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 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 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 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 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늘, 강의 계획은 이 런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 장군이 송나라 역사서를 읽고 남긴 독후감인 독송사는 날자는 적혀 있지 않아 때는 알수 없으나 1597.10.08. 난중일기에 3장으로 작성되어 첨부되어 있다. 모진 고문을 받고 이어 명량대첩을 치루고 얼마 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나라에 대한 충정과 나약한 군주에 대한 연민, 결코 왜와는 화친 할 수 없다는 장수로서의 신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애잔함 등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후 복잡한 이순신 장군의 심경을 남겨 놓은듯 하다. 적과의 화친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반드시 침략자는 멸하고야 말겠다는 무장으로서의 기백이 글귀 구절 구절 묻어난다. 반복되는 죽음이라는 단어 속에 1년 후 자신이 맞이할 최후를 암시하는듯 하다.
5.16혁명 제 18 회 기념일이다. 1961년 5월 16일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좌시만을 할 수 없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이다.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마와 같이 헝클어지고 부패부정 무질서 부조리 정체 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 당시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을 단행하고 구 정치인들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혁명정부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구악에 물든 대표적인 인사들을 구속하며 쾌도처럼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혁명정부에 대하여 다수 국민들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구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은 외세를 빌려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3년 12월 17일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로써 제 5 대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된 나의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군정은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5.16혁명 18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18년간을 회고하니 감회가 무량하다. 조국근대화 과업도 이제 결실기에 들어섰다. 1,2,3차 5개년 계획이 대체로 순조로이 진행되어 우리의 국력도 괄목하리 만큼 크게 신장되었고 공업화도 착착 추진되어 5.16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우리 만큼 나라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기적이니 한강이 기적이니 하고 우리가 걸어온 도정과 결과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이니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고조되어 있다. 자신들의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1972년 가을에 단행된 10월 유신은 우리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 작업이 열매를 맺으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 분발하고 총화로써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1979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5.16혁명 18회 기념일 일기를 남긴다. 임진왜란의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듯, 전 후 반복되던 혼란기, 적화의 위기 속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5.16혁명에 대한 회상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 유신으로 이어지며 산업화의 중심에서 국가발전을 견인한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의 결실이 익어가고 있었지만 부족한 아쉬움을 남긴다. 아쉬움으로 끝을 맺는 이날의 일기는 정확히 5개월 후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견하고 있는듯 하다.
기어이 국장으로 치루게 해달라는 유족의 몽니와 화려한 곤룡포 두르고 관에 들었던 김대중의 최후가 생각난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최고 권력자로 40년간 야당에 철혈독재를 폈던 김대중은 죽어서도 대통령으로 남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바람일 뿐 죽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부르는 사람은 흔해 보이지 않는다.
퇴로를 열어주라는 선조 이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노량 앞바다로 출정했던 이순신 장군은 굳이 노량대첩을 치루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노량 앞바다에 묻히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영웅이라 부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0일 전 1979년 10월 17일 짤막한 마지막 일기를 남긴다.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 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유신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과 자주국방에 매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일기장에 조차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후세의 사가에 자신을 맡기고 떠났다. 그래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영웅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