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과로와 결핵이 겹쳐 사망한다. 죽음을 지켜 본 어린 셔우드 홀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게 있어서 에스더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에 봉 사할 수 있는 가장 황금기의 인생을 보내고 있던 에스더를 이 세상에서 앗아갔고 그녀가 사랑한 수 많은 동족들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올 것 과 결핵요양원을 세우기로 굳게 맹세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와 로제타 셔우드 홀 사이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교사로 조선으로 건너와 의료사역에 종사하는 부모님을 보며 성장기를 보낸 셔우드 홀은 환자를 치료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또한, 선교사역에 적극적이었던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을 따라 선교여행을 다녔고, 어머니는 자신이 조직한 여성모임에 셔우드 홀을 데리고 다녔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자신의 일기에 셔우드 홀에 대하여 적고 있다.
“어디서나 셔우드가 제일 큰 구경거리였다. 셔우드는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내가 결혼했고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곳 사람들과 친숙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아들인 셔우드 홀에 대한 희망도 남겼다.
“셔우드가 주위의 이교도 어린이들에게 빛을 전하는 작은 선교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사인 박에스더는 로제타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한 후 여의사가 되어 평양 등지에서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를 도와 의료사역을 하며 이국 땅에서 가족 없이 지내는 셔우드 홀과 각별하게 지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펜젤러를 도와 정동교회에서 잡무를 보던 김홍택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스크랜튼 대부인과 만나 이화학당에 입학한 김점동은 총명하여 4년만에 영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의 아들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설립하고 주로 가난하고 소외 된 하층민을 상대로 의료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남자의사에게 몸을 보여 줄 수 없다며 죽어가는 여자 환자를 안타까워 한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보구녀관이 세워지고 미감리교 해외 선교부에서 여의사 메타 하워드를 파송하여 보구녀관을 운영하였다. 몰려드는 환자로 인해 격무와 과로에 시달린 메타 하워드는 2년만에 병을 얻어 치료차 본국으로 돌아갔다.
메타 하워드 뒤를 이어 보구녀관에 온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가 부임하였다. 보구녀관의 여의사의 공백으로 조선에 건너오자 마자 진료를 시작하게 되면서 조선말을 배울 기회가 없는 로제타 셔우드 홀에게 김점동이 통역을 하게 되면서 두 여인이 만나게 된다.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일기에 김점동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진료소에서는 학교 여학생 중 하나인 점동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진료했다. 그녀는 통역을 곧 잘한다. 점동은 튼튼하고 건강한 열네살 소녀이며 영어도 잘 구사한다. 재빠르고 영리하며 훈련시키고 싶도록 탐나는 학생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오늘 저녁에 그녀 스스로 나를 도와 주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스크랜튼 대부인은 선교지 확장을 위해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를 평양으로 파송을 계획했다. 김점동은 남편 박유산을 만나 결혼을 하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박씨가 되었고 세례명과 합쳐 박에스더가 된다. 스크랜튼 대부인의 선교지 확장 계획에 따라 박에스더 부부는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와 같이 평양으로 가서 진료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평양은 청일전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전투에서 부상 당한 군인을 치료하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순교했다. 그 때가 셔우드 홀이 첫돌을 갓 보낸 때였고, 로제타 셔우드 홀은 딸 에디스 마가렛 홀을 임신하고 있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로제타 셔우드 홀은 출산 등을 위하여 1896년 일시 귀국길에 오르며 박에스더 부부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박에스더를 공립학교에 보내 의대를 의대 입학을 준비시켜 볼티모어 여성의대에 입학시켰다. 남편 박유산은 아내의 학비를 벌기 위하여 셔우드가(家)의 농장과 볼티모어 식당 등에서 일을 하며 아내의 공부를 도왔다. 그러나 박에스더가 의대를 졸업하기 전에 박유산은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박에스더는 남편의 죽음을 딛고 어렵게 학위와 의사자격을 취득한 박에스더는 귀국하여 보구녀관을 맡아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박에스더가 보구녀관을 맡아 의료사역을 하고 있을 때 로제타 셔우드 홀은 평양부인병원에서 의료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돕던 여의사 릴리안 해리스가 발진티푸스로 사망하면서 박에스더는 평양으로 건너가 로제타 셔우드 홀을 돕게 된다.
10년이 넘게 박에스더는 로제타 셔우드 홀과 평양부인병원에서 수천명이 넘는 몰려드는 환자를 진료하다 폐결핵과 과로, 영양실조와 신체의 허약으로 35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박에스더 부부는 모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조선은 영양실조와 불결한 위생상태로 인해 결핵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폐병으로 불린 폐결핵은 그 당시 5명 중 1명이 감염되어 있는 죽음의 불치병이었다.
현재 북한은 결핵으로 신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통일비용으로 결핵 퇴치를 위한 천문학적인 비용을 걱정하고 있다. 결핵은 전형적인 가난과 영양실조가 동반되는 후진국형 질병이다. 북한의 결핵은 세계에서 인구대비 결핵환자가 5번째라고 하지만 폐쇄 된 북한사회의 통계는 믿을 것이 되지 못하여 세계 최고 수준으로 짐작된다. 구한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북한이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조선에서 순교하며 셔우드 홀은 어머니와 조선에서 외롭게 살며 박에스더를 가족처럼 생각하며 많은 것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폐결핵 전문의가 될 것을 다짐한 셔우드 홀은 1923년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결핵요양소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셔우드 홀이 어릴 때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은 아들이 선교사가 되기를 소망했었다.
