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탄생은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기적의 역사이다. 적화와 공산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릴리어스 언더우드 여사가 말한 “작정하고 하나님이 이 나라를 돕고 있다” 라는 말을 늘 생각하게 되는 건국과 산업화의 시대는 기적과 기적의 역사였다.
대한민국의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세가지 기적이 없었다면 즉, 박헌영의 월북, 좌우합작의 무력화, UN의 한반도 단독 정부 승인은 해방정국의 가장 극적인 기적이었다. 결단코 인간의 의지로 만들 수 없는 세가지 기적에 감사할 따름이다.
해방정국 가장 큰 세력과 대중적 지지를 얻은 것은 박헌영이었다. 당원만 100만에 이르는 남로당, 국민 절대다수의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 미군정이 나서 좌우합작을 권하고 있었던 그 시대는 공산당 독버섯이 만개할 수 있는 완벽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었다.
만일 박헌영이 제도권 내 합법적으로 진출하여 제도권 투쟁을 통한 혼란과 적화를 시도하였다면 패배 하거나, 쉽지 않은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박헌영은 위조지폐를 만들다 적발 된 정판사 사건 등으로 인해 범죄자가 되어 미군정에 쫒기게 되면서 월북 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박헌영이 월북하여 사령탑이 없었음에도 총파업과 대구폭동, 4.3 폭동이 일어난다. 그만큼 남한 사회의 빨갱이 뿌리는 깊었고 남로당의 저변은 넓었다.
사회에 거악으로 자리잡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국부 이승만은 끊임없이 경고했다.
“당신의 동생일지라도 공산주의의 훈련을 과학적으로 받은 뒤에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다. 그 동생은 따라서 소련을 자기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국가 공업을 파괴하며, 당신의 정부를 뒤엎고 당신의 동포를 넘겨준다. 그러면 드디어는 당신의 나라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엔 당신의 동생은 집 없는 거지가 되고, 가족은 노예가 되며, 그 뒤에는 이것을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박헌영은 머리가 명석하고 인내력과 화술, 술수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제 시대 감옥에 갇혀 6개월 동안 자신이 싼 똥을 먹어가며 미친척을 하여 석방 된 사람이다. 6.25 사변을 일으키기 위하여 스탈린을 충동한 것은 김일성 보다 적극적이었으며, 전쟁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모택동을 만나는 것에 김일성 보다 적극적이었다.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이 독립운동 훈장까지 수여한 미쳐버린 시대에 박헌영과 주세죽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박헌영은 부인 주세죽과 모스크바에 망명 중 김단야가 찾아와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한다. 친구이며 혁명 동지인 김단야는 한지붕 아래 살면서 주세죽과 불륜에 빠지고 아이까지 낳는다. 그 아이는 얼마 되지 않아 죽는다. 이러한 사실은 승녀가 된 박헌영의 친아들이 증언하고 있다.
한지붕 아래 동거를 하던 중 박헌영이 상해로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연락이 끊기게 되고 주세죽과 김단야는 불륜관계를 끝내고 결혼을 한다. 당시 김단야 또한 아내 고명자와 소식이 끊겨 있었지만 혼인관계가 청산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운명은 잔인했다.
박헌영은 6.25 사변 후 김일성의 숙청과정에서 미제스파이로 처형을 당한다. 김단야는 공산당 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쫒겨 모스크바로 도망 간 것인데 공산당은 일본간첩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형한다. 주세죽도 김단야의 간첩 혐의에 연루되어 유배형을 받고 카자흐스탄 협동농장 등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사망한다.
공산화가 되는 길은 세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외부지원 없이 자생적 빨갱이들이 어리석은 대중들을 선동하여 공산혁명을 일으킨 중국, 베트남 등 유교국가 공산화와 쿠바 공산화 등이 해당된다. 유교는 공산주의와 한치의 오차 없이 닮아 있고, 북괴 빨갱이를 유교 빨갱이라 부르는 이유라 하겠다.
