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Digest-52-
*스키피오,악조건서 和戰 양면전술로 카르타고-누미디아 征閥의 전초를 닦다
로마시민 절대다수의 지지로 전통을 깨고 30세에 집정관으로 당선된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제1인자 파비우스와 격론 끝에 시칠리아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조건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관례대로 로마에서의 모병이 아니라 파견 현지에서 7천명을 모병해서 군단 편성을 하라는 것이었다. 국고지원의 모병경비를 7천명에 한정시킨 조건이었다.
보통같으면 이런 조건으로는 수락하지 않을 것이지만 스키피오는 자신을 품고 이 악조건을 받아드려 BC.205년 봄도 기다리지 않고 시칠리아로 떠났다.
시칠리아에 일찌기 도착한 스키피오는 시간 허비없이 곧 군단편성에 착수했다.
스키피오의 역량을 믿는 시민민들이 호응하여 보병 6천 2백명과 기병 3백명이 단숨에
편성되었다.
반도 각지에서는 식량과 무기, 造船용 자재 등 각종 전쟁물자의 공출이 스키피오 군단에 쇄도하였다.
BC.216년 칸네會戰에 패전하여 시칠리아에 파견된 이른바 패전칸네軍團 병사들이 10여년간 귀가가 허락되지 않은채 전임 마르케레스 휘하에서 勇戰하여 패배감을 일소하고 일류 베테란전사가 되어 옛전우 스키피오 집정관을 맞았다.
스키피오는 칸네회전시 이들 병사와 함께 한니발로부터 구사일생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 동료병사 중 한사람인 스키피오는 11년 후 집정관이 되어 그들의 지휘관으로 부임하게된 감회는 남달랐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에 부임하면서부터 아프리카遠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兵員을 2만 5천명과 뱃사람 1만 2천명까지 늘려 군단편성을 마친 그는 시칠리아에서 뱃길 하루 거리인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대한 정보수집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BC.204년 전집정관 자격으로 군단의 절대지휘권 갱신을 인정받은 스키피오는 전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西端의 마르살라를 뒤로했다.
40척의 군선이 호위하는 수송선단 4백 척에 2만 6천의 병사와 당분간 먹을 식량 45일분과 식수를 싣었다. 그 중 15일분은 당장 먹을 수있는 조리된 일용식량이었다.
수도 카르타고 서쪽에 돌출한 곶(岬)을 목표했으나 바람때문이 카르타고 동쪽에 닿았다.
적해군의 저지 없이 육지에 닿은 로마군단은 제2의 도시 우티카 근처에 전군 무사히 상륙하였다.
라이벌 시파체王에게 왕국을 빼앗기고 영토 없이 방황하던 누미디아의 왕자이며 기병대장 마시닛사가 기사 2백명만을 거느리고 스키피오를 찾아와 로마군에 가세했다. 34세의 누미디아人과 31세의 로마人 간의 우정이 결실을 맺는 장면이었다.
스페인전선 최후의 결전 당시 스키피오에 패하여 아프리카에 귀국한 적 카르타고군 측 마시닛사는 이미 스키피오의 은밀한 제의를 받고 로마와의 동맹을 약속한 바있었다.
스키피오는 더 많은 용맹한 누미디아騎兵의 지원을 바랐으나 2백기만의 기병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었고 참모 레리우스와 마시닛사 그리고 스키피오 이렇게 30대의 3인 공동작전을 펼쳐나가게된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 최남단에 펼쳐진 한니발전선에서는 아무런 진척없이 1년 여의 교착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니발의 막내 동생 마고네가 BC.204년 봄 1만 4천의 병사와 코끼리 수 십마리에 다량의 군량과 함께 반도 북부 제노바에 상륙했으나 마고네의 남하시도는 3개 로마군단에 의해 좌절되고 마고네 자신은 중상을 입은채 진영에서 두문불출이었다.
한니발의 이탈이아侵攻 15년째를 맞은 BC.204년, 아프리카에 逆侵攻하여 전쟁에서는 正攻法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터득한 스키피오는 누미디아王 시파체를 중재로 하여 카르타고측에 강화사절을 보낸다.
스페인전선서 로마군에 패퇴경험을 가진 카르타고측 사령관 지스코네와 협의한 시파체왕은 다음과 같은 강화내용을 제시해 왔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서 철수하고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퇴거한다.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는 상호 주권을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일견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뒤늦게 비로서 공격 당한 카르타고는 동의할는지 모르나 로마측은 승복할 것같지 않은
내용이다. 15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의 절반이 피폐해지고 10만 이상의 병사와 집정관만 10여 명의 전사자를
낸 로마로서는 수락 여부를 물어보나마나한 조건이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당장 거부하지 않고 겨울 동안 휴전상태를 유지하면서 누미디아군의 본진과 로마군 본영 <코르네리우스 진지>간에 사절의 왕복을 거듭, 협상 지연전술을 폈다.
전쟁에서 술책에 의한 승리도 승리라는 것을 이번 전쟁에서 한니발로부터 충분히 배운 스키피오의 모책인 것이다.
