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집에서 살고 있었으나 돌봄을 받지 못하고 허름한 뒷방에 방치 된 4살 된 어린아이는 배고픔으로 벽지를 뜯어 먹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언더우드는 몇일 전 고아원을 찾아 온 그 소년이 너무 어려 돌볼 자신이 없어 돌려 보낸 것을 회개했고 가지고 온 분유를 아이에게 주자 아이는 미친 듯이 분유를 먹었다.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에서 키웠고 공부를 시켰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게 했다. 벽지를 뜯어 먹은 그 아이는 해방 후 건국정국에서 국부 이승만, 김구와 같이 우익3거두로 불린 김규식이다.
언더우드는 선교 초창기 교육기관을 설립하려 했으나 조선 정부로부터 허락 받는 것이 여의치 않아 1886년 고아원으로 허가를 받아 사실상 고아학교를 운영했다. 이 고아원은 훗날 경신학교와 연세대학교 전신이 된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 여사는 자신의 저서에 고아학교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아원에는 25명 정도의 고아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기 방의 관리와 대부분의 음식준비를 하면서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새벽 3시반에 일어나 자기들의 방을 정리학고 청소를 한 다음 8시까지 한문공부를 한다. 이 때 한 외국사람이 와서 기도를 인도한 다음 다음 기도회가 끝나면 조반 식사를 한다. 다음으로 영어 골부를 하고 성경공부를 계속한다. 이러한 교실 과업은 짧은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계속하여 계속하고 오후에는 오락과 습작 시간과 한국 사람들을 교육 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한문을 공부한다"
버려진 아이 두명으로 시작 된 고아원은 경신학교가 되고 다시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하여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조선 선교 역량강화를 위하여 끊임없이 고민했다. 안식년 등으로 본국에 가게 되면 선교자금 마련을 위하여 모금활동을 하였고, 신학생과 개신교 성직자를 모아 강연회를 개최하며 조선선교에 나설 줄 것을 부탁하고 촉구하였다.
1892년 언더우드의 이러한 활동이 캐나다에 알려지게 되고, 토론토에서 살고 있는 의사였던 올리버 에비슨은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 하고 교회를 다니며 강연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에비슨은 캐나다에서 해외 선교를 후원하는 모임을 주도하며 해외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비슨은 자신의 집으로 언더우드를 초대하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언더우드는 에비슨에게 조선으로 의료 선교를 위하여 건너 올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에비슨은 결혼을 하여 병원을 개원하고 있었고, 의대 대학교수로도 재직하고 있었으며 시장 주치의로도 활약하는 등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고 사회적 신분 또한 높았다.
깊은 고심 끝에 에비슨은 조선선교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캐나다 감리회 해외 선교부를 찾아 조선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으나 예산 등의 문제로 거부 되었다. 낙담한 에비슨은 얼마 후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로부터 조선 선교사 파송을 정식으로 부탁 받는다. 에비슨으로부터 승낙도 받지 않은 언더우드가 미북장로회에 이미 추천을 해 놓았던 것이다.
에비슨은 약학대학교 및 의학대학의 교수로 오랫동안 역임했고, 개업의로서도 명성이 높아 조선에 건너 온 의료선교 인력 중 의학지식과 약학지식, 의술이 가장 높아 고종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제중원 관리를 맡은 조선 관료는 선교사에게 횡포를 부렸고,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하여 수술실을 일본인 의사에게 돈을 받고 빌려 주는 등 부정한 거래 등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제중원을 맡은 빈턴 원장은 부패한 조선관료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제중원을 떠났다. 에비슨은 3대원장 빈턴의 뒤를 이어 제중원을 맡으며 제중원의 관리운영권을 미공사관을 움직여 조선 정부에서 미북장로회로 옮기게 하여 정상화 시켰고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의 만남도 극적이지만 에비슨이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 것은 의료선교를 통한 개신교 선교의 획을 긋는 신의 한수였다.
에비슨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세워 최초로 조선인 의사를 배출하였다. 언더우드가 세운 연희전문학교의 부교장으로도 취임하였다. 언더우드의 사망 후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장장 18년간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를 병행하며 수 많은 인재를 길러낸다.
