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님이 아끼시던 그분은 무엇을 보았나 ?
이대용은 1975년 월남 패망 시 주월한국대사관 공사로서 교민 구출에 최선을 다하다 월맹군에 포로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용을 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유태인 아이젠버그의 주선 등으로 이대용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시절 교섭이 진행되어 최규하 대통령 때 조국에 돌아왔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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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베트콩의 사주를 받아 연일 이어지는 시민단체.종교단체의 극성스러운 데모로 정국은 어두워져만 갔다.
민족주의자와 평화주의자로 위장한 좌익 프락치들은 국가권력과의 핵심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를 점령했으며 수 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국론을 분열하고 여론을 호도하면서 월남의 좌경화에 앞장섰다.
1975년 9월은 월남의 대통령선거 예정일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입후보자간의 흑색선전과 각기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지지자들 간의 대립과 갈등, 분열과 반목은 최고조에 달했다. 월맹군은 이 혼란스런 틈을 놓치지 않았다. 1975년 1월8일 18개 사단 전병력을 총 동원하여 월남침략을 감행하였다.
세계4위를 자랑하던 월남의 공군력과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58만의 막강한 군사력도 결속된 월맹군의 정신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해 4월30일 정오 월남의 심장부인 독립궁이 월맹군 수중에 떨어졌으며 자유 월남은 세계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월맹군이 휴전협정을 파기하고 자유월남에 대한 침략을 감행할 시 즉각 전쟁에 개입하여 월남과 함께 월맹군을 격퇴시키겠다던 미국은 끝내 오지 않았다.*****
월남은 최신식 무기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저들의 선전선동에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월남은 힘에 의해 패망한 것이 아니라 간첩들의 치밀한 와해공작, 자유진영의 분열, 국민들의 안보의식 결여, 지도층의 부정부패에 의해 스스로 자멸한 것이다.
월남 패망 후 곳곳에서 암약했던 간첩들의 정체가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경악을 하고 뒤 늦은 후휘로 가슴을 쳤지만 자유 월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티우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간첩이었으며 야당지도자 쭝딘쭈와 가장 모범적인 도지사로 명망이 높던 녹타오를 비롯한 많은 핵심인사들이 국가권력기관의 중추를 장악한 거물급 간첩들이었다. 또한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 종교지도자들이 평화와 민족주의로 위장한 간첩들의 선전선동에 휘둘려 사회 혼란을 부추겼으며 월남의 패망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대용공사 월남 패망사에서 인용)
월남 패망 후 1000만 명 가까이 처형을 당했고 106만 명이 바다를 이용해 주변국으로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1000만 명의 처형 대상자 중에는 자유 월남을 지키려던 애국세력은 물론이고, 선전선동으로 월남의 분열에 앞장섰던 좌익 프락치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한번 배신한 자는 또 다시 배신 한다' 는 것이 처형 이유였다.
▲ 1975년 4월 사이공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하는 미군 헬기에 오르려는 사람들
미래한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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