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Digest-44-
*시라쿠사攻城戰서 아르키메데스 한명에 2만 병력이 고전
반도 최남단 그리스인의 해양 동맹도시 타란토(Taranto)를 주민 내통자들의 이반으로 일야에 수중에 넣은 한니발은 반도 중부의 카푸아를 오르내리며 회전을 유도했으나 지구전으로 맞선 로마군은 결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유격전법으로 한니발의 고사를 압박해온 로마군은 BC.214년 마침내 카푸아를 탈환했고 이어서 타란토 수복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반도 중남부를 석권했던 한니발의 여세는 여전했다.
이탈리아 본토의 전황이 소강기를 거치면서 시칠리아島에 捲土重來를 노리는 카르타고 본국세력의 재침 의도를 꺾기 위해서 제2전선으로서의 시칠리아의 완벽 방위는 필수 전략이었다.
칸네 이후 한니발의 뒤를 쫓아 궁둥이를 물어뜯어온 '로마의 劍' 별명의 마르케르스가
4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전선을 펴고 로마를 배반한 시라쿠사공략에 나서게된다.
BC.213년 봄 항복 권고를 거부한 시라쿠사의 攻城戰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천연의 要塞에 全都市가 필사의 저항으로 난고불락이었다.
총사령관 마르케르스의 육 해 양방의 본격적인 공성전은 2만의 병력으로 육지쪽을 완전 포위하고 바다쪽도 백척의 5단층 함선으로 해상봉쇄가 완성된었다.
카르타고로부터의 지원선단은 근접조차 못하고 후퇴했다.
포위도 완벽했고 해륙 양방향으로부터 총공격이 개시되었으나 상대는 병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각기 용도를 달리한 낯선 機器를 번갈아 내밀며 방위하는 것이었다.
육상 공격부대는 성벽 위에 머리만 내밀고는 돌탄환을 쏘아대는 신병기에 애를 먹었다.
이 투석병기는 사정거리를 자유자재로, 이동도 자재로 로마병을 쫓아 정확히 표적을 겨누었다.
성벽 위에는 눈만 내밀고 로마군의 동향을 살펴 제편에 알려주는 사람은 있을터이지만 사람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로마군은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기는 고사하고 성벽 근처에 접근조차 할 수없었다.
바다쪽에서도 전황은 다르지 않았다.
얼굴 없는 적과의 공방전이 주야 계속되었으나 로마군은 희생만 늘어갔다.
로마군은 육지쪽보다 다소 허술한 해안 성벽으로 공격목표를 바꾸어 병력을 만재한 배 두척씩 그룹을 짜서 뱃전을 맞대어 로프로 연결한다.
하나는 왼쪽, 다른 하나는 오른쪽 노만을 저어 해안벽에 붙이고 선미에서 돛대 위를 통해 선수까지 닿는 로프 끝에 결착한 공성용 사다리를 안벽에 붙이면서 활차를 사용해 내리고 그것을 의지해서 안벽 위에 병사가 내린 후 그 사다리를 성벽에 붙여세워 거기를 타고 성벽에 돌입하는 방식의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해안쪽에서도 사정거리 조정이나 이동이 자재로운 석탄포가 맹위를 떨쳤다.
石彈 세례를 받아 균형을 잃고 임벽에 부딛쳐 파손되는 배가 적지않았다.
아르키메데스 고안의 신병기 공세를 무릎쓰고 성벽에 다가선 병사도 있었으나 그들도 어디서 비춰오는지 모를 거울 反射光에 눈이 부셔 앞을 못본채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얼굴 없는 적의 활약에 로마병들은 의기소침했다.
선상서 전투지휘를 하던 사령관 쾌남 마르케르스는 주위 장병들을 향해 "아르키메테스는 마치 물컵을 던지듯이 바다에서 배를 들어올려 던져버리고 있구만..."하고 농담을 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은 이미 로마군 내에서도 유명해져 있었다.
마르케르스는 "늙은이 하나에게 휘둘리고 있는 꼴, 이게 뭐람"하고 개탄했다.
수학이라는 것, 로마군과는 관계없는 것이면서도 2천 2백 후의 고등학생들까지 괴롭히게되는 아르키메데스는 그때 75세의 고령이었다.
노과학자 한 사람에게 2만 군사가 농락 당한 시라쿠사공성전은 일단 유보하고 마르케르스는 포위작전을 부관에게 맡기고 병력 반을 이끌고 시칠리아남해안의 아그리젵로 달려갔다.
카르타고로부터 2만 5천의 보병과 12 마리의 코끼리가 상육한 것이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적 지원군을 간단히 소탕하고 이제 해도 저물었다.
BC.213년의 시라쿠사공략은 한 사람의 老科學者 아르키메데스를 이기지못해 성과 없이 끝났다.
다음 해 BC.212년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로마 근접 캄파냐지방의 카푸아 탈환전이 시작되는 해였다.
마르케르스도 서둘러 시라쿠사공성전을 끝장내고 싶었다.
묘수 생각끝에 시라쿠사인 포로를 불러내서 심문 중에 며칠 후 알테미스女神의 祭典日
이라는 포로의 말에 귀가 번쩍했다.
그날은 습성으로 미루어 그리스人들이 취하지않고는 못배길 것이라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포도주는 로마人들도 좋아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취할때까지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낮 동안은 아르키메데스의 얼굴없는 병기가 방위의 주인공이지만 밤은 시라쿠사 주민들이 성벽을 지켰다. 그들이라고 女神의 祭典日 밤에 포도주의 유혹에 끌리지 않을 수없을 것이라는데 착안한 마르케르스는 1천명의 정예를 선발했다.
육지로부터의 공격 채비로 다수의 공성용 사다리를 주위 숲속에 숨겨놓았다가 야반 자정이 넘어 일제히 소리없이 1천의 병사가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에 올랐다.
술 취한 수비병을 간단히 처리하고 안으로부터 성문을 열었다.
대기중이던 1만의 로마병들이 시라쿠사시내로 물밀듯 밀어닥쳤다.
싸울 것도 없이 암흑 속에 시라쿠사는 로마군에 함락되고말았다.
해가 바뀌어 BC.211년 봄과 함께 로마에 찾아온 소식은 시라쿠사함락의 랑보였다,
정부도 없어졌고 종전협상에 나설 자 아무도 없는 시라쿠사는 항복권고를 거부한 패자의 일체 모든 것이 승자의 소유가 되는 고대전쟁의 종결방식에 따라 국가 국민은 로마의 것이 되었다.
그리스문화에 교양 있는 마르케르스는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으나 미술품 공예품 등 일체 문화재는 로마국유물로 선포 개인소유를 엄금했다.
마르쿠스크 라디우스 마르케르스는 수도 로마에서 거행된 무장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에 수 많은 미술품으로 장식된 최초의 로마장군이 되었다.
한편 로마인들은 마르케르스의 戰功으로 본격 그리스 조형문화를 직접 눈으로 학인했다.
시라쿠사로부터 온 이들 전리품은 이제까지 보아온 남이탈리아 그리스인들의 미술품과는 비할대 없이 값진 것들이었다.
시라쿠사가 가지고 있던 5백년의 역사는 다른 도시국가의 5백년이 아니었다.
시칠리아의 동반부와 남이탈리아 일대는 <마그나 그리스> 大그리스라 불리었다.
그 <마그나 그리스>의 중심이 시라쿠사였다.
그리스 哲人 프라톤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재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를 낳은 땅이기도하다.
그 시라쿠사가 BC.211년 독립을 잃고 로마의 屬州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