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 Digest-40-
*로마-한니발 양군 決戰의 순간들
"칸네대회전(Battle of The Canne)은 세계전사연구가들에게는 빼놓을 수없는 전투이므로 육군사관학교라면 어디서나 배우고 있다. 슈와르츠코프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이라크측의 장교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91년 1월 걸프전쟁 발발 당시 영국의 BBC방송 기자가 현지중계 방송을 하면서 던진 코멘트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방송 현장이 중동의 어디가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의 칸네(Canne) 들판이었다는 것이다. 2200년도 전에 있었던 칸네의 대회전을 회상한 배경은 뭘까?
우리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歐美의 사관학교라면 반드시 배우고 있는 세계전쟁사상 유명한 회전이었기 때문이다.
BC.216년 로마 市民集會는 군사력 증강을 결의하고 춘계전투 재개에 대비해서 군단 편성에 착수하고 있었다.
평소의 1개 군단 병력은 보병4천 2백과 기병 3백의 로마市民軍에 그보다 조금 더 많은 동맹국 군을 더한 약 1만 여명으로 편성된다.
한니발과의 決戰의 해로 정한 그 해 로마군의 총병력은 보병 8만에 전년 트라지메노 전투서 잃은 4천기를 메울 여력이 없어 기병이 7천 2백에 불과, 모두 8만 7천 2백인대 대하여 한나발 측은 보병 4만에 기병 1만 도합 5만이었다.
외형상 수적으로는 로마군이 단연 우세했다.
이제 31세의 한니발을 맞아 결전을 해야할 로마측 총사령관에는 법정 40세 이상의 두 집정관에 이리리아族과의 대전서 승리 경험이 있는 에밀리우스와 百人隊長 경험조차 없는 일개 병졸 출신의 바트로가 선출되었다. 후자는 결전으로 조기해결을 주장한 강경론이 시민집회의 호응을 사서였다.
예년과 같이 3월 15일을 기해 군사행동에 들어간 로마군은 적을 찾아 아피아街道를 남하하여 카푸아(Capua)를 지나 베네벤토(Benevnto)가까이 왔을 때 이미 월동기지를 떠난 한니발은 로마를 향한 북상 대신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두 집정관을 선두로한 8만 7천의 로마군은 그 한니발을 쫓아 반도 남쪽의 프리아(Prla)지방에 발을 딛었다.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나 한니발은 로마군의 병력 규모와 두 집정관의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수명의 포로의 입에새 확인했다. 한니발의 정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그는 기병대의 위력을 발휘하는데는 平原에서의 회전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다.
로마측도 그때쯤 이미 한니발의 의도를 눈치채고 들판이 펼쳐진 프리아지방에 발을 드려놓은 것이다.
한니발군의 2배 가까이 되는 8만이라는 보병전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 重裝步兵의 용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당시에도 유명했다.
쫓아오는 로마군에 쫓겨 도망가는척 남하를 계속하고 있던 한니발군은 오판토江이 아드리아海로 빠지는 강 어귀의 넓은 평야에 와서 행군을 멈추었다.
당장 강 근처의 칸네 마을을 습격해서 점령하고 로마동맹 제국내 도처에 설치되어 있던 식량저장기지 하나를 빼앗았다. <로마聯合>의 기능을 중요시하고 있는 로마인으로서는 동맹국내에서의 약탈을 엄금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그 로마를 자극한 것이다.
그것은 회전에 나서라는 미끼 던지기이며 또 10일분 밖에 남지않은 군량확보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식량까지 얻은 한니발은 칸네에서 군을 더 움직이지 않고 마을 배후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로마군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한니발을 10킬로 거리까지 접근해온 로마군도 거름을 멈추고 칸네 평원 한 가운데에 진영을 구축한다.
사방둘레에 목책을 높히 치고 참호까지 깊히 팠다.
본격적인 진지구축이었다.
사방이 훤히 트인 들판 10킬로를 사이에 두고 두 진영은 눈치작전이 시작되었다.
상호 병정놀이 정도의 탐색전이 이따금 있었을뿐 중심은 까딱않고 노려만 보기가 두 달가까이 되었다.
그러는 탐색전에서도 희생자는 났다.
로마측이 백 명이었던 반면 한니발 측은 전사자 천 7백명을 냈다.
