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휴전 후 국부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의 초청으로 국빈방문을 한다. 미국 의회 상하양원 합동연설도 계획 되어 있었고, 뉴욕 맨해튼의 카퍼레이드도 예정 되어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 카퍼레이드는 처칠 정도 밖에 없는 최고의 국빈 예우였다.
곧 워싱턴 공항에 내릴 이승만을 초청한 아이젠하워는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젠하워의 머리속은 복잡 했다. 1954년 7월 26일 닉슨 부통령의 영접(迎接)을 받으며 워싱턴 공항을 나서는 이승만을 TV로 지켜보며 그와의 질긴 인연을 생각하며 기억의 파편을 주어 모았고 그 파편 넘어 부서졌던 시간을 모았다.
2차 대전 전쟁영웅으로 패권국의 대통령이 된 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공약은 6.25 사변 종전과 미군철수 였다. 이미 공산세력은 휴전선 너머로 쫓아냈고 휴전협상 또한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전쟁 피아(彼我) 당사국 모두는 지쳐 있었다. 전쟁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어 정치적 쇼만 그럴듯하면 6.25 사변 종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손쉬운 제물로 보였다.
이승만은 80세를 바라보는 노쇠한 후진국 지도자였고 더구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인생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았던 친미 지도자로서 그는 백악관 입성 길의 훌륭한 정치적 제물(祭物)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의 그 생각은 심각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승만이라는 복병을 만난 아이젠하워는 정치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고 이승만을 제물로 삼으려는 교만은 어느덧 증오와 경외감이 교차하는 애증(愛憎)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항에서 내리는 이승만을 지켜보며 저 늙은 여우가 또 무슨 일을 벌릴까 전전긍긍 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대통령 당선 후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한반도로 날라갔다. 전선을 시찰하고 평화 메세지를 던지고 여론의 데스크를 채울 쇼를 해야 하는 아이젠하워는 전략적으로 이승만과의 접촉을 피했다. 예측할 수 없는 고집불통, 미군장성을 모아 놓고 미국 역사를 가르치고 그 기라성 같은 장성을 기어이 자신의 수하로 만들어 버리는 이승만의 집요함과 서릿발 같은 지성, 뱀의 혀를 가진 이승만에게 농락 당하지 않을 것이라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이든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이승만에게 주는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방한길 국가 지도자로서 만나는 것은 귀국길 잠시 청와대에 들러 이승만과 사진 한장만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철저하게 이승만을 무시하기로 했다. 아이젠하워의 방한 시간과 일정은 극비에 부쳐졌고 미군부대 마련 된 숙소까지 비밀이었다. 여론을 방한뉴스로 채우며 들러리로 세울 방법도 단단히 구상해 놓았다.
“나는 한국전쟁을 직접 살펴보고, 전선을 보고, 군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겠다.”
하지만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마음껏 정치적 쇼를 즐길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약소국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은거한 미군부대까지 찾아 올것이라 상상도 못했다. 안심하고 미8군에 들어 앉은 아이젠하워를 기습적으로 찾아간 이승만은 태극기를 선물로 주며 엉거주춤 한손으로 태극기를 받아드는 그에게 뼈있는 말을 던졌다.
“태극기를 받을 때는 두손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승만은 엉거주춤 태극기를 받아든 아이젠하워와 악수를 하는 순간 정신 없이 카메라 후레쉬가 터졌고 다음날 아침 미국의 뉴스 매체 온 지면을 덮었다. 강력하게 북진을 주장하는 이승만과 태극기를 들고 이승만과 웃으며 악수하는 아이젠하워의 모습은 6.25 사변 종전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후 2번이나 더 정상회담에 응해야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반대를 무릅쓰고 뚝심으로 밀어부친 5성장군 아이젠하워였다. 당대의 명장 몽고메리의 의견을 묵살하고 독일 진공을 위해 국경에 펼쳐진 전선을 일거에 공략한 뚝심의 아이젠하워였다. 그러나 맥아더와 오랜 친구였던 이승만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해군 기지를 개구리 뜀뛰듯 농락한 맥아더의 전략으로 아이젠하워의 뚝심을 무력화 시켰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다닐 때부터 협성회보 주필로 활약했고 직접 신문사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도미 한 후에도 잡지와 신문 발행, 기사 작성 등을 멈춘 적이 없을 정도로 언론과 캠페인에는 이골이 난 당대의 언론인이기도 했다. 평생 신문 스크랩 한 것이 수만 페이지에 이르고 있다. 태극기를 한손에 들고 한손은 이승만과 악수하는 사진은 휴전협정이 아니라 강력한 전의를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1차 언론 전에서 아이젠하워는 완패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으며 아이젠하워는 회상은 계속 이어졌다. 대통령 당선 후 휴전협상은 순조롭게 진행 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이승만의 방해는 집요했다. 한국군 단독 북진, 중국본토 공략 같은 이승만의 의지는 아이젠하워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냥 늙은 노인의 엄포 정도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군 북진은 현실화 되고 있었다. 시시각각 보고 되는 휴전협상단을 쫓아 다니는 시위대의 거친 구호가 거슬렸고 국민의 전쟁의지와 이승만의 공산주의와의 대결의지는 휴전협상단을 주눅들게 했다.