두 번째는 좌우합작을 통한 공산화이다. 처음에는 중도세력을 포섭하여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며 끌어 들이고 우파와 좌우합작을 하여 소련과 내통하고 지원을 받아 살인, 납치, 협박, 독재 등으로 우파파괴 공작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한 동유럽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소련이 탱크로 밀고 들어가 괴뢰정권을 세워 공산화가 되는 경우이다. 몽골과 동독, 북한이 이에 해당된다.
해방정국 때 남로당이 드러 내놓고 폭동과 파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공산사회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9월 총파업, 10월 폭동, 제주4.3폭동 등 대중이 동원 된 전형적인 빨갱이 폭동이 늘 일어났다. 그리고 동유럽이 걸었던 좌우합작의 동유럽식 공산화의 위협에도 시달려야 했다.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의 중도파가 중심이 되어 좌우합작을 선동하고 다녔다.
김규식과 안재홍은 서울 수복 후 패퇴하는 괴뢰군에 납북당한 후 납북 길에 김규식은 사망하고 안재홍 또한 귀환하지 못하고 북한에서 사망한다. 여운형 또한 한지근이라는 청년에게 암살을 당한다. 당시 한지근 단독범행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한지근이 6.25 중 납북 되어 진상은 묻혔다.
그러나 1974년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혀 세상에 알려진다. 암살범들은 암살 전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의 집에서 공부하였음을 실토 했다. 김구는 송진우의 암살 배후 의혹을 수없이 받았다. 좌우합작의 망령은 김구와 김규식으로 옮겨져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와 미소양군의 철수, 김일성의 계략에 빠진 남북협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좌우합작의 연장선이었다.
미군정까지 좌우합작을 지원하며 한반도는 절대절명의 공산화의 길을 가고 있었다. 급기야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탄압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하느니 차라리 시골에서 닭을 키우겠다고 맞섰다.
“동부유럽 여러 나라들처럼 코리아도 좌우합작 방식을 수락하도록 국무성이 끊임없는 압력을 가한다. 연립정부 안을 수락하라는 것은 코리아를 공산주의에 내맡기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온 생애를 일본지배 반대투쟁에 바쳤는데 이제 소련의 지배를 찬성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칠 수는 없다. 아내와 나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코리아를 팔아넘기느니 나는 차라리 아이오와주의 조그만 양계장으로 은퇴하겠다”
1945년 나치 패망 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인사들이 복귀하여 정부를 수립 했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며 소련의 영향권이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과 망명 정부에서 대통령을 맡았던 독립운동가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명성에 힘입어 새로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4개의 자유주의 정당과 4개의 사회주의 정당을 모아 좌우합작을 통한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당시 사회주의를 표방한 공산세력은 38%의 득표를 얻어 열세에 있었지만 좌우합작을 통한 제도권으로 들어가 경찰 내 우익세력을 숙청하고 경찰과 군대를 장악하여 1948년 쿠테타를 일으켰다.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쫒겨났다.
독립운동가 후광을 입은 김구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에드바르트 베네시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헝가리가 나치와 싸우는 동안 공산세력은 경찰과 보안군을 장악한다, 치안권과 군사권을 장악한 공산당은 공장 위원회, 청년동맹 등 공산당 전위조직을 조직하여 세력을 넓혀 공산당이 원내 1당이 된다. 원내 1당이 된 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당을 이간시켜 와해시키거나 흡수하여 공산국가를 세운다,
동유럽의 공산화는 대부분 열세에 놓인 공산당이 좌우합작을 통해 소련의 지원을 업고 쿠테타, 암살, 모함 등을 통해 공산독재국가가 세워졌다.
해방정국에 벌어졌던 온갖 혼란과 좌우합작은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과 과정이 데자뷰 하고 있다. 국민 80%는 공산주의 국가를 원하고, 낭만스럽게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미군정까지 부화뇌동하여 이승만을 강금하기도 하였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축출 계획을 세운다.
당시 수도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은 존 하지가 자신을 찾아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이승만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면 안되겠냐고 요구했으나 자신이 사표를 내밀자 화를 내며 방을 나갔다 라고 회고 하고 있다.
좌우합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소련과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을 포섭하여 좌우합작을 하자며 “남북협상”을 제안한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원과 지원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프린스턴 대학원까지 졸업한 재원이었음에도 국제정세와 소련과 김일성의 검은 속내를 전혀 읽지 못했다.
