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 Digest-28-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西岸에 확보하고 있는 단 두 곳, 마르살라와 트라바니는 30킬로의 거리를 두고 있다. 어느 한곳이 떨어지드라도 카르타고는 전도를 잃는다.
카르타고는 본국에서 10만 용병을 모집하여 마르살라 방위에 1만의 용병과 대함대를 파견한다.
로마군은 요새화한 港口도시 공략전술에 미숙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프리카 본토로부터 바다를 이용한 군량 무기 등 보급에 만전을 기한 마르살라에 대한 공략은 로마해군의 작전 미숙으로 海戰史上 첫 참배로 끝났다.
전쟁 16년째를 맞는 BC.249년 로마도 피로를 숨길 수없었다.
집정관 프루쿨르스가 220척의 함대를 이끌고 트라바니에 대한 해상공격에 나서는 사이 집정관 유니우스 인솔 하의 제2군은 마르살라를 공격하여 決戰을 낸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해 트라바니를 지키던 카르타고군 지휘관은 220 척의 5단층 군선의 공격을 받고도 끄떡안했다. 그는 로마해군이 사람 상대의 해전에는 강하드라도 操船術에는 약한 점을 이용한 對로마군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정석대로라면 트라바니港을 등지고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상투전법이지만 그는 정반대 작전을 썼다. 로마함대가 접근하자 트라바니 항내의 카르타고軍船을 모두 출항시켜 조금 북상한 해역에서 남쪽으로부터 오는 로마함대를 기다렸다.
트라바니를 향항 로마함대가 항구 가까운 해안에 이르자 수평선상에 모습을 들어내 트라바니로 접근, 해안선에 접근해 있는 로마군선을 외항으로부터 포위하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로마해군으로서는 항내 정박 중인 카르타고선단을 포위 섬멸하려던 작전이었으나 역으로 카르타고군에 의해 작전이 뒤바뀌어 역전패하는 트라바니해전이 되고만 것이다.
육박전을 허용 않을만큼의 거리를 두고 바깥 바다쪽에서 밀어붙이는 카르타고 군선에 의해 노를 저을 수조차 없는 얕은 해안가로 밀린 로마군은 완전 작전실패로 끝났다.
220척 중 93 척이 노획되고 30척이 침몰했으며 서툰 헤염으로 뭍에 올라 마르살라 공격 중인 로마군 진영으로 패주한 소수를 제외하고 2만의 목숨이 파도 속에 잠겨 살아졌다.
카르타고와의 해전사상 처음 맛보는 쓰라린 참패였다.
敗將 프루쿨르스는 수도 로마로 소환되어 1만 2천 데나리우스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결코 전통에 없는 패전책임을 물어서가 아니다.
프루쿨르스는 기질이 강한 무골형의 가문 출신으로 膠着狀態의 전황을 타개하라는 취지에서 집정관이 되어 전선사령관에 임명된 인물이다.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出陣에 앞서 戰運의 吉凶을 보기 위해 새점(鳥占)을 친다.
어김 없이 이번 전투에서도 새점을 치는데 이녀석의 닭이 모이는 쫘먹지 않고 빙빙돌아다기만 하는 것을 보다못한 사령관 프루쿨르스가 붇잡아 모이를 먹지않으려면 "물은 먹겠느냐"면서 닭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지켜보던 병사들은 가슴을 졸이고 불길한 예감을 안고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종교를 믿든 안믿든 그것은 애당초 개인의 문제이다.
다만 믿는 자가 많은 공동체를 이끄는 입장의 사람이면 개인의 신조에 충실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트라바니海戰에 패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벌금형까지는 받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종교를 없신여긴 후의 전투는 로마軍의 패배로 끝났던 것이다.
BC.249년은 로마로서는 호된 한해였다.
다음해에도 로마군은 괄목할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시라쿠사의 僭主 히에론이 15년 전 당시의 동맹조약을 무조건 경신해 준것만이 로마로서는 감지덕지였다.
2년 후 BC.247년은 로마에서는 5년마다 실시하는 國勢調査 연도였다.
로마市民權者 17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 인구와 재정상태를 조사했으나 성인 남자 수는 1할 이상 증가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17퍼센트나 감소했다.
