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버림 받고 스크랜튼 대부인에게 맡겨진 여메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이 땅의 강인한 여인이 된다. 그녀의 삶 속에 자신을 버린 부모와 억압한 봉건사회에 대한 증오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감리교 청년단체인 엡윗청년회의 여성지회인 조이스회(Joyce Chapter)가 창설 되자 여메례는 부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근대사에서 최초로 조직 된 여성단체이다. 여메례는 조이스회 활동에 그치지 않고 정동교회 여성들을 모아 보호여회를 만들었다.
정동교회에서 빈한한 자를 돕기 위한 구제사업으로 시작 된 보호여회의 여메례는 “회우 수효가 여러 만 명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하였다. 조이스회와 보호여회는 감리교 여전도회가 되어 현재는 20만명이 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여메례는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녀는 학생 자치조직인 “러빙 소사이어티’(Loving Society)”를 조직하여 신앙훈련을 통해 사랑과 여자로서 피동적인 삶이 아닌 주도적 삶을 살도록 자치와 규율, 기강, 자기훈련을 가르쳤다.
여메례는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간호사, 통역사, 교사, 교감, 교수, 전도부인, 여성계몽가, 여성 사역자의 소임을 감당하며 끊임없는 노력과 절제의 삶을 살았다. 두 번 남편과 사별하고 성을 세 번이나 바꾸었으며, 일본에 건너가 교육기관을 사찰하고,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어전 통역관으로도 활약했다. 봉건사회 속에 살아야 하는 여자로서 편견과 차별과 싸웠다.
여메례가 상동교의 성경반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학생 중 고종의 후궁 엄비 사촌동생 엄준원의 딸이 있었다. 엄비는 근대식 여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엄준원의 소개로 엄비와 만나 진명여학교를 세우게 된다. 교장은 엄준원이 되었지만 여메례는 학감(교감)이 되어 실질적인 학교운영을 하였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진명여학교에서 쫒겨난 여메례는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영어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쳤다.
국부 이승만과 같이 배재학당에서 협성회를 이끈 양홍묵과 결혼한 여메례는 관료였던 남편을 따라 청원군 부강에 정착하였다. 그곳에 교회가 없어 집에서 마을사람을 모아 가정예배를 드리다 선교사 킬보른을 만나 부강성결교회를 세웠다.
결혼과 동시에 소박을 맞고 친정으로 쫒겨난 이경숙은 얼마 후 아버지의 죽음과 가세가 기울게 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로 올라와 머리를 밀고 중이 된 그녀는 친구의 남편의 소개로 스크랜튼 대부인을 만나 수양딸이 되어 이화학당에서 음식과 바느질 등 등을 하며 스크랜튼 대부인을 도왔다. 즈음하여 서양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유괴해서 잡아 먹는 다는 괴소문이 장안에 떠돌아 소동이 났고 이화학당도 시끄럽게 되었다.
이때 이경숙이 나서 학부모를 이화학당에 직접 데려와 선교사의 집과 학당 내부를 공개하여 보여주며 안심을 시켰다. 이경숙의 노력으로 외국인에 대한 선입감을 해소되어 6명에 불과한 학생이 80명으로 늘었다. 한문을 깨우친 이경숙은 우리나라 최초 한국인 여자 교사가 되어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경숙은 세례를 받고 드루실라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이경숙은 병을 얻어 신병차 귀국한 스크랜튼 대부인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세운 전도부인 양성소에서 전도부인을 양성했다. 이경숙은 스크랜튼 대부인이 소천할 때까지 생을 같이하며 사역을 도왔고 남대문 시장에 스크랜튼 모자와 같이 달성교회(현상동교회)를 세웠다.
불교는 나의 모태신앙이었다. 신앙생활의 일환으로 또는 구경거리 삼아 많은 사찰을 다녔다. 사찰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령 그림이 있는 산신각은 꼭 있었고, 칠성각은 없는 곳도 있었던 것 같다. 몽골리아 벨트에서 숭상 되어지고 있는 샤머니즘의 뿌리가 산신각이 되었고, 칠성각은 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찰 하나에 부처와 산신령, 옥황상제, 삼신할미 등 온갖 신들이 사이 좋게 어울려 산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지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복합종교, 융합종교, 짬뽕종교.......
