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이용하려 정승화 총장과 와 김정섭 차장을 궁정동으로 유인한다. 그 중 김정섭은 1979.11.18.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재규의 YH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진술을 하게 된다.
“1979.8.9. 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내 문제를 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메트레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 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김영삼 제명 사태까지 불러왔던 YH사건을 불러 온 것은 김재규의 무모한 강제진압이었음을 진술한 것이다.
아울러 김정섭은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 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라며 매우 강경한 시국대처 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며 김재규의 요청을 거절했고 사태가 확대되지 않게 차분한 정국수습을 주문했다.
이러한 김정섭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김계원 비서실장의 증언이 1979년 8월 10일 계엄군법회에서 나온다. 김계원은 “...중략 ...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라고 증언하여 김정섭의 증언이 틀림 없었음을 확인한다.
김정섭 증언의 확실함을 보충하는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의 회고도 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때 구자춘 내무장관과 신현확 보사부 장관의 대처방안은 경찰은 외곽경비만 하고 시간을 가지고 대화로써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김재규 정보부장이 두 소관장관과 상의도 없이 야밤에 치안본부장에게 직접 강제해산을 명령함으로써 투신자살의 불상사가 발생, 민심에 일대 충격을 주었을 뿐아니라 국내 정국을 극한적 경색상태로 몰아넣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그 후 시국대책회의에서도 가끔 박 대통령으로부터 ‘강경조치만 쓰면 시국이 조용해지느냐’ 하고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한 김재규가 박 대통령 시해사건 공판에서 는 마치 민주인사처럼 언행을 할 줄은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을 넘어선 보다 강력한 칼을 달라고 졸랐고, YH사건도 독단적으로 강경일변도로 사태를 악화시켰던 장본인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런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며 시종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또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며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며 과대망상에 빠졌었다.
김재규의 거짓 광기는 박대통령을 오열속에 추모하는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감재규 어머니도 "이유 불문코 임금님을 죽인 벌을 받으라" 했고 사형집행후 시신수습부터 장례까지 온전히 진행된 것이 없었다. 국부 시해범 김재규. 이런 천하의 역적을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업적 지우기의 시작점으로 민주화 인사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좌파가 제 아무리 노력한들 박정희라는 현대사의 거대한 산맥을 넘을 수 없다는 열등감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MB정권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마타도어식 모략과 음해는 물론 친일,남로당배신,엽기행각 등 흑색선전으로 일관해 왔다. 박정희를 덮기 위해서는 그를 시해한 김재규를 혁명가로 추켜세워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최근들어 좌경화된 언론을 통해 김재규의 정당성을 끼어 맞춰가며 “민주화 의사 김재규 장군” 으로의 가공과 포장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김재규는 재판 중에 자신의 명령에 따른 부하의 관대한 선처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가 민주화를 위해 거사를 하고자 했다면 단독으로 대통령을 시해하고 자신은 현장에서 자살을 했어야 옳다. 즉흥적 충동을 억제치 못하고 우발적 반란을 일으켜, 죄 없는 자신의 부하만 사지로 몰아 넣은 것이다. 설녕 반역의 절대성공을 위해 충직한 부하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해도 시해 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거짓과 꼼수를 부릴 일이 아니었다.
김재규가 진정 독재자 제거가 단 하나의 목표였다면 궁정동 그자리에서 곧 바로 "나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며 만세를 불러야 마땅했다. 이를 전제한다면 재판 과정에서 '시해 후 치밀한 계획은 전혀 없었다'는 그의 강변을 십분 이해 한다쳐도 차지철로 인한 도발적 시해 후 스스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재판기간 내내 민주화 운운하며 치졸한 변명에 급급한 것에서 총질 후 '생각의 변화'가 곧 거짓으로 진화되어 갔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혁명을 하고자 준비 했다면 그처럼 허술하게 대통령을 시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장난 총에다, 몸에 묻은 피조차 닦지 않고, 맨발로 귀신에 홀린 몽유병 환자처럼 허둥지둥 정승화에게 달려 갔다는 것은 사후 대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역시 감정에 치우친 도발적 범행 후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 잔꾀를 부린것에 불과한 것이다.
촛불방패와 떼법을 앞세워 목소리 크게 우겨대면 통하는 세상이요, 개나 소나 간첩이나 살인자나 모조리 민주화 인사가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점철된 도발적 반역자이자 국부 시해범에, 부하들까지 줄초상 치게 만든 어리석기 짝이없는 者까지 민주화 인사로 추대한다면 앞서 추대된 '개나 소나' 민주화 인사들의 권위가 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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