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군인들의 평범하지 않은 하루, 2002년 6월 29일]
제1연평해전에서 패전하고 북으로 생환한 등산곶 684호의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했다라는 얘기를 지난 포스팅의 말미에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2년, 대한민국은 월드컵의 열기에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께가 뻐근한 감동이거늘,
그해의 태극전사들은 월드컵 참가 이래 최고의 성적을 국민에게 선사했습니다.
준결승에서 독일에 패했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터키와의 3,4위전에 필승의 각오를 다집니다.
<2002 월드컵 당시, 터키전 후에 서울시청 광장에 다시 모인 붉은악마들.
열정으로 붉었고, 환희로 붉었습니다. 사진출처:연합뉴스>
온 국민의 관심이 저녁에 있을 터키와의 경기에 쏠리던 6월 29일 오전 9시 37분.
서해 경비 중이던 참수리 357 함교의 레이더에 이상한 점 하나가 포착됩니다.
북한의 육도에서 20노트의 속도로 남하하고 있는 작은 점이 윤영하 정장(당시 대위)의 눈에 들어옵니다.
<나라 잘 지킬테니 마음 편히 월드컵을 즐기라며 인터뷰를 했던 故 윤영하소령.
이 모습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해군 고속정은 두 대의 고속정이 1개의 편대를 이뤄 작전을 수행한다고 하는데요,
당시 참수리 357이 속해있던 232편대의 김찬 편대장(소령)도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윤영하 정장이 발견한 점보다 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등산곶 부근에서
다른 점 하나가 17노트의 속도로 남하하는 모습을 본 거죠.
9시 45분. 이 상황은 해군2함대사령부로 보고가 되었고 긴급 출동명령이 내려집니다.
동시에 2함대사령부에는 위기조치반이 가동되었고,
편대장 김찬 소령은 2함대에 식별한 내용( ‘적선 번호는 388호, 155t급 육도 경비정’)을 보고합니다.
<우리 해군 고속정의 편대기동모습. 사진출처:연합뉴스>
그리고 10시 1분, 232편대는 전투배치를 하고 긴급 발진을 합니다.
차단 기동을 위해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던 윤영하 정장은 북한 경비정의 번호를 확인합니다.
684. 낯설지 않은 번호, 그러나 그 배의 모습은 상당히 낯설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탱크의 포신 같은 육중한 포가 684호의 함수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배를 확인한 후, 232편대는 경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북방한계선을 월선했으니 즉각 북쪽으로 함수를 돌려 돌아가라 라고 말이죠.
그러나 이 메시지를 무시한 채 684호는 12노트의 속도를 유지하며 계속 남하합니다.
10시 25분,
232편대장이 타고 있던 고속정이 북한 경비정 684호의 선수 앞을 가로지르며
커브를 그리며 돌아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참수리 357의 윤영하 정장.
그 뒤에서 항해하던 참수리 357이 25노트 속력으로
북한 경비정의 선수 부분에 좌현을 드러내며 지나가려는 그 순간,
북한 경비정에서 섬광과 함께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684호가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을 공격하기 시작한 겁니다.
북한은 참수리 357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31분, 그 짧고도 긴 장렬한 전투, 떠나버린 나의 전우여]
참수리 357의 대원들은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반격을 합니다.
참수리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무기와 총에서 불꽃이 끊임없이 피어났고,
북한의 공격에 조타실과 기관실이 피격당하며 전원이 끊겨 자동 사격이 불가능해지자
수동으로 전환하며 격렬한 전투를 이어갑니다.
조타실이 피격당하며 조타장비까지 함께 고장이 난 참수리 357은 오른쪽으로 돌았고,
북한의 경비정은 쫓아오며 계속 사격을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퍼붓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 참수리 357은 필사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참수리 357은 더 이상 경비를 위한 고속정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죠.
윤영하 정장이 적의 공격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고,
동시에 ‘정장님을 보호하라’라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지혈을 하지만, 이내 전사하고 맙니다.
부정장 이희완 중위 역시 포탄 파편에 한쪽 다리뼈가 으스러졌고,
다른쪽 다리는 파편이 관통당하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윤영하 정장이 피격당하며 이희완 부정장이 지휘권을 행사했고
‘절대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계속 사격하라’라며 대원들을 독려합니다.