이것만으로 보면 단연 로마측의 우세가 돋보인다.
그러나 서른 한살 젊은 프로 전술가는 포카게임에서도 프로가 풋내기에 저 주는듯이 하다가 나중에 뒤집어 엎어 이기듯이 한니발도 처음은 저 주는척 했다.
여기에 기세가 오른 로마군은 진지를 오판토江 좌안으로까지 옮겼다.
한니발도 즉각 같은 쪽으로 진영을 이동해 왔다.
양군의 거리는 2킬로가 안되었다. 그렇다고 戰端이 바로 내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진지 속에 숨어서 서로 노려보기가 시작된다.
나이 31세의 한니발은 로마의 사령관들이 그의 책략에 말려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들을 회전에 끌어내려면 그들의 경계심을 풀어 줄필요가 있었다. 그래 주도권은 로마측에 있는 듯이 보인다.
BC.216년 8월 2일은 로마군의 1일교체 지휘관으로 호전적인 테렌티우스 바트로 집정관이 총지휘를 맡는 날이었다.
이날 동역이 밝아오자 로마군의 두 진지로부터 바트로의 명령을 받은 로마병들이 몰려나와 전군이 오팡토江 右岸에 布陣했다. 우안을 택한 것은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 左岸은 적의 기병에 활동무대를 허용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포진 완료를 본 한니발은 자신이 전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로마군 정면에 진형을 갖췄다. 왠지 로마군 진형이 橫隊 일직선인데 대해 그는 중앙부가 앞으로 튀어나온 弓形陣을 폈다.
로마군의 당일 총사령관 바트로가 생각한 전술은 중앙에 배치한 보병단의 진형이 옆으로 길지않고 종으로 두껍게 처서 적의 중앙돌파를 노린 것이다.
그렇게해서 오판토강과 칸네 마을의 배후를 에워산 야산 기슭에 펼쳐진 이 지역에서는 비교적 좁은 지대를 골라 전장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진형은 로마군의 우익을 담당한 2천 4백의 기병에 대해서는 강과 보병단 사이에 갇힌 좁은 지역이 되어 3배의 적 기병과의 전투를 불리하게 가져다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戰場 가득이 포진한 아군의 배후에 있는 小陣營에 1만 병력을 대기시켰다.
기병이 기다리는 동안 보병이 적 중앙 돌파에 성공한 단계에서 뒤의 1만 병력을 투입해서 會戰을 단숨에 승리로 가져간다는 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트레비아戰(Trebia)때와는 전혀 다른 진형을 짠 한니발은 바트로의 손아귀 들지 않았다.
회전은 우선 양군이 정석대로 각기의 정면에 위치하는 적과의 맞싸움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좌익은 로마군의 우익에, 중앙은 중앙의 경보병끼리, 한니발의 우익은 로마군의 좌익에,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양군이 최초로 접촉은 활 모양의 진형을 짠 한니발의 갈리아傭兵과 로마의 輕裝步兵 간에서 있었다.
양군의 격돌은 서전부터 로마측의 우세 가운데 전개된다.
이를 본 로마군 사령관 바트로는 보병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중장보병단의 투입을 명령한다.
로마 전보병단에 밀려 한니발군은 중앙부 궁형대형이 무너져 후퇴 하면서 시간 끌기로맞서 로마군의 체력소모를 기다리며 버텨난다.
보병전에 이어 좌 우익에서는 기병끼리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3배 가까운 전력의 한니발의 좌익이 에밀리우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 기병에 대해 처음부터 우세했다. 로마군 기병은 강변으로 산발적으로 밀려가면서도 감투하고 있었다.
로마 기병단 우익은 사관후보생이라 일컸는 로마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편성된 정예들이다.
한편 바트로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동맹국 기병으로 구성된 죄익에서는 적의 누미디아기병에 대해 수적으로 열세가 아니어서인지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중앙에서는 로마 중장보병의 맹공을 받고 한니발의 갈리아용병들은 완전히 우왕좌왕했다. 기세 오른 로마 보병은 경장 중장이 일체가 되어 후퇴를 거듭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한다.