강화사절 대표는 귀족출신 장관급이지만 수행원이나 마부들은 보잘 것없는 병졸로 가장한 百人隊長 등 역전의 장병들이므로 적진 방문이 거듭될 수록 敵情은 한눈에 파악되었다. 강화협상을 정확한 정보수집 기회로 이용한 것이다.
스키피오의 탁월한 지략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드디어 겨울이 지나고 적정도 거울 드려다보듯 환해졌다.
스키피오는 시파체王에게 자신은 귀하의 제의에 동의하나 막료 대다수가 반대함으로 부드기 협상은 결렬되었음을
알린다는 최후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카르타고 제2의 도시 우티카攻略 준비를 서둘렀다.
이 夜襲作戰은 지세에 밝은 마시닛사도 포함해서 스키피오와 레리우스 3인에 의해 짜여졌다.
계획은 그들 이외는 휘하 막료들조차 모르게 결행 당일 오후에야 공지되었다.
우티카 공격을 가장한 3분의 1의 병력은 본진 수비에 남기고, 3분의 1의 제1군은 스키피오 자신이 인솔하고 카르타군 지지를 야습한다. 나머지 3분의 1 제2군은 레리우스와 마시닛사가 이끌고 누미디아군 진영을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야간기습은 제2군의 공격신호로 누미디아 진영의 목재와 갈대로 지어진 막사에 불화살이 날아가면서 전단이 열렸다.
적이 잠에 떨어진 새벽 3시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불화살을 맞고 전 진영이 불에 휩싸인 누미디아군 진영에서는
불에 타 죽고, 적들끼리 밟혀 죽고, 로마군의 창에 찔려 죽고, 단순 화재로만 안 누미디아 병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2킬로 거리의 카르타고군 진영을 포위하고 있던 스키피오의 제1군은 어두운 밤 중에도 누미디아군 진영에서 불타는 광경이 쉽게 목격되고 이를 신호로 火攻을 감행했다. 여기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 야습으로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양군 모두 3만 여명이 죽얶다.
지스코네와 시파체 두 적장은 호위병들의 도움으로 화재현장을 탈출하여 하나는 수도 카르타고로, 하나는 자국령
누미디아로 도주했다. 불타는 두 진영에서는 적병들이 사방팔방으로 거미새끼처럼 도망쳤다.
스키피오는 夜陰에 축격하는 것은 단념했다.
그러나 개전이래 스키피오의 야간기습작전은 대성공하고 로마군측은 사상자 한명도 내지 않았다.
일패도지를 겪고 봄이 한창 무르익는 계절이 되면서 도망쳤던 가르타고의 패잔병들도 기를 되찼고 스페인으로부터 용병 4천명이 도착해 카르타고군 번력은 3만에 달했다.
여름이 오고 누미디아군도 재정비되어 양군이 누미디아쪽 가까운 내륙부의 평원에서 합류하여 로마군과의 결전을
시도했다.
이를 안 스키피오는 적이 공격해 올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로마구 병력은 적의 반도 안되었으나 스키피오는 會戰에 勝負를 걸었다.
스키피오는 회전 定石대로의 전법을 깨고 처음부터 기병으로하여금 적 기병을 맹공하여 戰列을 잃은 적진을 前 左 右에서 보병 기병의 협동포위작전으로 제압, 스페인에서 갖 도착한 4천의 용병을 전멸시키고 그밖의 적군 다수가
屍山을 이루고 생존병들은 패주해 갔다.
이 전투에서도 카르타고의 지스코네와 누미디아의 시파체 두 적장은 살아 제각각 도망갔다.
그러나 이날 스키피오는 추격의 손을 늦추지 않았다.
리레우스와 마시닛사가 이끄는 로마군 기병은 시파체를 추적하여 누미디아領內에 침입한다.
드디어 왕 시피체는 로마군의 포로가 되었다.
왕을 포로로 한 후에도 두 지휘관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누미디아왕국의 수도는 포박되어 끌려온 왕 시파체의 모습을 보고는 성문을 순순히 열었다.
결국 쫓겨났던 왕자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의 도움으로 왕국을 되찾았고 그를 외면하고 시파체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던 전 약혼녀 소포니즈는 옛 애인에 구원되는듯 했으나 마침내는 음독자살로 가인 단명의 표본을 보여줬다.
포로가 된 시파체王은 로마에 호송되어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 감시 하에 은둔생활을 보내고 자연사하였다.
스키피오로부터 보고를 받은 로마 元老院과 市民集會는 누미디아왕국의 동매국 체결을 승인했고 이로써 아프리카에 최초의 로마동매국 탄생을 보게었다.
한편 카르타고는 완전히 페닉현상에 빠져 사후책 모색에 백가쟁명이었다.
다음은 스키피오가 시도한대로 한니발을 카르카고 본국에 불러들여 대회전에서 카르타고를 굴복시키는 이야기를 끝으로 시키피오의 모용담은 마치게 됩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