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Digest-54-
한니발(Hannibal,BC.247-183)은 BC.21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16년간 로마 정북을 위한 제2차포에니전쟁을 도발했으나 끝내 실패, 카르타고에 귀환하여 大스키피오와의 자마會戰서 완패(여기까지는 그간의 연재에서 기 언급한 바다)한 후 로마와 강화를 체결하고 카르타고 행정장관을 지냈다
카르타고(Carthago)는 약 7백년의 역사를 가진 古代국가로 지리적으로는 지금의 북아프리카의 튀니지地方에 해당한다.
페니키아人들이 세운 農耕國으로 商材와 海洋術에도 뛰어나 당시 西지중해를 제패하였고 제3차포에니전쟁까지 이르켜 마침내는 로마의 小스키피오軍에 패배하고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한니발 역시 페니키아계 후예로 그 아버지 하밀카르장군도 제1차포에니전쟁서 로마와 싸와 패한 후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지중해 연안에 新카르타고를 뜻하는 植民都市 카르타헤나(Carthagena)를 건설했다.
武人 아버지를 둔 한니발은 두 동생 하슈도울바르와 마고네의 3형제 중 맏이로 아홉살 때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으로 갔고 어려서부터 병영생활에 익숙했다.
한니발은 스페인에 갈 때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신 앞에 <로마를 필생의 적으로 삼고 아버지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선서를 하고 따라갔다고 전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의 건강을 지닌 과묵한 한니발은 그 집념으로 일생을 전장에서 살다 결국은 조국 카르타고로부터도, 원수의 땅 로마로부터도 머나먼 黑海연안의 비티니아라는 작은 왕국 어디서 한 로마군부대장의 신병 위협을 받아 지니고 있던 극약 음독자살로 파란만장의 생애를 마감했다.
자신의 신변에 관해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한니발의 로마침공시절의 이야기 한토막이 그의 從軍記錄官 시레누스가 흘리고간 기록 한귀절이 로마인 史家 리비우스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저작 속에전해지고 있다.
직역하면 이렇다.
---추위도 더위도 그는 말 없이 참았다.
병사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식사도 시간이 되어서가 아니라 공복을 느껴야 들었다.
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혼자 처리해야할 문제는 끄니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잠도 휴식도 부드러운 침상과 고요함을 의미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있어 나무그늘이 진 땅바다에 그대로 병사의 망토로 몸을 감싼채 자는 한니발의 모습은 눈익은 광경이었다.
병사들은 그런 한니발의 곁을 지날 때는 무기의 소리만은 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스페인에 있을 때에 원주민 부족장의 딸과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 한니발이지만 이탈리아에 진공해 온 이래 그에게서 여자에 관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승자였던 그가 말이다.
바라건 바라지 않건 여자에 목말라할 그런 입장이 아니었는데도.....
그리고 또한가지 이탈리아 땅에 들어와 16년 동안 3만에 달하는 식솔을 어떻게 먹이고 입히고 했느냐가 수수께끼이다.
거느린 병사 대부분이 돈주고 산 용병들이었는데 과연 제때 월급이나 주었겠느냐이다.
로마가 확인한 기록에 의하면 한니발이 16년간 본국 카르타고로부터 받은 지원은 단 두 차례뿐인 것으로 되어있다.
敵地에서 보급의 현지조달이 약탈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볼 때 그것도 16년간 3만의 식구라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단 한번 한꺼번에 4천명의 병사가 로마군의 공격을 받고 투항한 것 이외 거의 문자 그대로 한니발을 離反한 병사는 없었다. 그것도 출신지가 아프리카 스페인 이탈리아 등 언어도 성격도 다른 混成軍이 한니발이 인솔한 군이었음랴.
사람 잘 따르는 개방적 성격도 아니어서 병사들과 어울려 지낼 줄을 모르는 孤高한 품성의 무장으로서의 한니발을 병사들은 무엇을 보고 따랐을까?
그 한니발에 대해 후세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마카아벨리는 평한다.
그의 준엄한 태도에 대한 畏怖(외포)의 念때문이었을 것이고 동시에 천재적 재능을 지니면서 난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사나이에 대한 憐憫의 정에 기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에게 허용된 잠시간의 휴식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조심하는 아름다운 생각에 무기의 소리만이라도 내지말자는 사령광에 대한 부하들의 애틋한 존경심에서였을 것이다.