그러나 이때가 되어 이제까지 후퇴만 하던 갈리아병들이 방위도 하지않고 좌우로 나뉘어 전선을 이탈했다. 로마 중장보병은 이때 돌연 나타난 듯한 한니발의 중장보병과 처음 맞대결을 하게된다. 한니발의 원정을 따라온 정예이기에 2만이 7만 로마군의 맹공을 용케 견뎌내고 있었다.
전장 중앙에서 중장보병 간의 격투는 벌써 로마측 우세로 기우러가기 시작하는데 기병간의 전투에서는 반대로 승부가 한니발쪽으로 유리게 전개되고 있었다.
역시 유명한 누마디아기병에는 대적이 안되었다.
로마 중장보병의 맹공을 받으면서도 한니발의 정예가 버텨내고 있는 사이 전선을 이탈한듯했던 갈리아보병들이 기병이 격퇴되어 비게된 로마보병단의 양 옆구리를 둘러치고 있었다.
이어서 로마군 우익의 기병단을 물리친 한니발의 좌익 기병대가 로마보병단 배후에포위망을 첬다.
한니발이 생각한 포위작전은 로마의 바트로집정ㄱㅘㄴ이 이끄는 로마구 기병을 쫓아버린 누미디아기병이 전장에 복귀하면서 완성되었다.
7만에 이르는 로마 보병단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5만의 한니발군에 의해 전후 좌우로 포위되고 만 것이다.
로마연합의 중심을 이루는 시민군이었다.
작에 포위되었다고 당장에 손들병사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모든 전투가 그랬듯이 한니발로서는 로마군 상대의 포위작전은 곧 전멸작전이었던 것이다.
중장보병을 지휘하고 있던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전사했다.
말을 내려서라도 부하들과 함께 싸울 작정이었던 집정관 에밀리우스도 전사했다.
독재관 시대 파비우스의 부관을 지낸 미누티우스도 죽었다.기병이나 중장보병으로 참전한 80명의 원로원 의원도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한니발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목숨을 건진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칸네에서 포위작전이 완벽했듯이 전멸작전도 완벽했던 것이다.
적의 주전력 즉, 로마군단의 정예 중장보병을 비전력화하는 것으로 실현한 것이다.
포로가 된것은 총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소진지에 대기하고 있던 1만의 병력뿐이었다.
그날의 초지휘를 맡은 집정관 바트로는 기병 50기를 데리고 칸네로부터 산길을 따라 서쪽 수 십킬로 떨어진 로마 식민도시 베누지아(Venugia)에 도주하여 목숨을 건졌다.
칸네로부터 남쪽 십킬로의 카노자(Canosa)에 도주한 병사는 보병 4천에 기병 2백에 불과했다. 그 중에 19세가된 코르네리우스 스피키오도 있었다. 트레비아전 이후 스페인에 파견된 부친이 에밀리우스에게 자식을 맡긴 인연 때문이었다.
젊은 스피키오로서는 한니발의 전술의 묘를 익히는 세번째 현장실습이었다할 것이다.
이후 카르타고에 원정해서 하니발의 무릎을 꿇리고 로마에 평화를 거져오는 개선장군이 되는 장본인, 세번의 참패를 겪으며 익힌 명 전술가 그 스피키오이다.
차패한 칸네회전에서 로마는 7만의 희생자를 냈다.
이긴 한니발 측은 5천 5백에 불과, 그중 용병 갈리아인이 3분의 2였다.
로마가 싸운 전 역사를 조감하더라도 로마가 이처럼 차혹하게 패배한 전투는 전무 후무한 일이었다.
한편 승전한 한니발측이 로마군 전사자로부터 값나가는 물품을 거두는데만 여러 날이 걸렸다.
한니발은 동생 마고네를 시켜 죽은 로마병의 손에서 빼낸 금반지를 승전보와 함께 본국 카르타고에 보냈다. 로마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반지가 아니라 인감이었다.그래 모양도 크고 무거웠다. 수 만개의 금반지가 아마도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로마는 世界戰史상 유명한 칸네 大會戰서도 참패했다. 그러나,
패잔병을 추수려 그들과 함께 수도에 귀착한 집정관 바트로를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해서 전 시민이 성문 밖까지 나와 맞아드리며 위로했다. 전사자의 유족들은 1년간 입던 예전과 달리 상복을 30일만 입었다.
여기에 로마의 힘이 있었다.
오늘은 이만......한니발전쟁 즉 제2차 포에니전쟁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