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이 일어나던 날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 고향 미주리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다 저녁 9시에 급하게 울린 전화를 받는다. 다급하게 애치슨 국무장관은 6.25 사변이 일어났음 보고 했다. 애치슨은 다음날 아침에 자세한 상황을 더 파악하여 보고를 하기로 하고 트루먼은 언제든지 급한 소식이 있으면 시간에 상관 없이 보고 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 해가 뜨고 비행기를 타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루먼은 주요인사 몇 명만 모아 놓은 회의석에서 참전을 결정했다. 그리고 국무장관인 애치슨에게 참전 지시를 한다.
“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Dean! We have got to stop thos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고졸 출신 대통령이다. 시골인 미주리주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해리 투루먼은 깊은 신앙심과 의리를 중요시 하는 상남자로 알려져 있다.
트루먼은 2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지원을 하였으나 심각한 근시를 가지고 있어 여의치 않자 시력 검사판을 통째로 외워 군의관을 속이고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1차대전에서 포병으로 열심히 싸워 대위로 제대한다.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몰락시키는 초석을 쌓았다. 리처든 닉슨,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린 3대 영웅으로 기록 되고 있다.
트루먼은 우리를 2번 구해 주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영국 에틀리 수상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서 병력을 유럽으로 철수시키자고 제안 했다. 영국의 제안에 미국 정가에서도 상당수가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한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그러나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린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편에서 용감히 싸웠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취재하는 기자는 트루먼에게 “중요하지 않아서 철군했던 나라에 어떻게 전쟁이 나자마자 다시 군대를 파견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트루먼은 기자들의 질문에 말 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켰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야’라고 말 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애치슨 장관의 전화를 받는 순간 책을 읽고 있던 중 이었는데 그 책은 역사상의 모든 큰 전쟁들은 개전 초기의 작은 전쟁일 때 잘 대처하지 못해서 결국 큰 전쟁으로 비화했다는 역사의 교훈에 관한 내용의 책을 읽고 있었다 라고 했다.
트루먼의 6.25 사변에 대한 대처는 파격적이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승리의 결정적 기여를 한 미국은 전시에 국내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6.25 사변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 하여 공산주의와 정면 대결을 국내외에 천명한다. 그리고 트루먼은 전시 특별예산 확보를 위하여 물가와 임금, 복지를 통제하여 부족한 전비를 충족했다.
트루먼은 대통령 행정명령 제2914호를 내려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당초에 책정 된 예산의 네배를 편성하여 총 500억 달러 규모의 국방예산을 마련했다. 나아가 NSC-68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지속적으로 군비를 증강시켰다.
NSC-68 프로그램을 통하여 6.25 사변 중 1951년에는 481억달러, 1952년에는 604억달러 1953년에는 469달러, 1954년에는 412억달러를 6.25 사변에 쏟아 부었다. 1960년 우리나라 일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에 불과했고, 1960년 일본 국가 GDP는 4백4십억 달러였다.
2차대전 후 미국은 국가전략을 위해 보호해야 할 주요국가 16개국을 꼽았다.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를 14위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애치슨라인에서 한반도가 벗어나게 되었고, 미군까지 철수시켰다.
참전은 미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신속한 참전을 위하여 미국 의회를 거치지 않고 UN 승인을 이용한다. 미국 의회의 복잡한 절차와 소요시간을 건너뛰고 UN을 동원한 것이다.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보고 있는 의회의 시선도 부담이었다.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으나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소련의 반대가 문제였다. 상임이사국으로 넘어간 참전 문제는 소련이 불참함으로서 UN군 파병이 결정 되었다. 이유를 밝히지 않은 소련의 불참은 하나님의 돌보심이었다.
이러한 트루먼의 노력으로 6.25 사변이 일어난지 6일 후, 7월1일 스미스부대가 부산을 상륙하여 새벽에 대전까지 북상하게 된다.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주의는 명확했다. 신앙심 깊었던 그는 기독교가 반공주의 노선의 최전선에 서야 함을 점을 1951년 4월 뉴욕 장로교회(New York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 참석하여 역설했다.