제중원의 관리권을 에비슨이 가져간 후 조선정부는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갑신정변 때 몰수한 홍영식 가택을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제중원 부지와 건물을 돌려달라고 했다. 에비슨은 미련없이 조선 정부에 제중원을 돌려 주고 석유재벌 록펠러의 동업자였던 세브란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 대학을 세워 대한민국 의학발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전국에 산재한 기독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이 모두 에비슨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시작 된 것이다.
사진 세브란스 의학교
1891년 테네시주의 주도 내슈빌에서 전미 신학생해외선교연맹 집회가 열렸다. 언더우드는 환등기를 보여주며 조선선교에 나서 달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어 개화기의 선각자 윤치호가 유창한 영어로 조국 조선 복음화에 지원하여 달라고 호소하였다. 당시 윤치호는 에모리 대학에 유학을 하고 있었다.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연설을 들은 남장로회 소속의 신학생들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은 깊은 감명을 받고 조선선교를 결심한다. 그리고 남장로회 소속 여성선교사 4명이 합류한다. 테이트의 여동생 메리 테이트, 데이비스, 레이번, 보울이 조선선교를 결심한다, 이들은 7인의 선발대가 되어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남장로회는 “조선과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음은 물론이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며 냉담했다
테이트와 레이놀즈, 전킨 3 인방은 실망하지 않고 남장로회 선교 잡지에 조선 선교 필요성을 기고하며 교회와 뜻 있는 후원자를 찾아 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언더우드는 남장로회 7인방이 선교자금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형에게 선교자금을 부탁했다. 언더우드의 형 존 T. 언더우드는 기꺼이 선교기금 2,000달러를 기부하였고 언더우드 자신도 500달러를 기부하여 남장로회 7인방이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남장로회 선발대 7인은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 지역을 근거로 하여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고 복음 개척에 나섰다. 특히 레이놀즈는 호남 최초로 전주서문교회를 세워 호남 복음화에 앞장섰다, 레이놀즈는 뛰어난 언어감각으로 아펜젤러가 이끌고 있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여 성서번역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아펜젤러의 순교 후 게일과 함께 10년 이상 걸린 성서의 한글화 작업은 그의 손에 의해 마무리 되어 1911년 ‘한글 성경전서’가 출판 되었다.
언더우드의 호소와 재정적 지원을 받아 시작된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는 일제 시대 외국인 선교사 모두를 추방했던 1942년까지 50여년간 170명의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워 조선 복음화를 견인했다.
구한말 콜레라는 음역하여 호열자로 불렀다. 근육경련을 일으키며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여 호랑이가 살을 찢는 것 같이 아프다고 호열자로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하기도 한다. 근육경련이 시작 되면 쥐가 발뒤꿈치를 타고 올라가는 것 같다고 쥐통으로 불리기도 했다. 근육경련을 일으키는 쥐를 막는다고 고양이 부적을 붙이기도 했으며 액막이를 한다고 부자집은 소머리를 대문앞에 두기도 했다.
대대적인 콜레라가 창궐 하자 언더우드는 에비슨과 같이 콜레라 퇴치에 나섰다. 1893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에비슨은 열악한 의약품과 병원시설을 극북하기 위하여 주사기로 소금물을 투입하여 탈수를 막았고 한여름이었는데도 격리시설에는 불을 때서 체온을 높여 신진대사를 높였다.
언더우드도 부인과 함께 존 T 언더우드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서대문 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위한 보호소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들로 구성된 자원 봉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생관념이 없던 당시 손을 씻고, 물을 끓여 먹으라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열이면 아홉이 죽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공포의 전염병 콜레라였다. 치사율 90%에 이르는 콜레라를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단 7주만에 진정시켰고 콜레라 환자 10명 중 6명이 목숨을 건졌다. 훗날 다시 콜레라가 창궐하자 조정에서 나서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가”라는 방을 붙이고 다녔다. 언더우드와 에비슨의 활약은 서양 선교사의 복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어 폭발적인 복음의 물결을 일으켰다.
학교와 의료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의 공생에 펼친 “가르치고” “고치는” 사역을 그대로 실천한 언더우드는 31년간 한국 복음화를 위해 투신하며 1916년 임종을 맞이한다. 그의 형 언더우드 타자기의 창업주 존 T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 부지 매입비와 건축비를 비롯하여 평생 언더우드에게 막대한 선교비를 지원하였다. 언더우드의 후손은 4대를 이어가며 한국을 섬겼다.
언더우드 그를 기억하여야 할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대한민국에 주기만 하고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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