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서 폭동까지
제주4.3】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1. 4.3위원회의 남로당 변호
2. 폭동 지령문
3. 폭동 전야 ‘신촌 회의’
4.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5. 천검산(千檢山)은 누구일까
6.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부인설(否認說)
7. 9연대 문상길 소위의 중앙당 발언
8. 스티코프 비망록의 폭로
9.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서 폭동까지
4.3폭동은 5.10선거 반대라는 외피를 걸치고 있었지만, 소련을 위한 폭동을 하면서 마침 선거철과 겹쳐지자 남로당은 단선반대라는 피켓만을 든 것뿐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개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고, 폭동은 순수하게 남한 인민이 자발적 폭동이어야 했다. 따라서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도 비밀에 부쳐야 했다. 남로당은 중앙당 조직도 보존하는 차원에서 이 조치는 일거양득이었다.
4.3폭동은 지방조직만을 가동한 것이었으며, 이런 이유로 문상길은 출동을 거부해야 했다. 남로당 중앙당은 5월 25일에 가서야 남로당 기관지인 ‘노력인민’을 통해 4.3폭동을 지지하는 중앙당 차원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앙당 조직은 여전히 가동하지 않았다. 문상길은 여전히 9연대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4.3폭동의 최대 목적은 5.10 제헌선거의 방해였다. 그러나 4월 3일과 5월 10일 사이는 거리가 너무 멀다.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 있던 남로당으로서 5.10 선거를 방해하기위해서는 되도록 선거가 가까운 날에 폭동을 일으켜야 병력을 소진하지 않고 무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선거까지 40여 일이 남아있는 4월 3일이라는 날짜는 선거 방해라는 목적 말고도 다른 목적도 병존하는 날짜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1.22검거사태에서 입수된 폭동 지령문에는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지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의 폭동은 애초에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 날짜는 5.10 선거일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제주도 폭동은 5.10선거보다는 다른 무엇인가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스티코프 비망록을 여기에 대입해 보면 정답은 명확하게 나온다. 남로당의 9월 총파업은 애초에 10월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소련의 말 한마디에 9월로 앞당겼다. 그리고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현찰을 요구했다. 남한에서 깽판을 쳐주기를 바라는 소련과, 조선 정판사 사건으로 더 이상 현찰을 만들 수 없어 자금 고갈에 허덕이던 남로당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남로당의 폭동으로 소련은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고. 남로당은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남로당은 폭동을 판매하는 ‘폭동 상인’이었다. 남로당은 대한민국 건국 전부터 폭동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던 ‘수출 건아’였던 셈이다.
제주도당의 주요 인물들은 1.22때 검거되었다가 미국의 사면령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이들이 출소하자마자 만반의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선거일이 꽤나 남았는데도, 무엇에 홀린 듯, 5.10 선거반대를 부르짖으며 폭동의 불꽃을 올렸다. 4.3폭동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자발적인 모습이 아니라 무엇엔가 쫒기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상부의 지령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상부의 최상층에는 돈줄을 쥔 ‘구매자’인 소련이 있었다. 4.3폭동은 소련의 공산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경쟁에서 소련의 자존심을 세우는 한 가닥 빛줄기였던 셈이었다.
왜 4월 3일일까. 1일도 있고 5일도 있는데 하필 3일이라니. 4월 3일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난 후 레닌이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귀환한 날짜이다.
중앙당 지령에서 4.3폭동까지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1. 47년 12월에서 48년 1월 초 사이,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 지령 제주도당에 하달된 것으로 추정.
2. 48년 1월 10일경 남로당 강정리 세포 체포, 마굿간에서 암호 발견. 암호 해독.
3. 1월 15일, 암호에 의거 신촌리를 급습하였으나 동네를 잘못 들어 연락총책 김생민 달랑 혼자 체포.
4. 48년 1월 22일, 김생민의 전향으로 신촌리 남로당 집회를 급습, 남로당 대거 검거. 김달삼 도주.
5. 1.22검거사태에서 폭동 지령문 발견(1차 지령). 2월 중순에서 3월 5일 사이 폭동을 일으킬 것.
6. 1.22검거사태로 폭동 불발.
7. 2월에서 3월까지 도주한 김달삼이 읍면을 순회하며 대책회의 주관.
8. 2월 말~3월 초 사이 ‘2월 신촌회의’ 열림. 여기에서 투표가 있었다고 4.3위원회 구라침.
9. 3월 15일, 중앙당 오르그와 중앙당 거물들이 모여 신촌회담 열림. 2차 폭동지령 하달.
3월 15일에서 25일까지를 준비기간으로 설정
10. 3월 20일경 한림면경 새별오름(新星岳) 공동묘지에서 남로당 유격대 훈련 모습 포착됨
11. 3월 28일 재차 회합하여 준비 상황 점검.
12. 4월 3일, 폭동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