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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敎訓 로마史Digest-49-
역사에는 가끔 우연에 의해 상황이 일변하는 경우가 있다.
BC.207년의 이탈리아전선에서 일어난 우연사 중 가장 중대한 일은 하슈도울바르의 갈리아 횡단과 알프스 월경이 예상 외로 순조롭게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우선 정예만을 모아 3만의 군졸을 이끌고 하슈도울바르가 이탈리아로 향했다.
마고네와 지스코네는 스페인에 남은 자군을 통합해서 이제부터는 공동전선을 펴서 스키피오를 공격하기로 한다.
즉각 코끼리까지 가세한 3만의 하슈도울바르군은 예상되는 타라고나의 스키피오 로마군을 피해 내륙부 깊숙히 우회하여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그로부터는 갈리아, 지금의 프랑스를 횡단해 한니발이 밟은 길을 따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드러갈 작정이었다. 이 작전이 일찌기 한나발에 전달된 것은 물론이다.
하슈도울바르에 피레네산맥 월경을 허용한 책임은 스키피오에게 있다는 것이 후대 많은사가들의 스키피오 비난 이유가 된다.
한편 스키피오가 하슈도울바르의 피레네산맥 월경 저지를 위해 추격했었다면 마고네와 지스코네의 협공을 받았을 것이므로 그 시점에서 불가피하게 추격을 단념한 것이라는 스키피오 옹호론도 나온다.
어떻든 한니발의 동생 하슈도울바르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을 안 스키피오로부터 긴급 전달을 받은 로마 원로원은 이탈리아에 진입하는 하슈도울바르를 요격하기 위해, 한니발을 몰아붙이며 감축 추세에 있던 전력을 23개 군단으로 증강시킨다.
BC.207년 봄, 종래 두 사람 모두 對한니발戰線에 보내던 집정관들이었으나 그 해에는 집정관 네로는 법무관 풀비우스 軍과 합류하여 한니발전선을 담당하고 집정관 리비우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하슈도울바르의 남하 저지를 위해 리미니로 파견된다.
원로원은 또 다른 남하로선인 토스카나지방에도 2개 군단을 대기시킨다.
*여섯번째 會戰, 메타우로江의 戰鬪
하슈도울바르는 11년 전 형 한니발이 겪어야했던 현지인들의 저항이나 방해 없이 무사히 갈리아를 횡단하고 다만 코끼리 떼와 3만 병력이 알프스령을 넘는 난사도 무시히 마치고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예상 외로 빠른 기간에 반도 북단에 도착한 하슈도울바르였으나 한니발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도착시기를 늦춰 잡음으로써 동생과의 합류시기를 맞추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니발이 준동하는 반도 남부에는 로마군 6개군단이 포진한 상태여서 적진 돌파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포위군 가운데는 네로의 2개 군단도 있었다.
어떻든 한니발의 계산대로 최대 안전을 유지하며 카라부리아지방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동생 하슈도울바르와 합류하기 위헤 북상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 뒤를 집정관 네로가 인솔하는 로마군단이 달아붙었다.
형제라 하지만 재능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는 노릇.
이탈리아에 진입한 하슈도울바르는 행군 도중 가세한 갈리아병까지 합쳐 5만의 군세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으나 행군이 용이한 평원 도로를 택했다. 적의 뒷마당으로 숨어들지 않고 앞마당으로 버젓이 들어선 것이다.
포강 주변의 평야를 따라 리미니로 향하는 도중에 하슈도울바르는 비로서 형 한니발에 편지를 보냈다. 6명의 騎士團 편에 보내는 편지에는 그의 행군로와 합류 예정지가 적혀있었다.
그 기마전령대가 한니발 있는 곳을 찾는 도중 로마군 소부대와 마주쳤다.
기마전령들은 영락없는 포로가 되고 가지고 가던 편지는 몰수되었다.
로마군 百人隊長은 페니키아語로 쓰인 편지를 집정관 네로에게 보였다.
네로는 당시 아드리아해 연안 근처 풀리아지방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대기 중인 한니발의 바로 가까이에 그 역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편지를 급히 번역해서 읽은 네로는 공화정 로마군 사령관으로서는 용납되지 않을 일을 결심한다.
즉시 6천명의 보병과 1천기의 기병대가 선발되었다.
연령이나 체격이 건장한 병사들로 구성된 정예군이다.
가능한 한 장비를 가볍게 차리고 식량 휴대도 금했다.
식사는 행군 도중 가도변의 동맹도시들에 길가에 미리 준비 놓도록 지령이 내려젔다.
잔류군은 법무관 풀비우스에 맡기고 한니발에 자신의 不在를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소규모 전투를 유도하라고 명령했다.
네로는 잔류군에게조차 몰래 7천 병력을 데리고 야반에 진지를 떠났다.
잠 잘시간도 없는 급행군이었다. 8백킬로의 거리를 답파해야했다.
주야 하루의 행군 거리가 백킬로에 달했다.
이 행군속도는 백 5십년 뒤 카에사르에 의해 그 기록이 경신된다.
