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생각하며 살았지만 오늘따라 생각이 깊어졌는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가끔이나마 성질 오르거나 화를 내는 내가 싫어서 얼굴색이 별로 좋지 않아보였는지 작은 딸 녀석이 묻는다.
“아버지, 병화 때문에 근심되세요?”
요즘 아이들과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우리말을 사랑하는 나는 자폐증 큰딸아이와 달리 정상아로 태어난 우리 작은 딸아이에게 어렸을 때부터 호칭에 관한 교육만큼은 철저히 시켰기에 아빠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아버지로 부른다.
나는 딸아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하며 키웠었다. 그러니 질문에 솔직하게 고민을 이야기 할 밖에.
“뭐, 병이야 정신만 바로하면 고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니까 그 때문은 아니고……, 얼마 전에 도사청년에게 화를 낸 것이 찜찜해서 그런다.”
“제가 보기에는 화 낼만 했었는데요? 그런 문제까지 마음에 담고 반성해야 해요?”
그래서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옛날 앞마을에 갑순이, 뒷마을에 갑돌이가 살았고 두 마을 가운데 있는 야산에 암자를 짓고 사는 노스님 한분이 계셨다.
갑순과 갑돌이 연애를 하다가 갑순이 덜컥 임신하고야 말았다. 양반가문 자제들이 보리밭에서 응응하다가 임신을 했으니 갑순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밖에. 양반가문 규중처녀가 임신을 했으니 밝혀지면 가문체면 때문이라도 갑돌과 갑순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로 어찌 불러오는 배를 숨길 수 있으랴. 결국 아버지에게 임신사실이 탄로 난 갑순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내가 죽더라도 사랑하는 애인 갑돌만은 보호해야 한다는 거룩(?)한 결심이다.
“암자 스님이 아버지예요. 불공드리러 갔다가 그만…….”
차마 자식을 죽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갑순이 아버지는 갑순이 해산하자마자 간난 아이를 스님에게 데려갔다.
“당신 씨앗이니 키우던 죽이던 알아서 하시오!”
불심이 깊은 아버지가 차마 스님을 해코지 할 수 없었던 거다.
“아! 그렇습니까?”
스님은 두말 않고 아이를 맡았다. 갑순을 능욕했다는 누명을 쓴 스님은 동네사람들의 온갖 질시에도 미소로 일관하며 젖동냥하여 아이를 키우는데 정성을 다할 뿐이었다.
날이 걸수록 갑순은 병색이 짙어지더니 몸져눕고야 말았다. 스님에게 맡겨진 제 아들이 못내 그립고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던 거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딸아이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갑순 아버지는 딸아이의 고백을 듣게 된다.
“아이 아버지는 갑돌이……. 부디…….”
너무나 기진하여 정신 잃은 딸아이의 고백에 갑순 아버지는 혼절할 만큼 충격을 받고 말았다.
갑돌이 아버지에게 사연을 이야기 하자 갑돌 아버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사둔영감! 이 아니 경사겠소. 어찌 이제야 이야기 한단 말이요? 나도 모를 사이에 손자가 생겼단 말이요?”
갑순과 갑돌은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스님에게 맡긴 아들을 찾아야 했다. 값진 선물을 바리바리 준비해서 스님 앞에 무릎 꿇고 갑순이 아버지가 사죄했다.
“이러 저러해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이를 찾아가야겠습니다.”
스님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스님은 스스럼없이 아이를 돌려주었다.
갑순이 아버지는 도무지 스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우며 아이를 맡겼을 때 ‘아! 그래요’ 하시더니 뻔뻔스럽게도 아이를 되돌려 달랄 때에도 ‘아! 그래요’라고 하십니다. 억울하지도 않으십니까?”
갑순이 아버지의 질문에 스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 하면서 되물었다.
“아이를 맡으라기에 맡았고 돌려달라기에 돌려주는 건데 그게 무슨 문제인가요?”
그야말로 이름난 고승들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위대한 설법이라고 생각한 갑순과 갑돌이 아버지들은 이후 진정으로 마을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양반들이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작은 딸아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그 스님처럼 살고 싶으세요?”
“옳고 그름을 판단치 아니하고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스님이 부럽지 않으냐? 그렇다만 나는 어려울 것 같구나. 이 나이 되고서도 여전히 판단이 앞서서 화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에이. 그럼 귀신이죠. 저는요, 아버지가 그 스님처럼 귀신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기보다 살아있는 사람이기를 바라거든요? 저는 평소 화를 잘 내지 않으시다가도 빨갱이들에게 만큼은 가차없이 질타하는 아버지가 귀신보다 훨씬 좋아요.”
“아마도 내가 옹졸한 성품이라 그 스님이 좋아보였는가 보다. 좀 더 마음이 넓었으면 좋겠는데 타고난 성품을 바꾸기가 이처럼 힘겹구나.”
이 이야기는 어느 불경인지 공안집인지 에서 읽은 글이다.
이름 없는 스님의 이야기를 통하여 진정 열렸다 함이 무엇인지 안내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둘째 딸 말처럼 그런 삶이 과연 사람이 사는 모습인지 상대성의 현상계에서 그런 삶이 가능할지 의문이 올라온다.
뭐, 내가 도사거나 스님처럼 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살아있는 동안 가능하면 사람답게 살자고 염원했더니 타고난 근기根機도 그리되지 못한 주제에 꿈만 컸던 모양이다.
그래도 딸아이에게 충고를 들을 수 있는 내가 도사님들보다 훨씬 좋다는 기분이다. 까짓 것. 불교식 논리로 다음 생에 개돼지로 태어난들 어떠하랴. 개돼지로 살면 그뿐이지.
더구나 내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가. 교회에서 교리로 말하는 신이 아닌 나만의 하느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