여기에 한마디를 곁들인다면,
탁월한 지도자라는 것은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고갈뿐인 인간은 아니다.
끌려가는 사람들에 자기들이 없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지도자이다.
지속하는 인간관계는 반드시 상호관계에 있다. 일방적 관계로는 지속은 無望하다고 본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좁으나마 내 체험의 역사를 통해 국가의 지도자를 보았다면 朴正熙 대통령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겠나 생각한다.
그 한니발이 자마회전에 패한 후 스키피오와의 강화협상에서 합의한 10개항의 강화조건을 카르타고 정부의 비준을 구하는 자리에서 스키피오에게 萬年敗將이 된 지스코네가 조건승인 반대연설을
하자 참다못한 한니발이 단상에 뛰어올라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리는 소동이 벌어젔었다.
그 자리에서 그가 귀하게 남긴 발언이다.
<나는 아홉살 되던 해에 모국을 떠나 오늘까지 36년간을 兵營과 戰場에서 지내는 인생을 살아왔다. 전장에서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생활은 모르고 살아왔다.> 그가 벌인 소동에 대한 사과의 말이다.
그는 타고난 무인기질로 마케도니아王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본받아 소수로 다수의 적을 포위 격파하는 전술을 개발해 실전에 응용해 왔다. 그 전술을 스키피오가 다시 본받아 개량해 한니발에 적용해서 이긴 전쟁이 곧 자마회전이었다. 靑出於藍(청출어람), 스승보다 제자가 낫다는 고사성어가 생가나는 대목이다.
시리아에 망명한 한니발이 東지중해 연안 에페소스에서 천적 스키피오를 9년만에 다시 만나 나눈 대화를 소개하면서 하니발 이야기를 거둘까한다. 로마가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이겨 스키피오가 에페소스에 가서 강화협상을 매듭짓고 서로 초연하게 만나 나눈 대화이다. 이때 한니발 나이 54세, 스키피오는 12년 연하였다.
스키피오가 먼저 정중한 어투로 연장자 한니발에에게 물었다.
--귀하는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武將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하니발은 즉답했다.
--마케도니아王 알렉산드로스.
소규모의 군사력만을 이끈 몸으로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 범위를 훨신
넘는 지방까지 원정한 업적은 위대하다는 평가 말고 달리 할 말이 없다.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두번째 우수한 무장은 누구입니까?
한니발은 여기에도 주저없이 답했다.
--에피로스王 퓨로스다. 첫째 전술가로서 1급이다.(한때 로마를 침공했었다)
스키피오의 세번째 질문
--그러면 세번째 뛰어난 무장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노령의 카르타고 명장은 역시 서슴없이 답했다.
--문제 없이 여기 나 자신이다.
스키피오는 여기에는 무심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만약 귀하가 자마會戰에서 나를 이겼다고 한다면?
한니발은 너무 당연하다는 감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나의 순위는 퓨로스를 제치고 알렉산드로스까지 넘어서 내가 첫째가 된다.
한니발의 자기 평가는 알렉산더大王까지 넘는지는 차치하고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고대로마에서도 풍자작가 루키아노스 단 한명을 제외하고 로마인 모두가 무장으로서는 적장 한니발을 救國의 영웅인 스키피오보다 상위에 두는데는 일치하고 있다.
한니발의 불행은 뛰어난 제자가 적측에서 나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戰略家로서라면 한니발은 커다란 잘못을 범했다.
그 탄탄한 <로마聯合>의 해체가 용이하다고 잘못 본 전략적 오판이다.
사회계급이 고정되어 있는 카르타고의 인간, 한니발로서는 勝利가 寬容을 가져오고 敗者마저 협력자로 만들어버리는 로마人의 사고방식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한니발은 위에서 미리 말했듯이 자마 패전 후 한때 정치에 관여했으나 로마 타도의 집념을 불태우며 끝내는 이국을 떠돌다 무참한 죽음으로 파란만장의 생을 마쳤다. 공교롭게 천적 스키피오가 죽은 BC.183년 같은 해 두 거목은 쓰러졌다.
다음은 자마의 승장 스키피오의 후사에 관한 이야기 한번 더 엮을까합니다.
왜냐면 화려했던 시절 그 뒤안길은 어떠했는지 그게 모씨 궁금해서입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