전투에서의 손실 이상으로 해난사고에 따른 손실은 인구 수뿐만 아니라 군선이나 수송선 등 전반 전투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이다. 포에니전쟁 18년째를 맞은 로마는 모든 면에서 소모가 불가피했다.
한편 카르타고는 해전에서는 敗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큰 해난사고는 없었다.
싸움터에서 죽은 병사도 자국민이 아니라 외국 傭兵들이었으므로 국민 수가 줄리는 없었다.
카르타고는 BC.247년 그 해, 시칠리아戰線에 戰才가 뛰어난 젊은 무장 하밀카르를 투입한다. 페니키아系의 호전파 하밀카르의 나이 30대였다.
로마로서는 惡夢이 되는 한니발의 부친이기도한 하밀카르가 對로마戰線에 맞선 그해는 한니발이 태어난 운명의 해이기도 했다.
페니키아계인들의 지혜로 농경과 통상정책을 통해 5백년 간 부를 축적하고 지중해 강국이 된 카르타고의 국정은 군내중시파와 국외진출파로 갈려 국론통일이 어려웠다.
경제인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처지에서 영토의 국외신장에 소극적인 카르타고의 정책기조로 인해 하밀카르가 시칠리아전선을 맡았지만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이 신통치 않았다.
로마가 인적 물적 소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BC.247년의 시칠리아전선에 나온 하밀카르는 이와같은 국내사정으로 인해 호기를 활용할만큼의 병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서해안 한켠에 밀려난 카르타고세력을 주언진 2개 군단 정도로 일거에 만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밀카르는 시칠리아전선의 膠着狀態를 계속 이어나감으로써 지금 이상 소모한 로마가 강화를 제의해 오리라는 것을 기대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의 카르타고세력을 전쟁 이전 상황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로마군의 포위를 우려한 하밀카르는 마르살라에도 트라바니에도 본진을 두지 않고 팔레르모 근교에 솟아 있는 몬테 페레글리오山頂에 두기로 했다.
이 산정에 서면 팔레르모市街와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로마로부터 남하하는 함대도 멀리 수평선상에서부터 파악될 뿐만 아니라 산에서 내려 해안을 조금만 서쪽으로가면 카르타고로부터 오는 배가 팔레르모港에 있는 로마海軍에 발각되지 않고 닿을 수있는 천혜의 항만도 있다.
하밀카르는 산 속에만 머루른 것이 아니다.
로마군의 회전에 한번도 응하지 않은 그는 유격전을 전개해 마르살라를 공략 중인 로마군의 배후를 기습, 전렬을 교란하는 등 지구전을 전개했다.
국내중시파와 해외진출파로 갈려 국론이 분렬된 상황에서 국정이 경제인들에 장악된 카르타고의 사정으로는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2개 군담만 가지고 로마군에의 정면대결은 불가능했다.
지구전으로 로마측에 소모를 강요하여 講和使節이 언젠가는 자기 앞에 찾아오리라 기대했으나 역시 예상은 빗나갔다.
그러나 BC.247년에서 243년까지 4년간 포에니전쟁은 하밀카르의 생각대로 전개되었다.
로마군의 몬테 페레글리노산악 공격도 번번히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로마는 계속되는 교착상태에 종지부를 찍을 대책 모색에 분주했다.
다다른 결론은 카르타고로부터 하밀카르에 보내는 보급로의 차단이었다.
카르타고와 시칠리아간 해역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마르살라도 트라바니도 공격할 수없는 로마는 카르타고함대와의 해전에 호소하여 승리하는 것으로 하밀카르를 고립시켜 시칠리아 전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로마는 포에니전쟁 발발이래 네번째 함대의 재편성에 착수한다.
카르타고 상대는 함대 규모가 2백척 이하는 허락되지 않았다.
5단층 군선 2백척을 신조해야하나 BC.242년 당시 로마의 국고는 바닥이 나있었다.
원로원은 동맹국 부담이나 증세나를 고려치않고 전쟁 후 상환 조건으로 유산층 상대로 하는 戰時國債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부유층과 원로원 의원 그리고 정부 요직의 사람들에게서 마련된 재원으로 2백척의 5단층 군선을 신조해서 집정관 카토울스 지휘 하에 바다에 띄워보냈다.
이로써 BC.241년에 장기 교착상태의 포에니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