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한 새마을 노래 2절에 자신의 절박한 염원을 담는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 과정에서 남긴 가장 큰 물질적 유산 2가지를 꼽으라면 "경부고속도로"와 "산림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몇 년전 우리나라 숲이 주는 경제적 효과가 년간 100조원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새마을 노래의 가사에 "마을길"과 "푸른동산"이 나온다. “마을길”은 경부고속도가 되었고 “푸른동산”은 짓푸른 대한민국의 산하가 되었다.
요즘 정치인들의 휘황찬란 한 오색빛깔 총천연색 정치구호에 익숙하다 보니 “마을길”과 “푸른동산”은 너무나 담백하고 소탈하다. 너무나 소탈하고 담백하여 가슴을 후벼파는 감동은 눈물까지 비치게 한다.
문명은 강을 따라 건설되었고 길을 따라 이동했다. 문명의 역사는 길의 역사이고 길의 길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이다.
김대중은 경부고속도로를 부자들의 나들이길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김영삼은 아예 길바닥에 드러 누웠다. 저들의 인식수준과 지적능력은 한심함을 넘어 비탄에 빠지게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신념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마을길을 넓히고를 외친 것은 길을 따라 문명이 흘러가는 것을 깨달은 통찰력 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문명건설의 역사이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은 조선의 도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귀 두 마리도 교행하지 못할 정도의 논둑길 같은 도로에 혀를 찼다. 당시 어느 외국인이 나귀 두 마리도 교행하지 못하는 길에 통탄을 남기고 있었는데 찾다가 포기했다. 찾으려면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 것 같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나귀를 타고 강원도 영월까지 갔고 조선을 샅샅이 뒤졌다.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자신의 저서에 도로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천연의 고속도로는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애용되지 않으며, 모든 종류의 행렬은 도로를 따라 서울로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도로라는 단어는 있어도 실제로 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아마도 천연의 고속도로는 사람의 발길 따라 형성 된 자연상태나 마찬가지였던 길을 지칭하는 말로 들리며 “도로”는 없다라며 잘라 말하고 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또는 선교사가 도로사정에 남긴 기록이 참 많다.
“도로는 쓰레기와 인분으로 넘쳐나고, 불결함의 극치인 돼지는 기세가 올라 곁눈질로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도로를 활보한다. 악취가 코를 찔러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일청전쟁 종군비록-"
“서울 거리의 진흙길은 너무나 질퍽 거리므로 주민들은 그 길을 자유로이 걸어 나닐 수 있도록 바닥보다 15cm 가량이나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데, 이 때문에 걸음걸이가 매우 부자연스러워 마치 목발 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 같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로 로제티-”
“거리는 비좁은 진흙탕 길에 온갖 짐승의 배설물이 깔려 있어서 숨을 쉬며 지나가기가 무척 어렵다 –선교사 알렌-”
천재 혁명가 김옥균은 치도약론(治道略論) 단 한권의 저서를 남겼다. 한글 번역본이나 또는 해설서가 전무하여 혹시 국사편찬위원회에 한글번역본이 있을까 해서 검색해 보았지만 서문 해설해 놓은 것 밖에 찾지 못했다.
서문만 보아도 조선의 현실과 문명개화에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이 본국에 돌아가 하는 말하기를 “조선의 산천은 아름답지만 사람의 수가 적어 졸연히 부강을 도모하기가 어렵고 또 인축의 똥과 오둠이 도로에 가득차 무섭다”라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괴질과 전염병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성행하여 한사람이 그 병에 걸리면 수 많은 사람에게 옮아 갑니다. 그래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그 사망자의 대부분이 잡이을 하는 장정들로 그 사인을 따져 보면 그들의 거처가 불결하고 음식의 절제가 없어서 뿐만 아니라 거리에 누적 된 오예물의 독기가 잡부들에게 침투했기 때문이다”
“서양제국의 문명개화는 덕이 있는 가르침도 아니요, 문학도 아니고 또는 이론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서 찾으면 되는가? 나에게 있어 이것을 보면 인민의 교통편에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사회교통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것이고 서양제국에 있어서는 일찍이 항해기술을 연구하고, 오래 전부터 서양인들은 북해, 지중해 지방을 왕래했을 뿐만 아니라 대양을 건너서 지구 어디에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이다”
“길이 이미 잘 닦아져 거마가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면, 열사람이 할 일을 한사람이 할 수가 있을 것이니 나머지 아홉 사람의 힘을 공업의 기술로 돌린다면, 옛날에 놀고 먹기만 하던 무리들은 모두 일정한 항구적인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길을 통해 문명이 이동되고 길이 잘 닦이면 한사람이 열사람 일을 하고 아홉사람은 공업화를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국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읽게 된다.