“지금 세계에서 우리를 겁박하는 위협은 완전히 ”영적인 가치“에 반대됩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맹렬하고 끔직한 광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박멸하려고 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어떤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현재 우리가 가진 권위와 힘의 위치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6.25 사변 발발 하고 즉시 트루먼은 한통의 전보를 받는다.
“수백만 미국의 기독교도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지금 대통령께 지혜를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지금 이 순간 맞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한국은 세계 어느 곳보다 기독교도 신자의 비율이 높은 나라입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쓰러지도록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일 것입니다.”(“Millions of Christians praying God give you wisdom in this crisis. Strongly urge showdown with Communism now. More Christians in Southern Korea per capita than any part of world. We cannot let them down.)”
개신교의 교황으로 불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공산주의에 기독교 신자가 쓰러질 수 없다는 단호한 호소였다.
라디오 방송이 미국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그 시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라디오 방송 설교는 미국의 영성을 강타 하고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역사상 존재했던 설교자 중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 목사였다. 1993년 한 해 동안 2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22억명에 달한다.
빌리 그레이엄의 첫 전도집회는 1947년 9월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서 개최 되어 6,000명의 청중이 모였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1957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5주 동안 전도 집회가 열려 세계 최장기간의 집회가 되었다.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인 집회는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집회로 110만명이 모였고, 3일간 개최 된 여의도 집회는 300만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무신론의 공산주의 위험성을 예고 하였다. 1951년 6.25사변 중 빌리그레이엄 목사는 ‘결단의 시간(Hour of Decision) 설교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영국이 포츠담과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너무 양보한 대가라고 비판하며 “스탈린을 믿은 대가는 죽음뿐이었다”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동서 냉전을 영적 전쟁, 즉 아메리칸 메시아니즘(American Messianism)과 소련 메시아 주의(Soviet Messianism)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소련 메시아주의는 세계를 자본주의의 악과 모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산혁명을 전 세계로 수출하려는 이념으로서 반 하느님, 반 예수, 반 미국의 대결이라고 했다. 강력한 그의 호소는 미국의 영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대한민국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인 루스(Ruth Bell Graham)는 소녀 시절 평양의 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루스의 아버지 넬슨 벨(Nelson Bell)은 그녀를 평양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서 공부하게 했다.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을 경험한 루수는 6.25 사변 소식을 듣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여 트루먼에게 전보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강력한 영적 지원은 무엇보다 트루먼에게는 힘이 되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6.25 사변 중 한국을 찾아 영적전쟁을 지원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과감하게 전시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막대한 병력과 돈을 쏟아 붓기 위하여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UN을 동원하고,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한반도 단호한 참전은 종교계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다.
또 한명의 은인 프레데릭 해리스 목사는 국부 이승만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24년간 상원 원목으로 재직했다. 해리스는 트루먼이 부통령일 때부터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6·25전쟁 발발 한 달 전 해리스는 트루먼에게 긴급 서한을 보냈다.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한국의 안보를 위해 이승만을 국빈으로 초청해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해리스가 목회했던 파운드리감리교회에 1939년부터 45년까지 출석한 교인이었고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스 목사는 상원의 원목의 영향력으로 신속한 파병을 위해 여론을 형성했고, 정가 호소도 이어갔다.
트루먼이 파병을 결정 한 후 해리스는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훗날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고 회고될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고 트루먼은 “당신의 편지에 무척 감사하고 있다”고 답했다.
해리스 목사는 전쟁 중에도 구호금과 물품을 보내고, 전란으로 고통 받는 한국의 구호사업을 위해 노력하며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전 후 원조를 위하여 경제원조정책 고위 관계자를 만나 한국에 대한 원조를 지속해줄 것을 부탁했고 원조와 구호에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 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국부 이승만이 전 후 방미하였을 때 파운드리교회를 찾아가서 예배에 참석했고 나의 목사님 해리스를 찾으며 인연을 회고 했다.