민비의 권세를 믿고 한시대를 풍미한 진령군의 세도는 하늘을 찔렀다. 민가에서는 “어젯밤 진령군이 창덕궁에서 한 말이 다음날 아침에 어명으로 내려 온다” 라고 수근 거렸다.
그런 진령군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사간원 안효제가 있었다. 대노한 고종은 그를 귀양을 보냈다. 상소문에는 진령군의 푸닥거리 즉, 복합종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나온다.
“겉은 마치 잡신을 모신 사당이나 성황당 같은데, 부처를 위해 둔 제단에서 무당의 염불 소리는 거의 없는 날이 없고, 걸핏하면 수만금의 재정을 소비하여 대궐 안에서의 재계(齋戒)와 제사와 관련한 일들을 마치 불교행사를 하듯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리학이라는 변종이 생기면서 도교와 불교의 제사를 도입 한 것이 송나라때이다. 유자의 나라 조선에서 입으로는 미신을 배격한다면서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궁궐에는 소격서를 두고 점을 치고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미신을 숭상한 것은 성리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국가는 무당에게 세금을 걷어 재정을 충당했다. 무당은 백성을 현혹하고 국가는 무당의 등을 쳐서 돈을 버는 존재의 대사슬이었다. 당시 무당에게 세금을 걷어 들인 장부도 체계적으로 만들어 관리했다,
“대전(大典)에 ‘무녀(巫女)․무사(巫師)․경사(經師) 등에게 모두 신공(身貢)을 거두도록 한다.’고 실렸는데, 지금 제용감 공안(濟用監貢案)을 상고하니, 아무 고을에 물목(物目) 얼마씩 일정한 공물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망[物故]하거나 추가하여 나타나더라도 공안(貢案) 을 고치지 않는 것은 미편(未便)하니, 청컨대 이제부터 매 3년마다 관찰사(觀察使)가 차사원 (差使員)을 정하여 추쇄(推刷)하여 사망하거나 추가하여 나타난 자를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호조(戶曹)․제용감(濟用監)․관찰사영(觀察使營)과 그 고을에 각각 1벌씩 비치(備置)하여 빙고(憑考)해서 신공(身貢)을 거두게 하소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얼마나 미신에 미쳐 있었는지 실상을 남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경운궁의 문을 수비하였다. 이때 요술(妖術)을 가지고 고종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혹 구름을 타고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만리 길을 가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진영(陳營)을 굽어본다고도 하고, 혹은 비와 돌을 마음대로 떨어뜨리게 하여, 만일 적들이 국경을 침범할 때는 비와 돌로 그들을 섬멸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요망스럽고 허황된 것이 모두 이따위 것들이었다. 민영환이 참정이 되어서 누차 그들을 엄히 묻기를 간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금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끝내 금하게 할 수는 없었다.”
윤치호의 영문 일기에도 고종의 미신숭상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6일(금요일) 화창한 날씨. 거의 하루 종일 한세진의 집에서 지냈다. 한세진 씨는 전하(고종)의 어리석은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ʻʻ몇 년 전 무당들이 궁궐에서 득세할 때, 전하께서 무당 앞에 꿇어 엎드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무당들은 저세상의 영혼들과 영매(靈媒)로서 행세했는데, 어느 날 밤 무당이 전하 머리 위에 참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춤을 추다가 ʻ나는 태조 대왕이다! 네가 누구 때문에 위대해졌고, 왕실 재산을 갖게 되었느냐?ʼ고 소리쳤습니다. 전하께서는 마치 그 무당이 태조대왕이신 양 그 앞에서 허리를 굽혀 빌었고, 상궁에게 태조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아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무당은 태조의 영혼이 원한다면서 기도와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제물이란 그 무당에게 바치는 돈과 비단이었지요.’”
백성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 민비는 한강 붕어에게까지 쌀밥을 먹이며 굿을 했고, 고종과 민비가 굿판을 벌리느라 천문학적인 국고를 탕진하게 되면서 왕실 재정 관리를 하는 내수사에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왕과 왕비가 나서 매관매직을 하고, 금광과 철도부설권 등 국익을 열강에 팔았다.