이탈리아반도의 등뼈 아페닌山脈을 넘고 프라미니아街道를 달려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 가도 종착지 리미니(Rimini)에 닿는다.
리미니에는 집정관 리비우스군단이 메타우로강 남안 가까이에 포진하고 있었다..
하슈도울바르가 아드리아海 연안을 따라 남하 하더라도 저지할 수있으며 만약 프라미니아가도를 탄다고 해도 시계에 들어오기때문이다.
집정관 네로의 7천 병력이 여기 로마진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탈리아 진입을 한
하슈도울바르는 벌써 메타우로강 북안에 宿營地를 구축한 상태였다.
하슈도울바르는 프라미니아가도가 이곳 같으면 평탄하지만 산악지에 가서 코끼리가 딸린 대군으로는 전투라도 벌어지면 불리해진다는 것을 모른것 같았다. 형 한니발과 달리 정보에 둔감한듯 했다.
5만의 전군이 프라미니아가도를 향하는 적을 보고 로마군은 즉각 뒤를 쫓았다.메타우로河口에 펼쳐진 평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적군을 뒤쫓았다.
하슈도울바르도 별 수없이 右로 돌아 會戰에 응했다.
하룻밤새 증강되었다고는 하지만 5만을 헤아리는 저쪽이 젼력상으로는 단연 우세했다.
회전은 메타우로강을 남쪽에서 나란히 가는 프라미니아가도를 가운데에 두고 가도 바로 가까이 벼랑에 갇힌 지대에서 벌어졌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양군 모두 그런대로 회전 陣形을 짰다. 강 상류를 향해 포지한 로마군의 우익은 급행군을 감행한 집정관 네로가 지휘하고, 중앙은 리미니 주둔군 폴티우스가, 좌익은 집정관 리비우스가 맡았다.
병력이 총 4만이었다.
한편 카르타고군은 象隊를 전면에 세운 진형이었다.
군세가 총 5만 5천이었다.
戰端은 로마병이 지르는 함성과 함께 내려젔다.
그런데 벼랑에 부딛쳐 메아리지는 로마軍의 함성에 놀란 코끼리 떼가 敵陣 돌격 대신 제편을 향해 난립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하슈도울바르는 코끼리 떼의 전선 이탈을 명령했다.
조련병들은 코끼리의 귀 뒤를 바늘로 찔러 죽였다.
코끼리를 사용할 수없이된 카르타고군은 총공격으로 나왔다.
이를 맞아 치는 로마군은 우익이 중간에 낀 언덕이 장애가 되어 적의 좌익을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전투는 로마군 중앙 좌익과 적의 전군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래서는 수적으로 열세의 로마군으로서는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상황 타개가 급하다고 본 네로는 지휘하던 우익 전원을 전선 이탈시켜 우군의 뒤를 돌아 적 우익의 측면을 첬다.
이것이 회전의 결정타가 된다.
좌측은 언덕 때문에 장애가 되고 정면과 측면 공격을 받은 카르타고군은 배후에 언덕길로 된 프라미니아가도 밖에 없는 지역에서 포위되어 먼저 행군 중 주서모은 갈리아兵들부터 총붕괴를 불렀다.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카르타고軍은 아비규한 속에 3만 스페인 出兵者들이 전멸했다.
하슈도울바르 자신은 카르타고군 총사령관의 정장으로 가라입고 적군 속에 말을 달려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나발의 나이 40세였으므로 동생 하슈도울바르는 30대였을 것이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렇게 썼다.
<하슈도울바르는 하밀카르의 둘째 아들이며 한니발의 동생의 몸으로 부끄럼 없는 죽음을 택했다.>
회전 뒷수습을 동료에 맡긴 네로는 7천 병사와 함께 주야 불문 급행군으로 남부의 원 주둔지로 귀환했다.
14일간의 出征이었다.
한니발은 메타우로江가에 벌어진 이 상황에 감감했고 동생으로부터의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제 알프스를 넘고 있으려니 걱정도 안했다.
그 한니발이 모든 것을 안 것은 진지를 둘러 친 울타리 넘어로 던져진 꾸러미 하나를 풀어본 뒤였다.
하슈도울바르의 잘린 목이었다. 11년만의 동생과의 재회였던 것이다.
한니발은 그날 밤으로 진영을 거두어 남부의 카라불리아地方으로 되돌아갔다.
메타우로江會戰의 승리로 환희에 들뜬 로마에서는 개선식이 열렸으나 4두의 백마전차를 달린 것은 담당지역 사령관
리비우스였다. 원로원의 승락 없이 관할지구를 이탈한 네로는 4두마차 뒤를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관할지 이탈죄는 면책된 셈이다.
그보다 가이우스 크라우디우스 네로가 일생에 거둔 메타우로회전의 성과라면 2년 전 스페인전선서 하슈도울바르의 講和協商 제의를 받고 거기에 응해 약속장소에서 기다렸으나 날이 발고 난 뒤 상대가 종적을 감춰버림으로써 적장에 속은 武將으로서의 悔恨을 이제 말끔히 털어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로마史에 一劃을 긋는 중대 고비였므로 생략하기 힘든 대목이 많아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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