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분자들은 볕정책을 독일통일에 많이 비교하여 그 가능성과 당위성을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독일의 분단과 우리의 분단을 단순비교하기에는 엄청난 무리가 따르며 독일의 통일을 우리의 통일에 대입하려는 것도 대단한 괴리감을 가지게 한다.
분단국가라는 것, 강대국과 이념에 따른 분단이라는 공통점은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독일은 동족이 총부리를 겨누어 400만이 넘어가는 무고한 인명이 살상되는 잔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겪지 않았다. 이념으로 갈려 반목을 했을 지언정 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증오는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한 죽고 죽이는 서로간의 증오가 없었기에 1969년서독의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시작하고 접촉을 시도한지 3년만에 “동서독 기본조약”이 맺어졌고, 일사천리로 1973년에 UN동시가입을 하게 된다. “동서독 기본조약”에 따른 이산가족의 왕래나 통신의 자유는 철저하게 지켜졌고, 많은 경제 문화적교류를 20여년간 지속하다 통일을 이루게 된다.
당시 동독은 공산권국가 중에서 공업이 가장 많이 발달되었고, 산업역시 가장 발달된 공산국가 중에서는 안정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동독주민이 부당함에 대하여 정권에 저항할 수 있었던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고르바초프 이후 개혁개방의 물결을 거스르는 동독의 호네커를 국민이 저항하여 실각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제한되었지만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었었다. 동독은 상대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동유럽의 소련 위성국가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렸고 동독을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경제라고 평가할 정도로 동독은 뛰어난 공업국으로 성장했다.
당시 동독의 공업화 및 경제력을 세계8~9위였다고 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었다. 독재자라도 호네커 또한 그는 서독과의 무역 및 관광 교류를 증진시켰고, 그 대가로 서독의 경제원조를 받아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 갈 수 있게 했다. 북한식의 폭압적 통제정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호네커도 국민의 저항으로 권좌를 내어 놓고 소련으로 망명하고, 동독 국민의 소환에 견디지 못하고 칠레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호네커는 1971년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계자가 되어 권자를 물려 받았고 그의 권자는 크렌츠와 모드로프, 드메이져 등으로 이어지는 권력이나 정권교체가 가능했던 정치적 자유가 동독국민에게는 있었다.
또한 서독의 동독지원에 있어 반드시 원칙을 가지고 원칙에 맞지 않으면 지원을 거부했으며 지원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지원을 돈으로 하는 경우는 정치범 수백명을 서독으로 석방시켜 주면 한다던가, 현물지원도 동독주민 만여명을 서독여행을 하게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주고 받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고 어떠한 경우든 동독사회에 부강하고 윤택한 독일 사회를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서독은 동독에 60조원에 이르는 경제적 지원을 하였지만 그러나 항상 조건을 달았고, 군비축소, 서독TV시청, 친지방문, 고향방문, 정치범수용소 석방 등의 요구를 동독에 했고 관철시켰다. 그러한 독일의 일관된 통일정책과 지원은 동독 국민들은 통일 이전에도 서독TV를 보았으며 서독 동독간 비교적 자유로운 국경이동이 가능했다.
북한을 보라.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부자세습을 넘었고 이제는 손자에게 넘기려 하는 권력세습의 철권통치이고, 북한 주민에게는 그 어떤 정치적 자유와 선택을 누릴 수 없는 상태이다. 극단적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는 북한동포는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만들었고,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 된 통제사회에 그러한 지원은 정권이나 기득권층 일부에게 돌아가는 근시안적인 지원이었다. 또한 너무도 성급하게 소위 댓가 없이 퍼주기 식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지원에 익숙해진 북한 정권에게 이제와서 원칙과 정도, 약속을 지키라는 우리의 요구가 먹혀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국가간의 조약에 버금가는 남북한의 합의는 언제든 김정일의 말 한마디로 무력화 되는 부도수표에 지나지 않았고, 그토록 철저하게 맹약한 핵개발 금지도 보란 듯이 어겼고, 무력도발과, 관광객 사살, 일방적 합의 사항파기 등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통일을 위한 북한의 문호개방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시도해야할 통일방법 이다. 하지만 그러한 통일노력이 성과에 집착했고, 단시간내에 모든 것을 이루려는 졸속으로 진행이 되었으며, 원칙과 기준도 없고, 의무이행도 없는 우리만의 외침이 되어버렸다. 즉 “햇볕정책”이란 구호만 존재하고 천문학적인 손해만 초래하는 부도수표가 된 것이다.
당사자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도 없던 독일이 20여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진행한 통일사업을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이고 죽고, 상시적으로 무력도발에 떨어야 했던 분단국가는 그 노력의 수십배가 필요하고 몇배의 시간이 필요한 장기적 통일사업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느 권력자의 개인적 생각과 성과에 집착한 욕심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보려는 욕심이 결국 원칙도 결과도 없는 통일정책이 되게 한 것이다.
남북통일의 최소한의 기반은 북한주민이 권력에 대하여 최소한의 요구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이 된 상태에서만이 그 효과가 날 수 밖에 없다. 최소한 동독주민 만큼의 정치적 자유와 문호가 개방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어떤 노력을 한들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없는 햇볕정책이었던 것이다.
무력 충돌을 위한 점령을 통해 통일을 바라는 국민은 없다. 대한민국 전체가 햇볕정책의 지지자 이다. 하지만 그 햇볕정책은 가능성을 담보로 천천히 성과를 보아가며 진행하라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말한마디에 자유대한의 모든 통일정책이 좌우되는 일방적인 통일론으로는 그 어떤 노력도 공염불이고 부도수표일 뿐일 것이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북한의 권력자에게 강력하게 협상과 지원, 합의에 있어 원칙과 정도를 지키고, 약소의 이행을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김정일 그도 통치자이고 권력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넘겨받은 권력자도, 그어떤 북한의 권력자도 피폐해진 경제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잃어버린 북한주민에게 쫒겨나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통일 사업에 있어 최대의 걸림돌인 북한사회가 통제사회라는 것이 시간을 가지고 원칙을 지키며 통일정책을 일관되게 편다면 오히려 최고의 장점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민족이 하나된다는 대원칙하에 투자라는 개념으로 얻을 것을 얻어가며, 일깨울 것을 일깨워가며 통일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공적자금 투입한것도 150조원이 넘어가는데 통일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몇곱절을 쓴다한들 반대할 국민은 없다. 하지만 천천히, 원칙과 정도를 가지고 통일정책에 임해야 한다. 햇볕정책은 돈주고 산 노벨상의 산물이자 천안함의 비극을 잉태했다. 꽃다운 해군의 아들 그들의 피를 부른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