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쉬며 로마史를 한번 더 천착하고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
歷史교훈 로마史 Digest-56-
後世人이 보기에 역사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 현재에 이른 것같지만 결코 역사는 순탄과는 무관한 생리를 갖는다.
물이 흐르는 과정에 계곡을 만나 격랑을 이뤄 急流하고 벼랑을 만나면 瀑布를 이루고, 沼를 만나 침체했다가 여울을 이루면서 흘러 바다에 닫는 江의 생리와 같은 것이 역사라고 해도 될것이다. 현세인은 자칫 河口에서 강을 보듯이 쉽게 역사를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역사의 강을 보는 눈이 아니다.
BC.183년, 한니발과 스키피오 두 天敵이 같은 해에 殞命했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1차 연재를 마친 바있다.
한니발전쟁의 두 주인공이 죽은지 수 십년이 흐른 뒤에까지 북아프리카에는 2차포에니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로마의 패전국이면서 여전히 자치독립국으로서의 카르타고와 로마의 동맹국 누미디아間의 지역패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없이 전쟁을 하지못한다고 강화협정에 명시된 약속을 어긴 것이다.
스키피오가 없는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의 파멸을 주장해온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강경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BC.149년,로마는 마침내 카르타고에 국가로 존속하려면 현재의 지중해 연안에서 15킬로 거리의 내륙에 새 도시를 건설하고 천도하라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海洋人 카르타고人들은 항구 없는 내륙 이전은 사형선고에 다름없다고 보고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로마는 군사력으로 카르타고를 설복하려 했으나 역시 저항했다.
결국 제3차포에전쟁을 선포하고 군단병을 카르타고에 파견한 로마는 항복이냐 전멸이냐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성을 둘러싼 로마병들이 보는 앞에서 로마군 포로를 하나씩 죽이면서 농성전으로 맞섰다.
항복 대신 결사항전으로 맞서겠다는 카르타고인들의 의지였다.
튀니지灣 서쪽에 삐져나온 작은 반도 끄트머리에 자리한 카르타고市街는 천연의 요새지에 세워져 있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유일하게 육지로 이어지는 서쪽은 높이 14미터에 폭 10미터가 되는 3중 성벽으로 거의 완벽한 守城 도시 카르타고이다.
그러나 로마군은 바다쪽에서부터 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3년째 농성 중인 카르타고 시내에 저장된 식량도 바닥을 들어낼 때가 되었다.
BC.147년에서 146년에 걸친 동계 자연휴전기를 이용해서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는 로마 元老院에 사자를 보냈다. 카르타고의 수도를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지시를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제2차포에니전쟁을 종결지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養孫子이기도한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는 당년 38세였다.
전장에서의 일체행위는 최고사령관에 일임되어 있다. 그러나 양조부 스키피오나 친아버지 에밀리우스 바울루스와 같이 카르타고인의 운명을 혼자서 결정하기에는 마음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BC.146년 해가 바뀌어 봄이 되고 원로원으로부터 지령이 내려왔다.
카르타고에도 코린토와 똑같은 처우를 내리기로 결정한 지령이었다.
항복 않고 저항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전멸지령인 것이다.
바다로부터의 공격이 개시되고 방위측에서는 外港 주위의 창고와 조선소들에 불을 지르고 玉碎作戰으로 저항했다.
로마軍은 도로 하나하나를 제압하면서 전면 시가전으로 진격 7일만에 카르타고를 완전 정복했다.
神殿이 늘어선 비루사의 聖域에 화염이 충천하는 것으로 戰禍는 막을 내렸다.
타오르는 신전에 몸을 던져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카르타고市民이 적지 않았다.
항복 권고를 거부한 시민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노예가 된 카르타고시민은 어린이까지 넣어 5만에 달했다.
총사령관 스키피오의 다정한 벗으로 카르타고 함락 현장에 있던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카르타고의 낙성과정을 저서
<역사>에 아렇게 기술하고 있다.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는 눈 아레 펼쳐진 카르타고시가로부터 장시간 눈을 떼지 않았다.
건국으로부터 7백년의 세월을 거쳐 그동안 오랜 번영을 누려온 도시가 落城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7백년이란 장구한 세월, 카르타고는 광대한 영토를,많은 섬들을 그리고 바다를 지배 하에 두어왔다.
그로써 카르타고는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강대한 제국으로 어느 것 하나 손색 없는 방대한 양의 武기와 軍선과 象隊와 富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어보다 카르타고는 과거 어느 제국보다도 용기와 기개가 뛰어난 국가엿다.
그러나 로마에 의해 모든 무기와 군선을 징발 당하고도 3년 간이나 로마군의 공격을 버티어냈다.
그것이 지금 낙성되고 완전히 파괴되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려하고 있다.>
승장 스키피오는 호머의 敍詩 한 구절, 트로이의 사령관 헥토르가 읊었다는 시 한구절을 입에 올려다.
<언젠가는 트로이도 왕 플리아모스와 그를 따르는 전사들과 함께 멸망하리라.>
등 뒤에 있던 폴리비우스가 물었다.
--왜 하필 지금 그 시 한 구절인가?
스키피오는 그리스人 친구 폴리비우스를 돌아보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폴리비우스, 지금 우리는 일찌기 榮華를 자랑하던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맞고있다.
지금 내 가슴은 승자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로마도 저와 같은 운명은 맞을 것이라는 슬픔에 차있다.
카르타고는 함락 후 성벽 신전 가옥 시가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그리고 돌과 흙만이 남은 땅은 쟁기로 평토가 되고 그 위에는 소금이 뿌려졌다.
결국 제1차, 제2차, 제3차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포에니전쟁은 단속적이기는 했으나 무려 118년만에 카르타고의
地上 消滅로 막을 내렸다.
풀도 나지않고 사람도 살 수없는 不毛의 땅이 된 카르타고에 사람이 다시 살게 된것은 율리우스 카에사르가 식민지 건설을 命하고 그의 암살로 중단되었다가 帝政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러니까 백년이 지나고나서였다.
그러므로 카르타고에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은 제정로마시대의 것이며 카르타고人의 것은 보기 드물다.
BC.753년 건국으로부터 6백 여년의 세월동안 로마는 敗者일지라도 지상에서 말살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BC.146년이 되면서 그리스의 코린트와 카르타고로 이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 소멸 후 13년에는 스페인의
누만티아도 카르타고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때의 총사령관도 카르타고 멸망시의 스키피오 에밀리어누스였다.
세 경우 모두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함으로써 로마의 자존심을 무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동일했다는 설명만으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다음은 한참 뒤 紀元前 1세기에 와서 로마가 共和政에서 帝政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