K-2 소총으로 응사를 하고 있던 권기형 상병 역시도
포탄 파편에 맞아 왼쪽 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습니다.
간신히 팔에 붙어 있는 손가락을 보고도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방탄조끼 끈으로 팔목을 묶어 지혈을 한 뒤,
탄창을 한 손으로 네 개나 갈아 끼우며 전의를 불태웠습니다.
20mm포 사수였던 조천형 하사는 포탑에서 끝까지 응사하다 포탑이 불길에 휩싸이며 눈을 감았고,
조천형 하사와 함께 포로 공격을 하던 황도현 하사는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두부의 1/3이 없어진 채 전사를 합니다.
정신없이 날아오는 총알 한 발이 서후원 하사의 왼쪽 가슴에 파고들었고,
서하사는 못다 핀 청춘의 눈을 감습니다.
조타실에 있던 한상국 하사도 피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피가 흘러나오는 자신은 잊은 듯, 키를 더 꼭 붙잡았습니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상병이 빨리 피신할 것을 권고했지만 한상국 하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면 꿈에 그리던 중사진급.
불붙은 배, 빗발치는 총알, 매캐한 연기, 피로 뒤범벅이 된 갑판.
박동혁 상병은 더는 대원들의 희생이 없길 바라며 그 자신 역시도 공격에 가담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없는 파편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가며 쓰러지고 맙니다.
31분. 참수리 357에 타고 있던 대원들에게 31분이란 시간은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요.
그 장렬하고도 슬픈 31분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232편대 소속의 다른 고속정이 684호에 집중 사격을 가했고,
달아나는 684호를 추격하며 응분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참수리 357 서해에 잠들다]
10시 33분. 흘수선 부근에 명중탄을 맞아 뚫린 구멍으로 해수가 차오르는
참수리 357 예인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고속정 함미와 조타실이 공격을 당해 자동 조타가 되지 않는데다
유입되는 해수로 인해 참수리 357은 회복 불능 상태가 되었죠.
<다른 각도로 본 제2연평해전 상황도, 출처 : 중앙일보>
화염에 휩싸인 조타실과 통신실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고,
갑판에는 대원들의 피가 흥건했으며 살점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하고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는 등
참수리 357의 갑판은 유난히도 바빴습니다.
당시 편대장 김찬 소령의 증언에 의하면 수습을 위해 참수리 357에 올라 대원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참수리 357의 대원 중 어느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눈빛만이 살아 숨 쉬는 야수같았다고 했습니다.
그 31분의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내 옆자리를 채워주던 승조원들의 부재 앞에
당한 만큼 갚아주지 못한 응어리 맺힌 심장만이 남았겠죠.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월드컵이라는 이름에 묻어버리고 맙니다.
232편대가 죽을힘을 다해 영해를 지키는 그 순간,
초계함 등이 후방 지원에 나섰고 공군의 KF-16과 F-4가 초계비행을 했고
해군의 링스헬기도 미사일을 싣고 비상대기에 들어갔죠.
10시 43분, 우리 함정들로부터 수백여발의 함포와 기관포 세례를 받은 북한경비정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 북한경비정은 선체가 기울어졌으나 침몰하진 않았습니다.
화력에 열세를 느낀 북한경비정들은 북쪽으로 속도를 높여 NLL 북쪽을 통과, 퇴각합니다.
그때 시각,10시 50분.
<참수리 고속정 제원.
1970년대 서해 NLL을 넘어오는 북한 해군을 경계해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
참수리급 고속정이라고 합니다. 사진출처:연합뉴스>
11시 59분, 같은 편대 소속의 고속정에 의해 예인되던 참수리 357은 계속되는 침수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예인 불가 판단이 떨어짐에 따라 연평도의 바다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게 됩니다.
그리고 오후 2시,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성남에 위치한 국군 수도 병원에 헬기편으로 도착했습니다.
우리 해군의 피해는 전사 4명, 부상 19명, 실종 1명. 그리고 서해의 꿈으로 잠든 고속정 1척.
피비린내 자욱한 전쟁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서해교전이란 이름표를 달고 역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대한민국은 터키와의 경기에서 2:3으로 석패하며
축제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다음 세번째 이야기, 제2연평해전 그 후로 이어집니다.
<자료 참조 : 2002년 월간 조선,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