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1일 미군정청장 하지는 김구를 반도호텔 사무실로 불러 호통을 치고 있었다.
“미국에 도전하는 과격행동을 즉시 중지하시오. 서약하시오 당신이 또 나를 속이면 적으로 간주하여 죽이겠다”
김구는 단호히 경고하는 하지에게 즉시 굴복했다. 그 시대 유력한 국가 지도자 중 한 명으로서 미군정에 치욕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김구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김구는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한통의 편지를 쓴다. 내용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것이며 임시정부는 집단적으로 개인적으로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였다.
김구가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5년 12월 중순 국일관에서 임정환영회가 열린다. 그 자리에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항, 신익희 엄항섭 등 임정 인사와 김성수와 조봉암, 송진우, 장덕수 등 유력 인사가 자리를 같이 했다. 술이 한잔 돌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신익희가 일갈했다.
“국내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총독부에 크든 작든 협력한 친일파들이다”
한민당의 장덕수는 일어나 쏘아 붙였다.
“해공,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임시정부가 그런 색안경을 끼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다니...기가 막혀서...그럼 나도 숙청감이로군 그래...”
신익희가 한마디 더했다.
“어디 설산 뿐인가”
자리가 소란스러워지자 송진우가 나섰다.
“해공, 어찌 그럴 수 있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게 된 임시정부를 누가 모셔왔는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그랬을 것 같애? 천만에. 우리가 임정을 모셔다가 국민들이 떠받들게 하려는 것은 3.1운동 법통 때문이오, 노형들 개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아시오. 당신들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먹고 살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아?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 고생은 우리보다 적었을 거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힘을 합해 건국에 힘쓸 생각부터 해야지, 그런 말은 앞으로 삼가시오. 해외에서 헛고생들을 했군. 쯧쯧.”
송진우의 말에 다툼은 조용해졌다. “당신들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먹고 살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아?” 라는 말에 임정 인사 어느 누구도 대꾸 할 생각을 못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돈의 이전투구와 온갖 추접한 일이 벌어졌고, 마약까지 팔았다.
모스크바3상회의에 5년간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는 1945.12.28. 김구의 사저에서 임정 인사들을 모여 국무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구는 신탁통치 거부 및 미군정으로부터 즉시 권력을 이양 받아 임시정부가 집권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입국 전부터 김구는 임정인사들과 귀국 후 임정이 집권한다는 결의를 하고 입국하였고미, 이를 재차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귀국한 김구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미군정청에 대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자신을 비롯한 조소항, 김원봉 등 임정 인사 9명을 선발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한다.
다음날 김구는 임정 인사들에게 “이번 기회에 일치단결하여 나라를 찾자”며 조직보강에 들어가며 또 다시 결의를 다진다. 국민과 미군정청에 신탁통지를 전면 거부하고 새로운 정부가 세워졌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미군정청에 “임정의 주권행사”를 위한 권력을 이양을 요구하기로 결의 한다.
“우리 임시정부에 즉각적인 주권행사를 간망(懇望)할 것”
자리에 동석한 국내파 송진우는 김구의 미군정으로부터의 급진적인 권력 및 주권 이양 주장에 반대하며 신중할 것을 호소하며 제지에 나섰다.
“미국은 여론국가이므로 우리가 국민운동으로 의사 표시를 하면 신탁통치안이 재고될 수도 있을 것, 미군정과 충돌하면 미국을 비롯한 민주진영 국가들과도 충돌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것, 이런 혼란이 일어나면 공산당만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것”
김구는 송진우의 호소와 제지에 흥분하여 송진우에게 호통치며 “찬탁자 매국노”로 몰아 붙였다.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
자리에 동석한 임정 인사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흥분하여 송진우를 몰아 붙였다.
“고하(古下, 송진우의 아호)는 찬탁하자는 말이요?”
송진우는 흥분한 임정 인사들을 향하여 냉정하게 해방 정국의 상황을 설명했다.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히 하자는 것이오. 미군정과 싸우면 그 뒷수습은 어쩌자는 것이오. 미국이 손을 떼면 소련 세상이 와도 좋다는 말이오? 미군이 최소한 2년쯤 더 소련을 막아줘야지요,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세상물정 모르고 임정의 권세에 기대어 흥분하고 있는 김구와 임정인사들에게 현실적으로 미국이 물러나면 북한을 점령한 소련이 물러나는 것이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미군정을 쫒아낼 힘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정세와 세상물정 모르는 청맹과니 임정 인사들에게 냉정한 송진우의 현실분석을 받아 들일 능력이 되지 못했다.