러일전쟁의 러시아 승리를 기원하며 경복궁 기둥에 가마솥단지를 묻던 고종이 통치하는 시대 김옥균의 절망이 미루어 짐작이 되고, 김옥균에게 대적할 문명개화의 미래를 볼 수 있었던 걸출한 인재가 당시 조선에 있었을까 싶다.
김옥균은 치도약론(治道略論)을 통해 도로와 위생, 공업화를 문명개화의 출발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을 가르친 스승이다. 서재필은 최연소 합격자로 과거를 통과했던 천재였으며 미국에서 이승만과 같이 2만5천명에 이르는 미국 지도층 인사를 모아 한미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창설할 정도로 능력과 재능을 갖춘 인재였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스승처럼 따랐으며 김옥균을 따라 도일 하였을 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일본 군사학교에 입학하라는 한마디에 군말 없이 군사학교에 입학 했다.
서재필과 관계에서 보듯이 김옥균은 지도력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시대를 읽는 천재성과 카리스마를 갖췄던 김옥균의 통찰력, 국부 이승만의 통상국가,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드라이브 산업화는 비전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일어난 2차산업혁명은 전기와 통신으로 대변된다. 전기혁명과 통신혁명이 이끄는 2차산업혁명의 화려함이 뉴욕을 장식할 때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이 이끄는 보빙사는 미국에 도착했다.
몰락한 집안 민태호의 외아들로 태어난 민영익을 민비는 죽은 양오빠 민승호의 대를 이을 양자로 들이고자 했으나 민태호가 반대하자 민비는 부귀영화를 약속하며 조카로 삼았다. 한순간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 고종의 외사촌 동생이 되면서 권력과 민씨척족의 중심에 선다.
민영익은 동료 홍영식과 같이 개화당원으로 활동하며 문명개화에 뜻을 같이 했다. 그러나 보빙사 귀국길 민씨척족의 한계를 드러낸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1884년 6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홍영식과 서광범 등은 새로운 문명을 관찰하고 기록하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민영익은 시찰기간과 귀국길에 묵묵히 유교 경서만 읽었다.
눈치 빠른 서광범은 민영익의 배신을 예감하며 홍영식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홍영식은 보빙사로 가서 우편과 통신제도를 배우는데 집중했다. 홍역식은 새로군 국가 건설 꿈을 꾸며 귀국하여 즉시 우정국 설치에 나서 1884년 4월 22일 우정국 초대 총판으로 임명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명을 이동시킬 경부고속도를 위하여 5.16 혁명의 횃불을 들었다. 김옥균은 문명개화의 횃불을 위하여 혁명에 나셨다.
문명개화를 위하여 분주한 홍영식과는 달리 민영익은 개화당을 배신하고 고종의 근왕파가 된다. 1884년 11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은 홍영식을 찾아 갑신정변을 계획하고 민영익 제거를 결의한다.
11월 18일 우정총국을 정식 개국 축하 피로연에서 갑신정변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러나 3일 천하로 끝났고 혁명의 주인공들은 도망자가 되어 도일했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혁명동지의 가족은 모두 역적으로 몰살을 당한다. 서재필은 2살 된 어린 아들까지 굶겨 죽이는 조국의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미국에서 의사가 된 서재필은 훗날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협회를 만들고 헌신한다. 미국시민권자로 고종을 만난 서재필은 궁궐 의전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경죄인 안경을 쓴채로 어전에 들어선다. 조선말을 할 수 있음에도 영어로 대화하겠다며 통역관을 부르고 나는 미국 시민이며 외신(外臣)으로서 임금에 대한 예는 하지 않겠다며 짝다리로 서서 담배를 피우며 고종을 만난다.