의학공부를 마치고 폐결핵 전문의가 된 셔우드 홀은 외과의사인 마리안 버텀리와 결혼했다. 그리고 부부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건너온 아들 부부를 보며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아들이 선교사가 되는 소망이 이루어 진 것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조선으로 돌아 온 셔우드 홀은 어머니의 의료사역을 도왔고 노튼 선교사가 설립한 해주구세병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의료현실은 비참했다.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이 희생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의 희생자가 났다.
더 끔찍한 것은 결핵에 걸리면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걸리는 병으로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병으로 여겨 치료를 포기하고 방치하였고 심한 경우는 강금까지 하며 자포자기 했다.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는 결핵에 걸리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를 쉬쉬하며 먼 외지의 병원에 가서 약을 타다 먹었다. 그때 참 가난했었다. 먹는 것도 부실했고, 시골에 병원이 있을리 만무했다. 결핵에 걸린 것이 알려지면 이웃과의 왕래는 고사하고 쫒겨나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어머니는 짧은 기간에 결핵을 극복하고 완치되었다. 우리 가족 누구도 결핵에 걸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세월이 지나 옛이야기처럼 당시를 회상했었지만 씁쓸했던 과거지사이다.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씰을 만들어 판매했다. 셔우드 홀은 크리스마스씰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결핵 퇴치를 위해 애쓰는 선교 병원에 나누어졌다. 어느 날 셔우드 홀은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매일 밤마다 저는 이 씰을 정성껏 가슴에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약을 붙여도 나의 심한 기침은 조금도 낫지 않았습니다. 돈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결핵환자는 크리스마스씰을 붙이는 약으로 오인했는지 또는 당시 만연하던 미신의 영향으로 부적으로 생각하였는지 치료목적으로 크리스마스씰을 구입하여 치료목적으로 가슴에 붙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항의 하고 있다.
전염 되는 결핵은 구한말 공포의 대상이었다. 결핵과 한센병 중 택하라면 한센병을 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결핵에 걸리면 집안에서 쫒겨나기도 했고, 이웃에게 발각 되면 마을을 떠나야 했다. 결핵은 죄를 지어서 귀신이 내리는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셔우드 홀이 크리스마스씰 발행을 준비하자 조선인들은 오히려 따졌다.
“그들은 형벌을 받아 병에 걸린 사람들인데 어째서 이미 정해진 그들의 운명 을 방해하려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성난 악귀의 심판을 받은 결핵환자를 묶었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 “결핵귀신”을 쫒아내기 위해 몇날 몇일 굿판을 벌리며 환자의 몸을 불로 지져댔다. 셔우드 홀이 결핵을 치료 하여 집으로 돌려 보내면, 정말 폐병이 나았냐며 다시 무당을 부르거나 가족과 격리된 채 불결한 곳에서 생활 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셔우드홀은 결핵과 싸우기 전에 조선인의 무지와 미신과 먼저 싸워야 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우체부 아이날 홀벨이 “결핵 어린이 돕기 모금 활동’‘을 위해 시작 된 착한우표 크리스마스씰은 미국으로 상륙하여 결핵퇴치에 많은 성과를 올렸다. 셔우드 홀은 이를 도입하여 1932년 12월 3일 첫 발행을 시작으로 많은 결핵환자를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해주구세결핵요양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결핵과 싸웠다.
셔우드 홀은 결핵요양원을 세우고 인근 토지를 개간하여 결핵환자가 직접 채소를 키우게 하여 자립할 수 있게 도왔다. 한편 결핵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풀어주기 위하여 교육과 홍보도 병행하였다. 셔우드 홀의 결핵퇴치에 대한 노력은 세브란스병원, 함흥 제혜병원, 성모병원 등으로 퍼져가며 결핵은 국가적, 범국민적 퇴치운동으로 발전한다.
처음 발행 된 크리스마스 씰은 850원어치가 판매되었다. 씰 한장의 가격은 2전으로 1920년대 후반 두부 1모 가격보다 낮았다. 4만명이 넘게 크리스마스씰 후원에 동참했다.
셔우드 홀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추방되어 인도에 가서 결핵과 싸웠다. 셔우드 홀은 총 9번의 크리스마스씰을 발행하고 판매하여 국내는 물론 외국에도 판매를 하였고,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크리스마스씰 증권을 발행하여 결핵퇴지자금을 마련했다. 크리스마스씰의 발행은 결핵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를 촉구했고, 결핵에 대한 각성 및 무지를 일깨운 사회적 운동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씰 발행은 해방 후에 다시 부활하여 국부 이승만까지 나서서 판매를 독려하며 결핵퇴치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인도에서 24년간 선교와 결핵 퇴치에 헌신한 셔우드 홀 부부는 88세의 나이에 한국을 방문하여 양화진에 잠들어 있는 부모님을 참배하고 유언을 남기며 1992년 4월 10일 그의 부모님 곁에 묻혔다.
“나는 지금도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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