송진우는 새벽 4시에 귀가 하여 잠이 들은 사이 권총을 들고 난입한 한현우, 유근배등 청년 5명에게 암살을 당한다. 한현우는 검거 되어 재판에서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하고 끝내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김구와 다투고 불과 몇 시간 후에 암살을 당했고, 송진우와 김구의 극단적 대립 등 당시의 정황으로 많은 사람은 암살 배후를 김구로 보았다.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 조병옥, 미군정청 하지 등은 김구를 암살 배후로 보았다.
송진우가 암살 당한 날 김구는 김성수, 김두봉, 김무정 등 좌우익을 망라한 76명을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고, 미군정청에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 할 것과 미군정의 모든 행정권을 임시정부가 접수하겠다고 통고했다. 즉 남한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정청에 반란을 통고한 것이다. 임정의 이름으로 일선 경찰 서장을 소집한 신익희는 임시정부에 복종하며, 임시정부의 통제에 따라 치안유지 및 질서유지를 행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낸다. 김구는 대중선동에 나섰고 순식간에 서울에 반탁운동이 번져 상가는 철시하고 음식점은 휴업에 들어가는 등 도시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하지 중장은 조병옥을 불러 임정요인을 중국으로 추방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
조병옥의 주선으로 하지 중장은 반도호텔로 김구를 불러 미군정청에 복종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한줌의 무력도 가지지 못한 김구는 하지 장군의 호통과 임정인사 전원을 중국으로 추방하겠다는 뜻에 즉각적으로 굴복하고 라디오를 통해 투쟁 철회를 방송했다.
해방정국을 읽을 능력도 없었고, 복잡다단하고 냉정한 국제질서를 판단할 능력도 없었으며, 해방 후 온갖 빨갱이들이 튀어나와 혼란한 그 시절 미군정 없이 질서 유지가 불가능 했다.
더욱이 김구는 휘하 물리력 하나 없는 친목회 수준의 임정능력으로 최강대국 주둔군을 협박하여 통치권을 이양 받겠다는 치기어린 사고가 김구의 지도력과 정치력의 바닥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요행이 미군이 물러가면 소련군은 무슨 수로 상대하겠다는 것인지 어린아이 수준의 김구 정치력에 조롱을 아니 할 수 없다. 한순간에 하지에게 제압 당한 김구는 지도력과 권위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송진우가 암살 당한 후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장덕수도 암살 당한다. 한국 민주당은 김성수, 윤치영, 김병로,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 등 국내파 독립운동가들이 창당한 정당이었다. 임정내에 단일정당으로 창당 된 한국독립당은 임정인사들이 환국한 후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한국독립당은 한국민주당, 조선국민당, 신한민족당 등과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만 합당에 실패한다.
김구는 임정법통에 따라 권력을 임정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방은 원자폭탄 두방이 해 준 것이지 임정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님은 그 시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임정이라는 특별한 기득권을 달라는 김구의 주장은 시간이 갈수록 독선이 되었다. 장덕수는 그런 임정의 한국독립당과 합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정적으로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할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문제를 두고 불참을 주장하는 한국독립당과 참가를 원하는 한국민주당의 입장 차이는 합당을 불가능하게 했다. 언제나 임정은 해방정국에서 분란의 폭탄을 안고 있었다.
대일본선전포고 후 스탈린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미국의 원자폭탄이 두려워 3.8 이남 점령을 포기한다. 그리고 3.8선을 국경선으로 만들고 봉쇄한다. 남북한 통신을 끊고, 모든 철도운행을 중단시켜 남북한을 단절시켜 북한에 단독공산정권수립 계획을 준비했다.
평양점령 직후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에게 시티코프가 전화를 하여 ”다음 달에 제88특별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평양에 보낼 테니 주택과 자동차, 생필품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레베데프는 ”일개 대위한데 무슨 특혜인지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푸카조프호를 타고 대위 김일성이 입국한 다음날 스탈린의 암호지령문이 극동전선 총사령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평양을 점령한 소련군 제25군 군사회의에 각각 날아왔다. 스탈린의 ”9.20 지령문“은 1993년 비밀 해제되어 공개 되었다.
1. 북한 영토안에 소비에트 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않으며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2.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
3. 붉은 군대는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결성을 원조할 것.
4. 북한 주민에게 붉은 군대가 진주한 목적은 일본침략자 분쇄이지 한국 영토 획득 목적이 아님을 설명할 것.
5. 북한의 사유재산 및 공공재산은 소련군당국의 보호아래 둔다는 점을 설명할 것.
6. 소련군은 기율을 지키고 주민의 감정을 해치지 말 것.