“1945년 이전 워싱턴DC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나는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평생의 친구이자 현재 이 교회를 관할하는 해리스 목사를 사귀었다.”
해리스 목사 재임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국부이승만은 주미대사를 보내 감사함을 전하고 있다.
“나는 한국이 가장 어두울 때 해리스로부터 지혜로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내 조국의 위대한 챔피언(champion)이다.”
6.25 사변은 그 당시 미국 사회의 반공의지와 여론을 주도한 3명의 위대한 반공주의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빌리 그레이엄목사에 의해 강력한 도움을 주어 극복 되었다. 3명 모두 너무나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트루먼은 나는 중요한 모든 일을 하나님과 상의 한다고 했다. 맥아더는 평생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성경책 2페이지를 읽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으며 빌리 그레이엄은 그 시대 개신교의 교황으로 불린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목사였다.
트루먼 독트린과 신속한 6.25 사변 참전, 5000분의 1의 확률을 뚫은 오성장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예수님과 공산주의 대결, 미국과 공산주의 대결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이를 미국 국민에게 알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진정 이 나라의 은인이다.
미국사회를 울린 또 한명의 주의 종 강력한 반공주의자 밥 피어스 목사도 있다. 로버트 윌라드 피어스(Pierce, Robert Willard) 본명인 그는 애칭인 밥 피어스로 불렸다. 그는 중국에서 3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공산당에 패하여 대만으로 도주하고 결국 공산화가 되면서 1949년 선교지를 한국으로 옮겼다.
탁월한 부흥사역자이기도 하였던 밥 피어스는 한경직 목사가 세운 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에서 부흥대회를 개최 하는 등 사역을 하였다. 6.25 사변이 터지면서 밥 피어스 선교사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 절규했다. 몇날 몇일을 굶주리다 걷는 것도 힘든 고아가 배급소를 찾아온다. 배급을 기다리며 줄을 섰던 고아는 그 자리서 쓰러져 죽는다. 배급 중 배급 솥에 밥이 떨어져 밥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충격 받은 밥 피어스는 선교활동을 정리하고 종군기자가 되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누비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찍었다. 특히 굶주리는 고아와 아이, 미망인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밥 피어스는 전장을 누비며 찍은 영상으로 '안식년의 사자' '38선' '화염' '휴가병의 죽음' 등의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미국 교회를 찾아 다니며 기록영화를 보여주었고, 악의 공산주의와 전쟁으로 죽어가는 고아와 아이, 미망인 등의 도움을 요청했다. 밥 피어스의 활동은 미국 교회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기독교 구호 단체가 생겨나고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한국인을 돕기 위하여 대대적인 구호활동으로 돈과 구호물품이 모였다.
1952년 3월 국가 통계에 의하면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이 2,618,000명, 전쟁으로 물자상실이나 지원수단이 파괴되어 고통을 받는 전쟁 이재민 이 3,420,000명, 가난으로 괴로움을 받는 지방 빈민이 4,368,000명, 합해서 10,406,000명이 구호대상자였다. 한국인의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951년 당시 남한의 전체 인구는 약 21,000,000만명 이었다.
고아와 부양가족이 없는 아동, 신체 장애자(맹인과, 벙어리, 수족 절단자 등), 주거 부정의 청소년들, 전쟁 미망인과 자녀 등 하루를 두고 생과 사를 걱정하여야 하는 절대적 구호가 필요한 사람도 널려 있었다. 전쟁 미망인과 그 자녀들만 80만에 이르렀고, 20만명의 고아가 거리를 배회하며 굶주리고 있었다.
밥 피어스 선교사의 활약으로 미국 교회가 주축이 되어 모금이 되고, 구호물품이 모아졌다. 1951년 대한민국이 받은 원조 중 돈과 구호물품의 절반 정도가 미국 교회에서 보내 준 것이었다.
