위해 호머의 서사시를 라틴어로 초역해서 발행하기도 했다. 최초의 라틴희극 작가로 지목되는 프라우토우스가 활약한 시기도 이때였다. 그리스희극을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후일 르네상스時代의 희극에 영향을 기쳐 18세기 베네치아의 희극작가 골드니를 거쳐 이탈리아희극의 원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로마인들의 바일링거(二重國語) 경향이 짙다는 것에 놀란다.
征服者가 피정복民의 언어 습득에 열심이고 문화를 좋아하다면 피정복자의 마음도 미묘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없을 것이다.
그리스열풍은 元老院이 바라던 바였다. 그들은 솔선해서 피정복민을 가정교사로 초빙한다거나 비서로 고용하고 子弟들을 피정복지에 유학 보내는데 서슴치 않았다.
그리스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로마에 완전히 동화한 에토루리아人은 변함 없이 土木事業에 수완을 보였고, 남 이탈리아의 그리스人들은 通商을 전담해 줬다.
시칠리아가 傘下에 들어와 그리스문화의 도입이 본격화 되면서부터 藝術도 哲學도 數學도 그리스人에 의탁한 셈이었다.
그같은 로마인의 개방성은 시대를 거치면서 확대되어가지만 21세기 지금도 체재허가 하나를 받는데 까닭을 떠는 국가가 하나 둘이 아니니 대체 그런 나라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로마는 23년 동안 평화무드에만 젖은 것이 아니다.
시칠리아州 통치에 새로운 통치수단이 도입되었고 기원전 6세기 중반의 왕정시대 6대왕세르비우스가 제정한 稅制 兵役制 選擧制가 3백년 만에 개혁되기도 했다.
이탈리아반도 동해 건너 지금의 유고땅 이리리아에 출몰하는 해적떼도 소탕하고 북방 갈리아인 상대의 전투도 벌여야 했다.
*카르타고의 전후처리
한편 패전국 카르타고의 국내 사정은 전후 어떠했는가?
나라의 국방을 타국 용병에 의존한 카르타고에서는 시중에 떼지어 돌아다니는 용병의 모습을 흔히 본다. 스페인, 그리스, 갈리아, 아프리카 등 각지 용병들이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출신동지끼리 어울릴 수밖에 없어 떼로 몰리게 된다.
시칠리아로부터 철수해온 이들은 이제 用途廢棄物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출신지로 돌아가야할 처지이지만 카르타고정부로부터 傭兵料가 지급되지 않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패전으로 재정긴축이 불가피한 카르타고정부는 용병료 지급을 미루면서 전쟁이 여름에 끝났으므로 반액으로 깎겠다는 것이 카르타고측의 생각이었다. 물론 용병들은 무장한 상태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디어 무장한 2만의 용병들은 출국시까지 체류 중이던 시카市를 나와 수도 카르타고로 향했다. 20킬로까지 육박하자 카르타고정부는 타협을 제의, 협상장에 나온 정부측 대표의 오만한 자세에 격분한 용병들은 조건을 올렸다. 여기에 용병출신국 리비아가 가세하고 처음 2만이던 세력이 5만으로 불어났다.
BC.240년 카르타고정부는 이들을 반란군으로 단정하고 무력진압에 나선다.
시칠리아 철수 패장 하밀카르가 진압군 1만 2천을 지휘, 당장 용병 6천명을 죽이고 2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는 도주했으므로 용병반란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BC.239년 용병과의 재협상에 나선 카르타고정부 대표가 용병들에 붇들려 손발이 잘리고 코와 귀가 떠러져나간채 생매장되는 만행이 발생했다.
수적으로는 많으나 지휘관 없는 용병대는 하밀카르 전술에 상대과 아니었다.
반란군 용병들을 작은 산으로 몰아넣어 고립시킨 하밀카르는 사방으로부터 코끼리떼를 산정으로 밀어올려 굶어 기진맥진한 용병들을 모조리 밟아 전멸시켰다. 코끼리에 밟혀 죽은 용병의 수가 4만이 넘는다고 한다. BC.238년 여름, 반란 3년 4개월만의 일이다.
이렇게해서 용병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는 여전히 국내파와 국외파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국외진출파의 수령격인 하밀카르는 국내파가 우세한 카르타고를 떠나 스페인에 본거지를 마련한다.
스페인에는 카르타고의 식민지가 카디스를 중심으로하는 남부 스페인의 해안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격적인 식민지로 개발할 작정으로 이제 나이 40대밖에 안되는 하밀카르 자신은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를 데리고 지브랄타르해협을 건너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 이주시 그의 장남 한니발의 나이 아홉살이었다.
한니발은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의 동행을 바란 자신을 바르神殿에 데리고 가서 평생 로마를 敵으로 삼는다는 것을 神께 맹서케 한 후에 스페인 동행을 허락했다>고.....
오늘은 이만......다음부터는 본격 한니발戰爭譚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