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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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제철의 성공을 이룬 배경에 숨은 비화[秘話]
기간산업이 철강[鐵鋼]이라고 선언[宣言]했다. 나는 포철 건설을 전투에 비유하고, 이사회는 작전회의[作戰會議]로 각각 역할분담과 돌격 앞으로 목표를 향하여, 온 힘을 다했다. 나는 포철 영일만의 소대장[小隊長]으로 임무를 다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포철건설 자금은 조상[祖上]의 핏 값이다. 부실공사[不實工事]는 적대행위[敵對行爲]이다. 쇳물이 잘못되면 동료가 죽는다. 절대 부실공사는 안 된다.
나는 직원들과 정보[情報]와 생각을 공유한다. 이것은 목표 달성의 지름길이다. 나는 군에서 잔뼈가 굵었다. 장교[將校]는 부하[部下]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다. 내가 아는 철강 지식, 내가 파악한 철강시장의 흐름을 모두 전수해 주고 싶었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우향우 ! 영일만에 빠져 죽을 각오로 일한다. 리더는 조직원의 신뢰[信賴]를 얻어야만 조직이 산다. 나는 하루 빨리 포철 맨을 키워내고 싶었다. 나는 포철 건설방식을 제선 - 제강 - 압연공장 순으로 세우는 전방 방식과 압연 - 제강 - 제선공장 순으로
세우는 후방 방식이 있다. 포철은 용광로 제선공장을 맨 나중에 세우는 후방 방식을 택했다. 그래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한 슬래브를 가공하여, 하루 빨리 완전품으로 생산해 철강 부족에 허덕이는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 철강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포철이 원년 흑자를 냈던 배경에는 후방 방식을 선택한 발상의 전환을 빼놓을 수 없다. 1972 년 7 월 4 일 준공되어 가동 스위치를 누르자 시뻘건
슬래브가 4 중 회전식 압연기를 거쳐 후판[厚板]으로 태어났다. 나는 품질로서 세계 정상이라는 휘어[揮語]를 썼다. 첫 쇳물, 첫 사고[事故] 90M 제강공장 지붕으로 올라가 육중한 철 구조 연결 작업에 주먹 만 한 대형볼트를 체크하니 허술하게 보이는 것이 있어 나는 비상소집[非常召集]을 내렸다. 즉시 모든 볼트를 하나하나 확인하라! 24 만 개에 이르는 볼트를 검사하여 400 개를 교체하였다. 1973 년 6 월 8 일
오전 7 시 30 분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주상(철 기둥)에 올라선 우리는 젖은 눈으로 ‘만세’를 불렀다. 1977 년 4 월 새벽에 44 톤의 쇳물이 진로 앞에서 사고가 났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김종필 총리가 위문[慰問]차 국무위원들과 왔다. 신 광식 부장이 사표를 냈다. 나는 반려하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더욱 열심히 일하라고 하였다. 1978 년 12 월 8 일. 포철 3 기 준공식을 하였다. 포철이 세계 17 위에 오르는 날이다.
나는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회장을 모시려고 초청장을 들고 도쿄로 날았다. 이니야마 회장은 나에게 박 사장은 중국에 납치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8 년 전 주은래의 4 원칙 파문이 떠올랐다. 지난 8 월 등소평이 일본제철소를 다녀갔다고 한다. 등소평은 중국에도 포철 같은 제철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여,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은 중국은 무기를 생산할 시스템이 없다고 했는데, 이니야마 회장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등소평은 왜?
불가능하냐고 묻 길래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짓습니다. 중국[中國]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를 만들 수 없습니다” 등소평은 한참 생각하다가 “박태준이 없으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고 했단다. 나는 2003 년 1 월 중국 방전 연구 기금 회 고문[顧問]으로 초빙되었다. 중국 베이징 과학기술 교수가 나를 등소평 별장으로 초청하겠다고 하는 말을
아내에게 듣고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나는 조국을 버릴 수 없어” 포철 슬로건은 36 년간 ‘자원은 유한[有限]창의[創意]는 무한[無限] 당당히 포철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맞는다. 나는 포철 건설 초기 많은 무시를 당하면서 극복하고, 또 극복했다. 석탄 구입시에 일본과 차별을 극복하고, 특히 호주 주한 대사관의 케리 상무관의 도움으로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여 일본과 동등한 조건으로 계약을 하였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당시 포철 가족의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포철 맨의 종교는 철[鐵]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나는 77 년 여름 부실공사를 폭파한 적이 있다. 세계철강업계의 지존[至尊]인 유에스 스틸 로데릭 회장과의 만남 당시에 미일, 한국 철강업계는 3 파전으로 상호 합병의 전략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84 년 가을 태평양을 건너 호건 신부를 통해, 로데릭 회장에게 접근하여 결국 로데릭 회장 방한초청에 성공했다. 로데릭 회장은
포철의 장기적인 경영비전, 강력하고 치밀한 추진력, 사원들의 근면한 근무자세와 높은 사기[士氣] 깨끗한 공장관리에 큰 감명[感銘]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기술협력에 합의하고, 상호협력의 각서를 교환했다. 휘날리는 태극기 양 기업은 합작투자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85 년 50 대 50 의 합작운영으로, 자본금 1 억 8 천만 달러로 철강후발주자인 포스코가 세계 최고 전통의 USS 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1986 년 4 월 1 일 UPI 라는 합작회사를 공식 출범했다. 이날 창립식장에 미국 성조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첫 미국 방문 시 충격[訪問時 衝擊]을 30 년 만에 극복한 것이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 나, 노조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회사는 빠른 속도로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내 친구 고어 클린턴 시절 부통령인 고어 부친이 상원의원이며, 강정결탄 탄광을 가진 광산주다.
처음에는 한국의 포철을 무시하였으나, 후에는 절친한 친교를 맺고 한국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어 후보는 GM 소형자동차공장을 유치한다고 선거공약을 한다. 나는 포스코는 여기에 강판공장을 세우겠다. 연설장[遊說場]에는 환호성이 터졌다. 고어 역시 포스코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그의 영향력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고어 부통령[副統領] 당선 축하파티에도 초청되어 참석하고, 8 년 후 대통령이 되기를 빌었다.
그러나 부시에게 패했다. 빈의 두 친구 포스코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19 개 공장을 건설했다. 유일하게 일본 돈이 아닌 투자는 압연분야의 중후판 공장이다. 투자금액은 5 천 3 백만 달러다. 그러나 포철에 거액의 투자는 자살행위라고 거부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고 1972년 6월 공장을 완공했다. 나는 준공식에서 푀스트의 아팔터 사장이 빈에서 날아와 함께 감격을 누렸다. 광양제철소 건설도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