밥 피어스는 한경직 목사의 미망인과 고아의 구제 활동을 보았고, 그는 선명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구호사업에 나선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후원자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후원금과 구호품에 그치지 않고 고아원과 모자원 등 복지시설을 설립하여 구호에 나선다. 특히 고아 구제에 대한 그의 노력으로 수 많은 고아들이 구제를 받게 되면서 밥 피어스는 한국 고아의 아버지가 된다. 밥 피어스사가 설립한 선명회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으로 발전하여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 서대신동에 한경직 목사가 전쟁 미망인을 돕기 위하여 설립한 부산 다비다 모자원에 밥 피어스 목사를 비롯한 해외 후원자들의 모금으로 운영된다. 최초로 다비다 모자원에서 최초의 해외 후원자와 결연가정이 되어 도움을 받은 백옥현씨는 교사였던 남편이 북한의 보안대원에게 총살 당한 후 부산 다비다 모자원의 도움으로 살아 남았다. 현재 네 딸은 소아과 의사와 교사로 성장했다.
밥 피어스 목사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의 마음도 같이 아프게 하소서“
이러한 밥 피어스 목사의 구호활동은 수 많은 구호단체의 활동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구호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홀트아독복지회를 비롯한 수 많은 기독교 구호단체가 만들어져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수 많은 인명을 구한다. 이러한 구호활동은 전세계로 퍼저 나가 파병국 이외 의료지원국 5개국을 비롯하여 46개국이 대한민국을 돕기 위하여 돈과 물자를 보내 주었다.
밥 피어스는 단순 구호활동에 그치지 않고 공산주의 위험을 끊임없이 알렸다. 피어스는 자신의 저서에 6.25 사변을 “지옥의 광신적인 복음주의 (fanaticalevangelism of hell)”라고 불렀다. 즉, 공산주의 운동과 사상이 영적인 차원과 종교적 요소를 지닌 거짓된 종교의 모습을 발견했다. 광란의 빨갱이 난동을 보고 북한의 주체사상교가 생겨날 것을 그 시대에 통찰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어스는 한국인들과의 만남에서 공산주의를 물리치는 힘으로서의 기독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기독교의 반공주의적 의미를 이승만이 자기에게 한 말을 통하여 설명한다.
“공산주의가 대한민국을 파괴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국 국민들에게 있던 영적인 열정의 격렬한 용솟음 때문입니다”
피어스는 자신이 1949년에 경험한 공산화된 중국과 달리 1951년도의 한국이 공산주의에 저항할 수 있었던 원천은 수만의 기독교 학생들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그들을 “복음의 소금”이라고 불렀다.
밥 피어슨은 그의 저서를 통해 부산의 방어가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마지막 보루라고 했다.
“평양으로부터 크렘린까지 부산은 좌절의 상징이 되었다. 부산 때문에 모택동은 신경성 위장염을 안고 침실에 들어간다는 전언이 있다. 부산 때문에 대만을 침공하려던 봄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인도차이나에 대한 압박도 약화되었다. 홍콩은 좀더 편안하게 숨 쉴 수 있게되었다. 군대가 티벳 국경을 무자비하게 넘어오지는 못하고 있다.”
6.25 사변의 부산은 즉 한국은 전 아시아의 공산주의를 막아 내는 희망이고 보루였다. 밥 피어스는 한국을 공산주의를 봉쇄하는 마지막 성지로 여겼고 그는 구제활동은 곧 공산주의와 전쟁이었다.
밥 피어스는 미국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같이 활동하며 수 많은 반공집회에서 활약하였고 부산을 방문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한경직 목사를 소개하여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 공동의 전선 즉 공산주의와 전쟁에 한경직 목사와 연합하였다.
빌리 그레이엄과 밥 피어스, 그들은 공산주의와 전쟁은 곧 공산주의와 영적전쟁임을 미국사회에 각인 시켰다. 그들의 소리 없는 총성은 또 다른 공산주의와 전쟁이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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