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항쟁사』를 읽다가 각주에서 전춘심(전옥주)의 증언이라는 것을 읽었는데, 아무래도 뻥같다는 생각이 들어 해당 증언 전문과 그외에도 언론매체에 보도된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확인해보았다. 먼저 ②번이 가장 눈에 거슬렸다.「20일 오전에 광주일고 앞에서 가슴이 드러난 채 대검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의 시체」가 과연 존재했을까?
자신의 말로는 보았다고는 하는데 공식자료상으로는 20일 오전까지 김안부씨와 김경철씨 두 사람이 사망자의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 아줌마가 본 여고생의 시체는 과연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여고생
라반디인가? 미스테리한 일이다. 이 아줌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착각을 했거나, 아니면 아직까지 그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거나일 것이다.
③번도 이상하다. 검시조서에 따르면 대검에 찔려 눈알이 파헤쳐진 시체는 없다. 리어카에 자신이 직접 싣고 도청으로 갔다는 부분도 다른 자료에 의하면 신빙성이 의심된다. 그 리어카의 모습은 대강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한번쯤 보셨으리라 생각된다.
과거사위 조사결과나 당시 목격자 구양술의 진술에 따르면, 당일 문제의 시신 2구는 전옥주 아줌마가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2.5톤 트럭으로 실려갔다고 되어 있다. 그러다가 동이 틀 무렵 사물이 밝아지자 선전선동을 위해 중간에 리어카에 옮겨싣고 다닌 것이다. 이 부분은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자기가 했다고 증언한 것 같다. 따라서 당시 목격 사실이 진실에 부합한지 총체적으로 의심스럽다.
①번 항목을 보면 앞부분이 짤려 있어서 전반의 내용이 파악이 안되므로,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은 마이크를 준비하기 위하여 금남로에서 모금운동을 했다. 학생들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시민들은 그러한 상황을 모르고 있으므로 앰프 를 구하여 알리자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모아진 돈이 45만 원이나 됐다. 모금한 돈으로 학생들이 앰프를 구해 왔으나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최루탄에 맞아 금방 절단나고 말았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또다시 앰프를 구하기 위해 금남로에서 학운동사무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앰프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까 앰프를 떼내라." 학생들이 달려들어 앰프를 떼내는 동안 호주머니를 터니까 7만원 정도 되었다 . 나는 그 돈을 동사무소에 주었다."
이 부분이 사실인가? 이 아줌마의 공소장에 나타난 자술 내용이나, 군경의 자료에 의하면, 전옥주와 차명숙은 5월 20일 오후 금남로 등을 배회하다 소요에 가담해 활동하던 중 소요군중이 점차 증가하자 학운동 동사무소의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보고 차명숙이 "저 스피커를 빼앗아 가두방송을 하자"면서 동사무소에 들어가 직원에게 방송자재를 빌려달라고 하였으나 완강히 거절당하자, 밖으로 나가서 신원불상의 남자 3명을 데리고 와서 "방송기재를 내놓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위협하여 이를 탈취하였다.
또한 이들은 탈취한 방송기재를 차량에 탑재하여 설치하고 선동방송을 하려고 하였으나 고장이 나 방송이 불가하게 되자, 한백경이 경영하는 동명동 소재 "계림전파사"에 가 직원 한길섭에게 수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수리가 어렵다고 거절당하자, 이에 같이 갔던 상기 동행 청년 3명이 "당장 고쳐주지 않으면 여기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하여 앰프 등 방송기재 싯가 8만원 어치를 갈취하였다고 되어 있다.
전옥주의 증언에는 이외에도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 산견(散見)된다.
"충장로 지하상가 앞에 이르렀을 때 깜짝 놀랐다. 도망치다 벗겨진 신발들이 무수 이 널려져 있었고 공수들은 붙잡은 학생과 시민들을 개처럼 두들겨패고 있었다. 또한 공수대에 잡힌 학생들은 공수가 지시하는 손가락 방향에 따라 엎드리고 일 어서는 기합을 받았다. 원래 성격이 활달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나는 곧 바로 시위에 참여했다."
이것은 5월 20일자 밤 11시 이후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으로 당시 도청 앞에는 이날 투입된 3공수 여단이 시위진압을 하다, 군중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시위대를 두들겨 팰 수 있었던 상황은 5월 18일에 불과하였고 19일 오후부터는 급증한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일 20일 이후에는 3공수 여단이 축차 투입되었으나 오히려 포위되어 3공수 16대대 소속 정관철 하사가 압사사고를 당하는 등 불리한 여건에 놓여있었다.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들과 대치해 있는 시위대에게 도청 뒤에 있는 집에서 물 을 떠다 날라주었다. 그때 차명숙을 만났다. 물을 떠다 나르는데 상냥한 아가씨가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전남대 영문과 2학년에 재학중으로 나주 천주교에 숨어 있다가 화장을 하고 광주로 들어왔다고 했다. 뒤에 알고 보니 국민학교 2학년 중퇴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 의심이라곤 전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각종 중요 데모사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부마사건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명숙은 전남대 영문과 2학년이 아니라 은천국교 5학년 중퇴이며, 주거가 부정(不定)한 자로서 가정부로 전전하던 여자라고 조서에 나와있다. 그러고보니, 전옥주가 밝힌 자신의 약력에도 의문이 간다. 증언 자료「혜성처럼 나타난 여자선동가/전춘심」에서 자신이 직접 구술한 내용을 들어보면, 자신은 원광대 체육학과(무용전공) 4년 중퇴의 학력이라 소개하고 있으나, 공소장에는 예당고 1년 중퇴로 나와 있다.
또 이 분이 대학입학 무렵에는 원광대 체육학과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여서 무용전공이 없었고, 무용학과가 정식 신설된 것은 1979년이다. 지엽적일지는 모르나 전옥주는 자신이 4학년때 학내소요로 제적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1971~1974년까지 원광대에는 학내소요로 제적징계를 당한 학생이 없다. (시국사건으로 제적당한 학생은 있다)
전옥주 아줌마는 광주 5.18 기간 동안 뛰어난 가두방송으로 선무활동을 벌인 광주의 잔다르크로 추앙받고 계시다. 공소장에 나타난 주옥같은 그 분의 선무방송 내용을 삼가 새겨 들으면서 이만 마칠까 한다.
"계엄군이 전남여고 앞에서 여학생 옷을 벗기고 칼로 찔러 죽였다."
"나의 후배 2명과 친구 한명이 죽었는데 나의 친구는 일고 정문 앞에서 계엄군이 젖가슴을 찔러 죽였다."
"양동시장에서는 7살난 어린애를 계엄군이 칼로 찔러 죽여서 하천에 버렸다."
"서울에서 고대생 3,000여명이 광주로 내려오다가 담양에서 제재를 받고 있으니 구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