7. 북한 행정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수행할 것.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북한의 단독 공산정권 수립 지령을 받은 후 괴뢰정부 수립은 일사천리로 진행 된다. 불과 5개월만에 북한 전역을 통제할 수 있는 “북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8일 출범했다. 북한 전역을 공산세력이 통치할 수 있는 물리력 투사 기반이 마련 된 이때가 사실상 공산정권이 수립 된 것이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된 후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 건국을 결심한다. 사실상 북한의 단독 공산정권이 수립 되었음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건국을 선언한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 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 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단독정부 건국을 발표되자, 김구는 정면으로 맞선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
당시 이승만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국민 지지도와 선호도에서 김구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김구는 국내거주자는 다 친일파라는 오만과 임정법통론의 기득권을 등에 업으려다 스스로 고립은 심화 되고 있었다. 이동녕은 김구 보다 임시정부 수반을 더 많이 역임했고 이승만 또한 초대와 마지막 수반을 역임하는 등 임정에서 김구의 역할도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김구는 마치 임정이 자신인 것 처럼 떠들고 다녔다. 김구의 이러한 오만은 조선일보 인터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남북을 통합한 선거를 통하여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해야만 되며, 현재의 반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 정부를 하나 아니라 열 개를 만들어도 법적으로 조직이 안된 정부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할 수 없다. ([조선일보] 1948.7.2.)”
김구의 오만과 현실과 괴리 된 정치행보는 주변의 정치동지들이 하나 둘 떠나게 만들었다. 동고동락했던 임정 인사도 김구 곁을 떠나고 있었다. 정치적 위기감을 가지게 된 김구는 정치적 계산하에 정읍선언의 반대편에 섬으로서 반대 세력을 규합 하려 했다.
김구의 권력욕은 이승만과 정치적 거래로 드러난다. 이승만과 정읍선언에 합의 함으로서 존재감을 높이고 싶었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가 임정 인사를 모아 조직하여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비상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것에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 낸다. 김구는 정읍선언 반대 철회를 발표한다.
“과거 남조선 총선거를 군정수립이라 하여 다르다 하였으나 우리 민족이 전체통일 방향으로 나가는데 있어서는 다를 점이 없으며 이박사가 주장하는 바와 조금도 다를 점이 없으니 이길로 우리는 가야한다.
1947년 12월 2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건국에 김규식까지 가세하여 3자 합의가 되고 김구는 재차 정읍선언 동의를 확인했고 이것은 동아일보에 기사화까지 된다.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의 단독 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
우익3거두의 단독정부 건국 합의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을 때 1947년 12월 2일 장덕수는 자택에서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 초등학교 교사 배희범의 총격에 암살당한다. 미군정 경찰은 그들을 체포하였고, 수도청장 장택상은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한다. 김석황은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이며 임정 인사였다. 재판결과 박광옥과 배희범 김석황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석황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는다.
김석황은 수사과정에서 김구가 배후였음을 진술하고 있다.
“김구씨가 나에게 네가 장덕수씨를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지령은 김구씨가 1947년 9월 상순경 댁에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때에 김구씨와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1948년 3월 9일 동아일보 김석황 진술서”
재판 과정에서 암살범 박광옥과 배희범의 진술이 한결 같이 김구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져 김구는 재판정에서 증인심문을 받는다. 김구는 무죄가 되었지만 허정은 장덕수의 암살에 조소항을 찾아가 따졌다. 정관계 대부분의 유력자들은 수차례 백색테러와 드러난 정황과 증거에 따라 김구가 장덕수를 암살의 배후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김구는 법정에 서지 않도록 이승만에게 부탁하였으나 이를 거절한다. 이는 배후가 자신임을 이승만에게 고백한 꼴이 되었고 김구는 이승만과 결별은 결심했고, 이승만도 김구와 결별을 결심한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가 김구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정치적 동지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임정 인사 중 거물급 인사인 이범석, 이청천이 탈당하여 이승만 진영으로 가고, 신익희도 탈당한다.
김구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하게 내리막을 타면서 심각한 정치생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김구는 또 다시 정치적 계산을 한다. 느닷없이 단독정부 건국 모든 합의를 깨고 반대에 나선다. 반전을 통해 정국을 시끄럽게 만들고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정치적 입지를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김구의 이러한 몽니는 결국 방북까지 하여 김일성까지 만나는 정치도박까지 단행하게 된다. 임정부터 김구를 따라다니며 보필했던 비서 장준하도 방북직전 김구 곁을 떠난다. 김구가 방북과 김일성을 만난 것은 추락한 정치적 위상을 어떻게든 복원하겠다는 권력욕의 몽니였다. 김구의 몽니가 걱정 된 유엔위원단의 중국대표 유어만 공사는 김구의 사저를 찾는다.
