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믿고 역학을 하게 된 동기 [2]
전편에도 저가 여러 번 부언[附言]을 드렸지만, 저가 어릴 적부터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루를 어쩌면 이틀로 살아가는 고달픈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힘든 일이 반복되면서 실로 감내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의 주변에 닥쳐도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사고[思考]로 무난하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이겨 내었습니다. 가장 나의 생애[生涯]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저가 태어나면서, 저의 어머님은 만성 위궤양으로 엄청난 고생을 하셨고, 그 통증의 고통을 참아 내시면서 간간히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는 그야말로 옆에서
간병하는 가족들은 물론이고, 어린 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떨 적에는 저는 하나님이 있는지 ? 부처님이 계시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임에도 하늘을 쳐다보고 이렇게 빌어보았습니다. 하나님 ! 부처님 ! 조상님 ! 신들이 계신다면, 어머님의 고통을 저가 가지고 가게 해 주시고, 저의 어머님을 병마의 고통에서 헤어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까지 올린 적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저의 어머님은 저가 어릴 적 말귀를 알아들을 적부터 저에게 하신 말씀이 계셨습니다. 성복아 !
너 가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내가 이병을 앓지도 않았을 것이고, 너 가 계집애로 태어났다면 밥이라도 헤 먹을 수가 있을 것인데, 하시는 말씀을 수없이 넋두리로 하시는 말씀을 저는 어린 나이부터 귀가 닳도록 수없이 들어온 터라, 그 당시만 해도 저는 어머님께서 저를 놓으시다가 병을 얻으신 것으로 생각이 든 것이고, 그것이 죄밑이 되어서 저는 아홉 살 적부터 계집애마냥 행동을 했고, 어머님께서 위궤양의 통증이 심하시고 거동을 하지 못하시면 그때는 저가 우물물을 길러 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하고
어머님께서 자실 수 있는 미음을 달여서 드리는 것이 저의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일흔이 훌 적 넘은 나이에 생각해 보니, 사실 어머님께서는 저 때문에 병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아들만 내리 8 형제를 출산하시면서 산후조리를 잘못 하시고, 들일과 가정사와 우리 형제들 수발하시느라 병을 얻으신 것인데, 막내인 저가 그 모든 덤 터 미를 덮어쓴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저는 그때의 힘든 일을 조금도 후회도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오는 날 안동 촌노의 필명을 가진 김 성복이를 있게 해준
초석이 된 것이라고, 저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인생사 많게는 팔구십을 살고, 그런대로 지금 좋은 세상 만나서 호강 하고 사는 것 또한 지난 세월에 힘든 고생이 그 바탕이 된 것으로 봅니다. 어머님께서는 착실한 불교 신자이셨습니다. 그 당시 절에 스님들은 요즈음처럼 절 안 법당에 앉아서 염불이나 하면, 신도들이 절을 찾아가서 예불을 하고 시주를 하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스님들은 민가를 돌면서 탁발[鐸鉢]해서, 스님들의 공양과 절 운영에 보탬이 되던 때라, 어떨 적에는 스님들이 하루에 두 서 너 분들이 탁발을 오셔도 저의 어머님은
단 한분도 빼지 않고 저녁 먹을 양식이 없어도 괘념치 않으시고 스님들께 시주를 하시는 분이셨고, 불심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종교인 불교에 사실상 심취[深醉] 되었고, 그에 따라서 불경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저의 머릿속에 입력된 경전은 저가 불경 책을 보지 않고서도 불자 수지 독송이나 화엄경. 천수경. 법화경 등 등, 불교의 경전들은 거의 저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경전이던지, 한 번 시작만 하면 술술 실타래 풀리듯이 저의 입에서 독송이 됩니다.
요즈음 큰절이나 작은 절이나 막론하고 사찰의 행사에 참석해 보면, 스님들 대부분이 거의 경전을 보고서 독경을 합니다. 어떤 절에는 아예 스님이 독경하는 것을 녹음해서, 그것을 사찰 내에 설치된 음향기기를 통해서 방송이 됩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저가 어릴 적부터 불교에 심취를 했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공부를 사실상 불교경전을 통해서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고, 가정사의 어려움 속에서 터득한 것이 바로 역학의 진리인 것입니다. 무릇, 역학을 어떤 분들은 무학[巫學]이니 점술이니 미신이니 하면서
터부시 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실제 역학은 과학이고 통계학입니다. 역학의 기초가 되는 주역[周易]은 바로 우리 인생사에 일어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수 천 년 전부터 통계를 내어서 학문적으로 저술한 것이 바로 주역인 것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후인[後人]들이 보기 좋게, 알기 쉽게 만든 것이 바로 역학서[易學書]인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거기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그것을 체계적으로 학문화[學文化]하고, 모든 사람들이 손쉽게 자기의 인생사의 앞 길[前定]과
지난 일들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게 기초적인 일들을 서술한 내용이 바로 역학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어머님의 병을 고쳐 드리기 위해서 산중기도도 많이 했고, 수많은 야생약초와 들풀들을 직접 저가 채취해서 그것을 약제로 어머님이 복용하시도록 했고, 오랜 어머님의 위궤양이 어머님의 육순환갑당시에 위암말기란 진단을 그 당시 경북대 병원에서 받고서, 담당 의사분이 하시는 말씀이 환자분은 병세가 워낙 위중[危重]해서 수술도 못합니다. 많이 사시면 6 개월뿐이니 그동안 보호자분들은 환자분에게 잘해드리라는
마지막 사망선고를 받고서는 저가 그 당시 열아홉에 하늘이 무너지는 참담함에 우리 형제들은 말문조차 열지 못했습니다. 그 리고, 형님들은 이미 가정을 가지시고, 직장 따라 고향을 떠나시고 객지에서 자리를 잡은 터라, 고향에는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은 저가 자진해서 마지막까지 모시겠다고 형님들께 다짐을 하고, 그때부터 저는 전국의 이름난 사찰이나 기인들과 숨은 명의[名醫]들을 찾아다니면서 어머님의 병 구환을 한 것이고, 전국의 산과들에 자생하는 약초와 풀들을 채취해서 그것을 어머님의 약제로 사용을 했고, 그 세월이
무려 어머님께서 저를 낳으시고 병을 얻으신 시기인 마흔에서, 암으로 진단받은 육십에 저는 또다시 일흔이 다 되신 아버님을 모시고, 어머님의 병 구환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감동하신 것인지, 육십에 위암 사망선고를 받으시고 육 개월 밖에 사시지 못한 다는 어머님께서 차츰 차도가 계시면서 27 년을 더 사시다가 여든 일곱에 영면하셨습니다. 위궤양으로 발병하신지 마흔에, 위암 선고를 받으신 육십을 넘기시고, 27 년을 더 사신 87 세까지 장수를 하신 것입니다. 아버님은 아흔에 돌아 가셨고, 어머님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4 년 만에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시절이 그 당시에는 정말 고통스럽고 삶이 지겨웠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지금은 아련한 옛 추억으로 자리 잡고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현자[賢者]들께서 하신 말씀에 고진감래[苦盡甘來]는 흥진비래[興盡悲來]라고 했지 않습니까? 고생 없는 성공 없듯이 우리 인생들은 잠시 왔다가 가는 어찌 보면 여름철 나무그늘 아래서 한잠 자고 일어난 일장춘몽에 불과한 생이지만, 그래도 남는 장사가 있다면 죽을 때에 그 놈 ! 그 년 !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경도 역술원 역학 심리상담사]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