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대학을 설립한 선비 김창숙은 좌빨이 꽤나 빨아주는 조선의 선비이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은 탑골공원 난전에 주저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어 김창숙을 꾸짖었다.
“이놈도 모양을 보니 아마도 유림인가 보다. 이놈아 통곡은왜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깢 죄악을 다 지어 놓고 오늘날 민족적 독립운동에는 한놈도 끼이지 않았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 이놈아. 통곡은 무슨 통곡이냐”
33인의 민족대표에는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이 참여하고 있다. 조선 500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수탈하고 착취하며 호의호식한 선비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 높은 기개와 선비정신은 지나가는 개가 물어 갔는 것 같다.
을사조약 후 일본 천황은 은사공채 3천만 엔(1999년 가치로 3,600억 원)을 발행해 왕족, 대신부터 시골 양반, 효자 열녀에 이르기까지 89,864명에게 은사금을 뿌렸다. 조선을 이끌어 온 그 대단한 양반, 유생, 효자, 효부 할 것 없이 뿌렸다.
김창숙은 자서전 <자서전-벽옹(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 당시를 적고 있다.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
김창숙은 독립운동에 투신 단채 신채호와 보조를 맞춘다. 병졸 한명도 없는 주제에 무력으로 무장투쟁을 하겠다는 객기의 사나이 김창숙은 임시정부 초대 및 2대 대통령인 이승만 탄핵에 앞장섰고 건국 후 초대 대통령에 취임 후에도 온갖 실체 없는 개도 안물어갈 높은 도덕심과 민족정신으로 분기탱천 요설로 국부를 괴롭혔다.
선비의 나라 조선의 군왕 고종이 받은 은사금은 측정이 불가능할 것이다. 조선총독부 예산의 10%를 매년 받아 먹었으니 세상 부자 누가 감히 고종에 대적할 수 있었을까?
선비가 그토록 물고 빨고 받들던 군주가 솔선수범 나라를 팔아 처먹고 천황이 뿌린 엽전에 뛸 듯이 기뻐한 선비에 같은 선비로서 반성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연려실기술’병자호란 때 정절을 지키고자 물속으로 뛰어 든 여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염하엔 빠져 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고 사람들은 애도했다.”
병자호란 때 모진 목숨 끊지 못하고 심양으로 끌려간 여인이 20만명 쯤 된다. 조선이 환향녀에게 임금까지 나서서 어떠한 거국적 폭력을 저질렀는지 따지지 말자. 그것까지 따지자니 이땅에 살아 남은 내가 죄인이라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중원대륙을 정벌하고 원나라보다 넓은 영토를 가진 청나라 팔기군의 한주먹거리도 되지 못하는 조선 주제에 남한산성에서 싸우자고 분기탱천 대의를 외친 김상헌은 왜 자살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염집 여자도 물속으로 뛰어 들었는데 그 고고한 선비는 자살을 왜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살할려면 인적 드문 외진 곳에서 자살하지 하필이면 목 메달고 자살한다고 들키고 쇼로 끝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삼전도에서 대가리 찧으로 출성하는 왕을 따르지 않고 바로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후에 대제학 등 출세길을 달리다 벼름빡에 똥칠하다 80세까지 살았다. 자살할 시간은 차고도 넘쳤던 것 같은데 말이다.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 받았다는 면암 최익현을 생각하면 포복절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의 뜻은 ‘우리나라는 기자가 임금으로 봉해졌던 땅이요, 이는 곧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의 땅이다’는 뜻이다. 죽으나 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의 조국 상국 중국을 빨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일제에 비분강개해 조선 독립을 주장한 글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일제에 항거한 것처럼 날조했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아사순국(餓死殉國) 했다는 것도 날조이다. ‘산 몸으로 적이 주는 한 알의 쌀과 한 모금의 물마저 물리치고 74세에 순국했다는 것이다. 대마도로 끌려간 날은 8월 27일이었고 죽은 날은 1907년 1월 1일이었다. 70 노인이 자그마치 4개월 넘도록 단식 끝에 죽었다고 날조를 했다. 120일동안 단식했다는 것은 도룡룡 때초 지율이 100일 단식했다는 기네스 기록을 갈아치우는 인간한계를 넘어선 인류역사 승리의 기록이다.
그런데 면암의 단신 투쟁은 사실과 달랐다. 함께 대마도에 갇혔던 제자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군 대대장이 통역을 통해 관을 벗고 경례를 하라고 했다. 선생이 벗지 않으니 일본인이 다시 말했다.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니 일본 법을 거역하지 말라.” 병정이 칼로 찌르려 하자 선생이 나와서 꾸짖었다. “이놈, 어서 찔러라.” 이에 선생은 “밥을 먹지 않고 자결(自決)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수로다”라 말하며 나를 시켜 황제에게 아사 순국하겠다는 상소를 적어내렸다. 그런데 대대장이 와서는 “통역이 잘못 전했으니 안심하고 밥을 먹고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시라”고 전했다. 이를 선생에게 전하니 죽을 드셨다. 우리 모두 밥을 먹었다. 단식은 사흘 만에 끝났다. 12월 4일 선생이 풍토병을 얻었다. 아들과 의사가 건너와 병구완을 했다. 선생은 끝내 돌아가셨다. 1907년 1월 1일이다.
어디가야 무엇을 읽어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선비 나으리들의 강직하며 청렴하고, 높은 기개와 지조를 볼수 있단 말인가?.’
역사 좀 공부하고 싶은데 도대체 이 염병할 조선의 역사기록은 무엇을 봐야 하냔 말이다.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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