유엔위원단의 중국대표 유어만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친분이 깊었으며 장개석 정부에 임정지원을 적극 권장한 인물로서 김구 가족과 친하게 지낸 인물이다. 미군정에도 임정지원을 권장했던 그는 뒷날 백범 아들 김신이 대한민국의 주대만대사가 되자 자주 어울리기도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유어만은 이승만과 협력하여 남한의 단독정부 건국에 도와 달라는 부탁을 위해 찾은 것이다.
“이승만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박사와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립하는 데 함께 협조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니까요. 중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집안 형제들이 다툴 수는 있지만 타인들의 비방을 자초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선생의 아드님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하기에, 저의 말이 거슬리더라도 아들이 아버지께 진심으로 올리는 말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지만, 그러면 부디 그렇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는 정치적 적수로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김구는 유어만의 부탁을 끝내 거절 하며 방북이유와 방북하여 북에서 느낀 소련의 사주를 받아 김일성이 남침할 것을 알려준다.
“내가 남북지도자회의에 참석한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직접 알아보려는 것이었소. 북한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하고, 그 사이 남한이 무슨 노력을 해본다 하더라도 북한군의 현재 수준에 필적할 군대를 육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김구가 유어만에게 알려 준 ”러시아 사람들이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시키는데 써먹을 것과 단시간에 정부를 수립하여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을 김구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의 위험성을 남한에 알리지 않은 것은 심각한 반역이 된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쟁을 묵인 또는 용인 한 것 하나만으로도 김구는 역사에서 용서 받을 수 없다.
김구의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윤색한 것으로 학계는 받아 들이고 있다. 이광수의 처남 이영근이 김구의 사저를 드나 들었고, 백범일지의 초간본 문장은 김구로서 구사할 수 없는 문장이며, 초간본의 문장은 전형적인 춘원 이광수 글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백범일지를 대표하는 “나의 소원”은 춘원 이광수의 창작물이라는 것은 이견이 없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분명한 오류가 드러나고 있다.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 약재상 쓰치다를 살해하고 국모를 시해한 국사범을 복수를 위해 죽였다고 둔갑 된 기록 “치하포 살인사건”은 당황스런 수준의 왜곡 또는 날조이다. 고종이 김구의 구명을 위해 전화를 하였다는 것도 그 시기는 전화가 놓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김구의 차남인 김신은 아버지가 백범일지의 윤색을 왜 이광수에게 맡겼는지 모르겠다고 증언까지 하고 있다. 초간본 발행 후 지금까지 백여 명이 백범일지를 고쳐 쓰며 김구 우상화에 내용도 많이 고쳐졌을 것이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한일합방 후 일제의 연출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家)에 사과했다. 이에 분노한 김구는 상해에 있는 안준생을 암살해달라고 중국경찰에 부탁했으나 거절당한다. 안준생을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다. 여하튼 안준생의 공과를 떠나 경찰에게 암살을 요청하는 수준이 김구의 인성과 수준이다. 수 많은 백색테러에 얽혀 있는 김구이고, 김구의 임정시절에도 임정의 무분별한 동족에 대한 암살은 차고 넘친다.
김구가 귀국 후 정치활동을 하며 남긴 언행을 보면 선명하게 나라 경영의 철학, 국가관, 미래관, 역사관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로지 정적과의 투쟁, 몽니, 과격한 언행만 보일 뿐이다. 그의 용인술 또한 형편 없다. 김구와 같이 귀국한 임정 인사, 타국에서 동고동락하며 피를 나눈 형제와 다름없는 그들대부분이 김구 곁을 떠났다.
국가 경영은 임정과는 다른 문제이다. 소규모 집단 영수와 한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도자는 다른 것이다. 국가경영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김구의 실패는 당연한 것이었다. 임정의 상징성에 기대어 기득권만 찾으려 한 역량과 지도력은 이내 바닥을 드러낸 것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의 라이벌로 김구를 들먹이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학식과 비전, 지도력과 정치력, 국가 운영 능력에서 김구는 이승만과 비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제헌 국회에서 선출한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출석의원 198명 중 197명이 출석해(투표율 99%) 이승만이 92.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를 얻었다.
어쩌다 좌파의 국부 이승만 죽이기의 대항마가 김구가 되어 현실에 부활하여 과분한 칭찬을 받고 있지만 김구의 실패는 처음부터 정해진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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