인구가 20만도 되지 않는 한양에 무당만 수천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있다. 그 시대 정확한 통계를 산출 할 수 없었겠지만 조선을 여행한 이사벨라 비솝여사는 조선에서는 귀신을 위해 매년 250만 달러를 허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896년 조선의 총 수출액이 473만달러, 수입액이 654만 달러였다.
황해도 곡산에서 살다 남편이 일찍 죽고 생계가 끊긴 백씨부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상경했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기 위하여 여름 거리를 배회하다 상동교회 자리에서 창문을 열고 외국인 여자가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된다. 창문 넘어 들려오는 가르침과 성경구절에 넋을 잃은 백씨부인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듣게 되었고 그것을 알게 된 스크랜튼 대부인은 백씨 부인에게 성경책을 한권 주었다.
몇 날 밤을 세워 성경책을 읽은 백씨부인은 스크랜튼 대부인을 다시 찾아가 그리스도인 되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백씨부인을 3년 동안 전도부인으로 교육시켰다. 백씨부인은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졌다.
스크랜튼 대부인의 여성 선교에 대한 열망은 서울에 한정하지 않고 그 영역을 넓혔다. 여성 선교의 확대를 위하여 인천에 존스, 평양에 홀, 원산에 맥길을 각각 개척선교사로 파송한다. 인천은 마침 이화학당 교사였던 벤겔이 존스와 결혼하면서 그들을 선교의 관문이자 남북을 잇는 뱃길의 교차로인 인천으로 보낸다. 스크랜튼 대부인에게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받은 백헬렌을 존스 선교사 부부와 같이 전도부인이 되어 인천으로 파송 된다.
인천에 전도부인으로 간 백헬렌은 당장 생계가 걱정이었다. 백헬렌은 전도와 생계를 같이 할 수 있는 방물장수가 되어 여자들이 써야 하는 바늘과, 화장품, 머리빗 등을 팔러 다니며 전도를 시작한다. 초기 6개월에만 400여 가정을 방문하며 전도를 하며 존스 선교사 부부의 사역을 돕는다.
방물장수가 된 백헬렌은 아침부터 여자는 재수 없다는 박대를 받았다. 보따리가 집어 던져지고, 대문 밖으로 쫒겨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백헬렌은 포기하지 않고 전도를 다녔다, 집 밖이 궁금한 여자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하며 안방의 여자들을 파고 들었다.
그 당시에는 많은 미신들이 있었다. 남편의 불륜과 억압을 피하기 위하여, 대소사의 택일을 위하여, 병이 들면 무당을 찾아가 점을 치고 굿을 하고 돈과 재물을 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안방으로 파고 들은 백헬렌은 여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어주고, 성경책을 보급하며 모든 것들이 미신임을 깨우치는데 최선을 다했다.
백헬렌의 몸을 사리지 않는 전도는 이 땅 최초의 여성박사 1호인 김활란 여사의 집안에도 복음을 전해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 된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강세실리아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전도부인이 되어 백헬렌과 인천에 왔다. 백헬렌의 활약으로 많은 여성들을 강세실리아에게 보내져 한글과 성경을 배우게 하였다.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삶을 보다 안락하게, 풍요롭게 해달라고 비는 미신은 내세가 없다. 오로지 당장에 닥친 고통과 억압을 위해 무당에게 빌었고 돈을 바쳤다. 억압에 짓눌리며 현실만을 위한 미신으로 생을 이어가는 여자들에게 내세의 삶이 있는 기독교의 세계관은 많은 여성을 미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했다.
벤겔 선교사는 인천에 여자를 위하여 영화학교를 세운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였고, 그 초등학교가 여자 초등학교이다. 초등학교 운영에 있어 백헬렌과 강세실리아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억압의 굴레 속에 피동적 삶을 살아야 하는 조선 여자의 선교에 주력했던 스크랜튼 대부인은 이름조차 없는 여인에게 헬렌, 메례, 세실리아, 드루실라, 에스더와 같은 이름을 주며 정체성을 심어 주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여 삶의 주인이 되는 자립심을 가르쳤다. 억압했던 사회에 대한 반목과 대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헌신과 봉사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열어 주었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