중국 공산화의 결정적인 원인은 국공합작이다. 좌우합작으로 한줌도 되지 못하는 모택동에게 쫒겨난 장제스가 이승만의 혜안을 닮았다면 대만으로 쫒겨가는 치욕은 없었을 것이며, 중공 치하 8천만명이 죽어가는 재앙도 없었을 것이다.
동유럽의 공산화나 국공합작이 아니더라도 당장 임정에서 공산세력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임정은 유명무실한 조직이 된다, 박용만, 신채호, 문창범 등의 창조파와 여운형, 이동휘 등의 개조파는 좌익계열이었고 임정의 유지를 원하는 유지파의 김구와 이시영은 공산세력으로부터 헤게모니를 두고 심각한 공격을 받았다.
임정내 공산세력의 분란과 분탕으로 인해 임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소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공산세력은 임시정부에도 침투했고 이들은 임정에서 기생하며 엄청난 분란을 일으킨다. 결국 갈등이 깊어지며 공산세력은 임정을 폐하고 재조직하자는 창조파가와 임정을 완전히 뜯어고쳐 새롭게 출발하자는 재건파, 그리고 임정을 그대로 유자해야 한다는 유지파로 갈려 죽자 사자 싸운다.
공산세력은 임정을 갈라놓기 위하여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소련으로부터 20만원을 지원 받아 개최 되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김구는 창조파의 행위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공산세력이 일으킨 내분으로 인하여 임정은 급격한 조직축소와 오랜 침체기에 빠진다. 사실상 임정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치명적 상황이 된다. 김구는 당시를 임정은 방세도 내지 못하는 조직으로 축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구는 임정이 공산세력으로 어떠한 공격과 공작을 펼쳤는지, 그리고 고난을 몸소 경험하고 남북협의 몽니를 부린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에 미군정까지 나서자 도쿄에 머물고 있는 군정장관 아처 러치 소장에게 전보를 보내 “하지 사령관이 좌우합작에 나서는 것을 막아 달라며 좌우합작은 국민만 분열시킬 것” 이라고 전보를 보냈다. 기독교계와 언론계 등의 인사를 모아 반공보수연대를 만들어 대항하였고, 미국의 정관계 인사에게 전보를 보내 하지의 잘못된 판단을 성토하여 압력을 넣어 줄 것을 부탁하는 등 고군분투하여 정읍선언을 지켜낸다.
좌우합작 문제는 미군정과 좌익, 우익, 국민까지 이승만의 적이었다. 그것을 극복한 이승만의 용기와 결단, 세계정세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좌우합작을 통한 적화의 길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 소련의 세계공산화 전략이 자발적 또는 협상을 통해 한반도에서 후퇴 됨으로서 한반도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 될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빨갱이가 아니면 정신병원 침대에 묶어 돌봐 주어야 할 사람이다.
소련은 연이어 개죄 된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킨다. 1947년 5월 2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두달 전 트루먼은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겠으며 공산주의와 정면대결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소련은 트루먼 독트린이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미국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 때 동유럽과 중국 등의 공산화는 7부 능선을 넘고 있었다.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한다. 유엔 총회는 소련의 불참 속에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을 결의했다. 호주 캐나다 등 7개국의 유엔대표가 선발 되었고, 선거를 감시할 한국임시위원단(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을 조직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의 UN 선거감시위원단 입국을 막았다. 호주와 캐나다는 재결의를 반대한다. UN은 진통 끝에 재결의 하여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 실시를 결정한다. 미국이 세계 패권국이 됨에 따라 영연방 국가들은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표결에 불참했다. UN 선거관리위원단 7개국도 의견이 엇갈리게 된다. 캐나다와 호주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나서 표결을 하게 된다. 그러나 7개국 중 4개국이 찬성하고 호주와 캐나다가 반대하고 1개국이 기권하여 가결 되어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 된다.