참다못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휴전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다른 조치(another arrangement)를 고려 하겠다. 다른 조치(another arrangement)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의미하고 있었다.
미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로부터 이승만의 정치적 숙청 및 제거 계획서인 에버레디 플랜(Outline Plan Everready)도 아이젠하워에게 보고 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서는 아이젠하워의 정치적 무덤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임을 머지 않아 깨닫게 된다.
이승만의 공격은 더욱더 집요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민과 함께 자살(national suicide)하겠다고 압박했다. 한국군 단독으로 휴전선을 넘어 북진하여 모두가 죽겠다는 이승만의 단호한 의지는 국가적 자살이 엄포가 아님을 서서히 깨달아갔다. 공산주의와 싸우다 죽는 국가적 자살(national suicide)의지는 이승만의 용기였다. 그 용기는 고스란히 활자가 되어 미국 신문 지면을 덮었다. 용기 있는 이승만의 반대편은 공산주의와 대결을 회피하는 겁쟁이 아이젠하워로 그려졌다.
화가 끓어 오른 아이젠하워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이승만에게 보내 다른 선택(레짐 체인지)이 엄포가 아닌 자신의 의지임을 전달했지만 이승만의 답변은 단호했다.
“한국은 휴전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고 하더라도(even if it meant suicide) 한국은 계속 싸울 것이고 나는 직접 국민을 이끌겠다.”
클라크 사령관의 보고를 받고 아이젠하워는 정신이 아찔했다. 이어 올라온 주한미대사 브리그스의 보고는 더욱 구체적이었다.
“나는 필요하다면 국민을 이끌고 북으로 가서 자살하겠다(leading people north to suicide if necessary)”
이승만을 가볍게 본 아이젠하워의 오만은 어느덧 공포로 변해가고 있었다. 전쟁을 끌고 갈 것도 이승만의 동의 없어 휴전을 밀고 갈 것도 아닌 정치적 함정에 빠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국가적 자살(national suicide)이 어쩌면 자신에게 정치적 자살을 예고 하는 듯 했다.
그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다 정신이 들은 아이젠하워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이내 회상에 빠져들었다. 망망대해에 외로이 뜬 돛단배 같은 정치적 처지에 처한 아이젠하워에게 1953년 6월 18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은 포로 수용소를 지키는 UN군을 제압하고 전격적으로 2만7천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이승만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UN 사령부의 지휘를 받지 않는 헌병대를 동원한 노련한 정치적 술수에 아이젠하워는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총을 쏘지 않았으며 초병의 얼굴에 고추가루를 뿌렸다. 첩자가 들어가 철조망을 잘랐다. 아군을 향한 아군의 총뿌리라고 비난할 수도 없었다. 미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어떻게 세계 최강 미군이 무장하지 않은 군대에 제압 당할 수 있는가 비난이 쇄도했다.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으려는 비겁한 아이젠하워의 조롱이 뉴스가 되었다. 이승만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계 모든 언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격분했다.
"미국은 우방을 잃는 대신 적을 하나 얻었다“
면도 중인 처칠은 면도칼을 떨어뜨리며 소리 질렀다.
“이승만은 미쳤다, 저 늙은이가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다”
처칠보다 한살 어린 이승만은 답했다.
“그 늙은이는 아편전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팽덕화는 분노를 넘어 절규했다.
“반공포로 1명당 한국인 5명을 잡아다 죽여라”
영국 하원은 ‘예방적 구금(preventive custody)’을 결의했다. 즉 이승만을 체포하겠다고 나섰다.
미국 언론은 일제히 이승만의 협조 없이 휴전은 불가능하다는 기사를 쏟아 냈다, 뚝심의 아이젠하워의 자존심은 물러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라크 UN 사령관 전언(傳言)을 통해 이승만에 최후통첩을 했다.
“미국과 유엔군이 전쟁을 지휘하고 휴전을 체결할 권한을 인정 하여야 한다. 계속 독자 행동을 한다면 현재와 같은 미국, 한국의 군사관계를 유지할 수 없으며, 다른 체제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맞받아 쳤다.