고종의 허락을 받고 일으킨 갑신정변이었다. 서재필의 입장에서 고종이 비겁하게 배반하여 혁명동지의 등뒤에 칼을 꼽고 가족을 몰살하고, 2살짜리 아들을 굶겨 죽인 것에 그 정도라면 자비로운 처사로 보인다.
한국인 미국 시민권자 1호가 된 서재필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독립운동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전재산을 팔아 76,000불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은 애국자이다. 고종에 대한 처사를 무례로 볼것은 아닌 것이다.
제거 대상 민영익은 여러번 자객의 칼에 여러번 난자를 당해 동맥은 끊어지고 머리와 몸에 십수군데나 자상을 입어 목숨이 위독했다. 한국정부의 외교고문이었던 뮐렌도르프는 미공사관 의사로 있는 알렌을 불렀다.
알렌이 도착하였을 때14명의 어의가 달라 붙었으나 치료할 의료수준은 아니었다. 민영익 치료를 시작하자 14명 어의는 모두 대책도 없이 반대 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민영익의 치료한 알렌은 목숨을 구해준다.
긴박했던 치료기간을 알렌은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걱정과 불안 속에서 석 달 동안이나 조심하여 치료하였다”
민영익이 살아나자 통큰 민비는 알렌에게 10만냥을 주었다. 고종과 민비는 관찰사를 5만냥에 팔았고, 3,000냥이면 한양에서 큰부자로 불렸다.
고종은 알렌에게 소원을 물어본다.
알렌은 고종에게 알렌 스스로 무급으로 봉사하는 조건으로 한양에 서양병원 건립과 병원 운영비 지원을 부탁한다. 고종은 이를 허락했고 갑신정변의 혁명가 홍영식의 자택을 병원건물과 부지로 내어주어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탄생한다.
제중원은 가난한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고 고종의 지원과 본국 선교부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운영하며 연간 수만명을 무료 진료하며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중원 개원 첫해 1년만에 1만명이 치료를 받았고 병원비를 지불하는 경우는 양반이나 부자를 제외하고 극소수였다.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환자로 인해 의사 1명이 1년에 일만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과로로 순교하는 의료선교사까지 생겨났고 연간 수만명을 진료하였다. 공식적인 선교활동은 금지 되었지만 자연스럽게 개신교 복음의 산실이 된다.
제중원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각 지방으로 퍼져 광주, 대구 등 주요 도시에 제중원이 생겨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김옥균은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병원과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주어 북미감리교 해외선교단이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고, 자의는 아니었지만 갑신정변에서 민영익 제거를 시도하여 알렌이 제중원을 설립하는데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다. 제중원은 미북 장로회 선교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대한민국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의 포문은 결과적으로 모두 혁명가 김옥균이 열었다.
개인적으로 갑오경장의 실패는 조선인 스스로 문명개화의 포문을 열 수 있었던 마지막 용솟음이었다.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05년 을사늑약까지 10년 동안 스스로 문명개화를 할 마지막 시간이었음에도 국가의 모든 역량을 고종과 민비의 부패와 사치, 무능과 타락으로 허망하게 기회를 날려 버린다. 고종시대는 반드시 비판 받아야 하는 부끄러운 시대임은 틀림없다.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김옥균, 미환의 혁명가 김옥균 그의 삶은 애닯으며 처연하고 존경스럽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홍영식 또한 자신의 집이 제중원이 되어 홍영식이 사랑한 백성을 살리는 산실이 되었음을 기뻐할 것이다. 불꽃처럼 살다가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불사른 갑신정변의 영웅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김옥균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이다. 스룹바벨 성전 건축을 고레스를 기름 부어 사용하시듯 이 땅의 아픔을 치유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천재 혁명가 김옥균을 들어 쓰셨음에 이땅의 개신교인은 그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으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