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의 큰 희생을 치르고 참패했다. 그러나....
歷史의 敎訓 로마사Digest-41-
-승 전-
그러나 트레비아戰(Trebia)때와는 전혀 다른 진형을 짠 한니발은 바트로의 손아귀 들지 않았다.
회전은 우선 양군이 정석대로 각기의 정면에 위치하는 적과의 맞싸움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좌익은 로마군의 우익에, 중앙은 중앙의 경보병끼리, 한니발의 우익은 로마군의 좌익에,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양군이 최초로 접촉은 활 모양의 진형을 짠 한니발의 갈리아傭兵과 로마의 輕裝步兵 간에서 있었다.
양군의 격돌은 緖戰부터 로마측의 우세 가운데 전개된다.
이를 본 로마군 사령관 바트로는 보병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重裝步兵단의 투입을 명령한다.
로마 全보병단에 밀려 한니발군은 중앙부 궁형대형이 무너져 후퇴 하면서 시간 끌기로맞서 로마군의 체력소모를 기다리며 버텨낸다.
보병전에 이어 좌 우익에서는 기병끼리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3배 가까운 전력의 한니발의 좌익이 에밀리우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 기병에 대해 처음부터 우세했다. 로마군 기병은 강변으로 산발적으로 밀려가면서도 奮戰하고 있었다.
로마 기병단 우익은 사관후보생이라 일컸는 로마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편성된 정예들이다.
한편 바트로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동맹국 기병으로 구성된 죄익에서는 적의 누미디아기병에 대해 수적으로 열세가 아니어서인지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중앙에서는 로마 중장보병의 맹공을 받고 한니발의 갈리아용병들은 완전히 우왕좌왕했다. 기세 오른 로마 보병은 경장 중장이 일체가 되어 후퇴를 거듭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한다.
그러나 이때가 되어 이제까지 후퇴만 하던 갈리아병들이 방위도 하지않고 좌우로 나뉘어 전선을 이탈했다. 로마 중장보병은 이때 돌연 나타난 듯한 한니발의 중장보병과 처음 맞대결을 하게된다. 한니발의 원정을 따라온 정예이기에 2만이 7만 로마군의 맹공을 용케 견뎌내고 있었다.
戰場 중앙에서 중장보병 간의 격투는 벌써 로마측 우세로 기우러가기 시작하는데 기병간의 전투에서는 반대로 승부가 한니발쪽으로 유리게 전개되고 있었다.
역시 유명한 누마디아기병에는 대적이 안되었다.
로마 중장보병의 맹공을 받으면서도 한니발의 정예가 버텨내고 있는 사이 전선을 이탈한듯했던 갈리아보병들이 기병이 격퇴되어 비게된 로마보병단의 양 옆구리를 둘러치고 있었다.
이어서 로마군 우익의 기병단을 물리친 한니발의 좌익 기병대가 로마보병단 배후에 포위망을 첬다.
한니발이 생각한 포위작전은 로마의 바트로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구 기병을 쫓아버린 누미디아기병이 전장에 복귀하면서 완성되었다.
7만에 이르는 로마 보병단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5만의 한니발군에 의해 전후 좌우로 포위되고 만 것이다.
로마연합의 중심을 이루는 시민군이었다.
적에 포위되었다고 당장에 손들 병사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모든 전투가 그랬듯이 한니발로서는 로마군 상대의 포위작전은 곧 전멸작전이었던 것이다.
중장보병을 지휘하고 있던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전사했다.
말을 내려서라도 부하들과 함께 싸울 작정이었던 집정관 에밀리우스도 전사했다.
독재관 시대 파비우스의 부관을 지낸 미누티우스도 죽었다.
기병이나 중장보병으로 참전한 80명의 원로원 의원도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한니발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목숨을 건진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칸네에서 포위작전이 완벽했듯이 전멸작전도 완벽했던 것이다.
적의 주전력 즉, 로마군단의 정예 중장보병을 비전력화하는 것으로 실현한 것이다.
포로가 된것은 총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소진지에 대기하고 있던 1만의 병력뿐이었다.
그날의 총지휘를 맡은 집정관 바트로는 기병 50기를 데리고 칸네로부터 산길을 따라 서쪽 수 십킬로 떨어진 로마 식민도시 베누지아(Venugia)에 도주하여 목숨을 건졌다.
칸네로부터 남쪽 십킬로의 카노자(Canosa)에 도주한 병사는 보병 4천에 기병 2백에 불과했다. 그 중에 19세가된 코르네리우스 스피키오도 있었다. 트레비아전 이후 스페인에 파견된 부친이 에밀리우스에게 자식을 맡긴 인연 때문이었다.
젊은 스피키오로서는 한니발의 전술의 묘를 익히는 세번째 현장실습이었다할 것이다.
이후 카르타고에 원정해서 하니발의 무릎을 꿇리고 로마에 평화를 거져오는 개선장군이 되는 장본인, 세번의 참패를 겪으며 익힌 명 전술가 그가 스피키오이다.
참패한 칸네회전에서 로마는 7만의 희생자를 냈다.
이긴 한니발 측은 5천 5백에 불과, 그중 용병 갈리아인이 3분의 2였다.
로마가 싸운 전 역사를 조감하더라도 로마가 이처럼 차혹하게 패배한 전투는 전무 후무한 일이다.
한편 승전한 한니발측이 로마군 전사자로부터 값나가는 물품을 거두는데만 여러 날이 걸렸다고한다.
한니발은 동생 마고네를 시켜 죽은 로마병의 손에서 빼낸 금반지를 승전보와 함께 본국 카르타고에 보냈다. 로마시민에게 금반지는 결혼반지가 아니라 印鑑이었다.그래 모양도 크고 무거웠다. 수 만개의 금반지가 아마도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로마는 완패 소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로마는 世界戰史상 유명한 칸네大會戰서도 참패했다. 그러나,
패잔병을 추수려 그들과 함께 수도에 귀착한 집정관 바트로를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해서 전 시민이 성문 밖까지 나와 맞아드리며 위로했다. 전사자의 유족들은 1년간 입던 예전과 달리 상복을 30일만 입었다.
여기에 로마의 힘이 있었다.
오늘은 이만......한니발전쟁 즉 제2차 포에니전쟁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