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는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아펜젤러는 18세 때 감리교로 거듭난다. 기록에 성장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으로 독일계 어머니의 루터교에서 감리교로 옮긴 것이 아닐까 개인적 생각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성공회대학교는 줄줄이 이름 있는 좌파인사를 배출하며 명성이 자자하다. 성공회대 신앙적 모체인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늘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8세의 재혼 문제로 출발하고 사제들이 결혼을 한다는 것 빼고는 천주교와 다를 것이 없었고, 어쩌면 무늬만 개혁교회인 교황없는 천주교의 태생적 한계성도 내재 되어 있다.
성교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감리교인을 메소디스트(methodist)라고 불렀다. 감리교의 아버지 존 웨슬리가 옥스퍼드대에 다니면서 신성회(Holy Club)을 결성하여 예배 및 기도 등 신앙생활을 경건하며 규칙적으로 하자 잘난척 경건한척 한다는 뜻으로 조롱을 한 것이 공식적임 명칭으로 굳어졌다. 청교도(Puritan)라는 명칭 또한 영국에서 잘난척 깨끗한척 한다며 조롱한 것이 공식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성공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는 국가통제의 성공회 교회에 반발하여 교회의 주인은 대중에 있으며 성경과 복음주의에 기반을 둔 신앙생활의 쇄신운동을 일으키며 성공회와 맞섰다. 그는 성경과 십자가, 회개와 믿음을 광장, 길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설교 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수천 수만명이 몰려들었다. 대중의 영적각성은 영국을 깨웠고 이들의 영적각성운동은 부흥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원산대부흥 운동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원산대부흥을 이끈 것은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하디였다.
감리교의 신실한 신앙생활과 경건주의는 구한말 나태와 무기력, 총체적 도덕적 난맥에 빠진 조선에 희망을 제시하며 조선인의 영적각성을 시켰고, 교육을 통해 국부 이승만 같은 인재를 육성한다.
아펜젤러는 프랭클린마샬대학에 입학 한 후 선교사 훈련을 시작하고 1882년에 드루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언더우드가 인도 선교를 준비하다 조선으로 건너 오게 된 것 같이 아펜젤러 또한 일본 선교를 준비 중이었으나 조선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던 동창생 워즈워드가 개인 사정으로 조선행을 포기하게 되면서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조선 선교를 대표하는 두명 조선행으로 사명지를 변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었다.
언더우드를 한국 장로교의 아버지라고 하듯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이다.
아펜젤러는 1883년 10월 미국에서 전국 31개의 신학교 350명 학생 대표들이 참가하여 신학생 선교대회가 열렸을때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한다. 아펜젤러는 선교대회를 통해 해외선교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게 된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 엘라 제이 닷지(Ella J. Dodge)와 결혼 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이튿날 일본으로 향하는 아라빅호에 몸을 실었다. 그 배에는 스크랜턴 의사 부부와 그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턴 여사도 동승했다.
일본에 도착한 아펜젤러는은 매클레이 전도사 집에 머물며 조선 입국을 준비한다. 아펜젤러는 갑신정변 실패로 망명한 김옥균과 박영효 등과 만나 조선의 정세를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성서번역을 하고 있는 이수정을 만나게 된다.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언해”를 받아들고 감격해 한다. 본국에서 선교 잡지 미셔너리에 실린 이수정의 편지를 감명 깊게 읽은 아펜젤러는 이수정을 통해 조선어를 배운다.
아펜젤러는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만 쓰도록 교육 받아 어려서부터 언어적 훈련이 되어 있었다.
아펜젤러가 조선에 도착하기 전 존 로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신약성경이 번역 되었지만 평안도 사투리가 워낙 심하게 섞여 보편적으로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조선에 온 선교사 중 조선어 습득에 가장 많은 노력을 한 것이 아펜젤러이며 조선어 구사도 가장 뛰어나게 했다. 설교는 물론이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신임 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을 전담할 정도로 능숙했다. 아펜젤러는 한영사전을 수정 보완할 정도로 탁월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며 많은 성경과 기독교, 근대 교육관련 서적을 번역하고 대한성서공회의 초대 회장을 지내는 등 성서한글화에 많은 공헌을 남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창세기 신명기를 비롯한 많은 신구약 한글성경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하게 된다.
아펜젤러의 삶은 거룩하다 못해 신성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조선에서는 콜레라를 괴질 또는 호열자라고 불렀다. 호랑이가 찢는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하며 몸이 뒤틀려 그렇게 불렀다. 전염성이 강해 호열자에 걸리면 집 밖에다 버렸다.
하루는 자택에서 쉬고 있는 아펜젤러는 담장 밖에서 어린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는 노비계급의 어린여자 아이가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콜레라에 걸린 어린 소녀를 감염을 무릅쓰고 따뜻한 집안에 들여 간호하여 주었으나 끝내 어린 소녀는 숨을 거두었고 장례까지 치러 주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인천에서 구마가와마루호(400톤 규모의 선박)를 타고 목포로 가는 중 배가 침몰하고 있었다. 1층에 있는 아펜젤러는 탈출기회가 충분했음에도 지하3층에 갇힌 일행인 통역원과 정선여고 학생을 구조하기 위하여 내려가 빠져나오지 못해 순교한다. 아펜젤러의 아들 부부및 딸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후 양화진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그가 처음 제물포에 도착하여 드린 기도문이 적혀져 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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