“당신의 나라는 당신의 길을 가고 내가 나의 길을 가야 한다면, 적어도 친구로 헤어지자”
대통령 취임 1년만에 맞은 정치 초년병 아이젠하워의 선택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냐 휴전이냐 선택권은 없었다. 아이젠하워에게는 이승만을 설득할 수 있는 제3의 길 외에는 선택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나 순조로웠던 휴전협정이었다. 2년간의 휴전협상은 막바지에 있었고 포로 송환문제 타결도 눈앞에 있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휴전 협정의 대미를 장식할 포로 교환문제는 사실상 해결 되었다고 보고 했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휴전협상이 하루아침에 협상테이블이 두동강으로 쪼개지며 무너졌는지 셈법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했다. 이승만을 인정하지 않고는 그의 동의 없이는 휴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로버트슨을 급파했고 이어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보내야했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이승만보다 2년 먼저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동문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최고의 국무장관으로 꼽히고 있었다. 워싱턴의 덜레스 국제공항 이름이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냉정하게 정치적 주판알을 튕겼다.
첫째, 진행 중인 휴전 협상이 깨질 수 있다.
둘째, 아이젠하워는 자유대한을 지켜 주기 위한 사실상 유엔군 최고 지휘관이다. 그럼에도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안보를 내동댕이 치고 비겁하게 휴전을 선택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셋째, 가장 신속하고 손쉬운 방법은 이승만의 실각 또는 제거였지만 한국민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이승만 제거는 한국을 적으로 돌리고 자유진영 내부에서 정권교체를 일으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네째, 3년 동안 막대한 돈과 총알을 퍼부으며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패퇴한 패권국 대통령이라는 국내외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다섯째, 2차대전 전쟁영웅으로 취임한지 고작 1년 만에 공산주의로부터 도망간 겁장이라는 조롱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여섯째,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 때 이승만이 작정하고 북진한다면 동맹군을 공격하는 군사적 행동은 불가능한 선택이며 북진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오히려 철수하는 미군이 공격 받을 수도 있음이다.
정리하면 이승만에게 굴복하면 미국 대통령의 권위가 손상되고,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제거하면 동맹국 정권을 뒤엎는 문제가 생기고, 한국을 버린다면 국내외 정치적 비난은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천문학적인 전비와 물량을 쏟아 붓고서도 공산화가 된다면 국가 아젠다가 된 트루먼 독트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소련과의 첫 대결에서 패배 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물리적인 압박으로 휴전을 하여도 이승만과 한국군의 독자적 군사행동은 막을 방법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이승만과 대결에서 협조를 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고 난마처럼 헝클어진 당시를 회상하던 아이젠하워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반공포로 석방은 가장 큰 국제적 이슈였다. 모든 시선은 이승만에게 집중 되어 있었다. 소용돌이의 중심에 선 이승만 또한 인간이었다. 그토록 냉정하고 그토록 담대했던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직 후 만난 장택상에게 심중을 토로했다.
"내가 오늘은 솔직한 고백을 할테야. 일생을 통해 감옥을 드나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 안한 나야. 그런데 이번 반공포로 석방 후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
반공포로 석방 후 이승만을 만난 클라크 UN 사령관도 본국에 보고했다.
직접 만나보니 이승만은 밤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극도로 긴장해 있었으며, 세계적인 비난이 이승만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승만은 냉정했다. 그의 담대함과 용기는 국제사회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 용기였다.
“나는 내 신분의 권한으로서 전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이 조치를 단행함에 있어서 유엔군 당국 및 관계 당국과 전연 협의 없이 진행한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제네바 협정 및 인권 옹호의 제원칙하에 반공 포로들은 석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패권국 미국을 상대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아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을 용기와 담대함으로 실천했다. 그는 한반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이며 가장 차거운 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념 앞에 물러설 수 없는 양심을 가졌고 국민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지도자였다.
UN군 수권 군대의 대통령으로서 아이젠하워의 최우선 목표는 ‘명예롭게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이승만에게 목표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휴전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정면으로 충돌한 두 지도자의 대결은 이승만의 힘겨운 판정승으로 결말이 나고 있었다.
승부에 이르기까지 두 지도자 사이와 공간은 견딜 수 없는 극한의 긴장감이 지배했다. 끝없는 수싸움과 숨이 막힐듯한 무게를 견뎌야 하는 인내와 공포가 짓눌렀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아이젠하워였다, 그는 서랍을 열어 존포스터 덜레스에게 쥐어 주어야 할 이승만에게 전달할 수표책을 꺼내들었다.
괴로웠던 당시를 회상하던 아이젠하워는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야전군 사령관의 버릇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온 것이다. 욕설과 함께 꿈을깨듯 회상에서 벗어난 아이젠하워는 여전히 산적한 문제를 놓고 백악관을 찾을 이승만과 수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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