UN 임시위원회의 관리 감독하에 치루어진 단군 이래 처음으로 1947년 5월 10일 실시 된 총선거는 제헌국회를 세웠다.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을 확보하여 제1당이 되었고 국부 이승만은 제헌국회의 최연장자로서 임시의장이 되어 제헌의회 개회를 선언한다. 그리고 제헌의회는 1948년 7월 1일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으며, 7월 17일에는 건국헌법을 공포하였다.
국부가 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UN승인을 서두른다. 9월 UN승인을 위하여 장면을 대표로 하여 조병옥, 모윤숙 등 8명을 대표단을 구성하여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에 파견한다.
이승만의 UN 한반도의 단독정부 승인은 절묘한 신의 한수가 된다. UN이 승인한 합법적 정부가 남침을 당함으로서 신속한 UN군을 파병하는 명분을 확보했다. 선거감시단은 한반도에 남아 UN 한국 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on Korea UNCOK)로 조직이 개편되어 점령군 철수, 한반도의 통일을 촉구한다. UN 한국 위원회는 6.25 사변이 터지면서 진상조사를 하여 남침사실을 UN에 알렸다. 그 당시 국제적인 조사로 남침을 밝혔음에도 지금 북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병원 침대에 묶어 두고 약도 주고 잘 돌봐 주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호주,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의 견제가 심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영연방 국가를 리드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카토릭 신도이며 폭넓은 카톨릭의 국제인맥을 가진 장면을 적극 활용한다,
장면은 번 주교를 움직여 단독정부 승인에 반대하고 있는 영연방 국가의 리더국 캐나다를 움직인다. 카톨릭 신자인 캐나다 외무장관과 캐나다 안토니우스 대주교에 편지를 써서 단독정부를 국제적인 합법정부로 승인할 것을 요청한다.
“한국 정부는 유엔 위임을 받아 도덕적이고 전 세계를 대표하는 위원단의 활동으로 수립된 정부다. 또 한반도 인구 3분의 2에 해당하는 남한 인구 중 91% 유권자가 투표하고, 여성도 처음 참정권을 행사한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이므로 ‘거국정부’로 인정할 만하다
비오 12세 교황이 당시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훗날 성 바오로 6세 교황)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훗날 성 요한 23세)에게 한국 대표단을 적극 지원하도록 지시하여 미래교황까지 포함 된 3명의 교황은 전방위적인 압력과 로비를 하여 단독정부 승인의 긍적적인 여론을 형성한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승인을 위해 투트랙 작전을 썼다. 장면을 통한 로마교황청의 로비 이외 조병옥, 김준구를 통한 UN 가입국을 찾아 다니며 설득한다.
그러나 소련과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6개 국가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대한민국의 UN 승인을 막는다. 소련의 대표인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동유럽 위성국가를 규합하여 필리버스터 공작을 펴서 3개월 동안 안건 상정도 못하고 있었다.
총회 마지막 날인 12월 12일에도 비신스키를 비롯한 소련 위성국가 대표의 연속 발언에 의한 필리버스터가 준비되어 있었고 비신스키에 할당된 2시간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필리버스터가 폐회시간까지 이어지면 UN 승인은 불가능했다. 연설을 시작한지 15분만에 비신스키는 극심한 치통과 성대결절이 생겨 퇴장을 한다. 다음 연설을 이어가기로 한 위성국가 대표도 총회 자리에서 떠나 있어 필리버스터 공작이 실패로 돌아간다. 총회 폐막 몇시간을 남기고 찾아온 천재일우의 시간 이 틈에 안건이 상정돼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대한민국의 건국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
기적적인 안드레이 비신스키의 성대결절이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 대표단의 모윤숙 등 기독교인은 인근호텔에서 금식기도를 하며 대한민국을 살려 달라고 밤을 세워 기도 했다. 기도의 승리였다.
합법정부의 승인은 훗날 6.25 사변에 UN군이 파병되는 정당한 명분을 마련하여 주었다. 6.25 사변은 전세계 67개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당시 UN 가입국은 60개국에 불과했으나 공산국가를 제외한 52개국으로부터 군사, 식량, 물자, 의료 등 막대한 지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보우아사 우리나라 만만세가 된 것이다.
박헌영의 월북, 좌우합작의 결렬, 단독정부의 UN 승인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없었을 것이며 모두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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