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져서, 저가 알기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제 9 부 =
사채동결과 자주국방
국가에 이르기까지 가난[家難]을 극복[克復]하고 국가의 자주[自主]기틀을 확립하고 자주, 자립의 확립을 강조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독일 막스 웨버의‘직업을 천직으로 알아라. 근검절약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경영할 수 있다’는 가르침과 같은 뜻으로 통하는 명휘호이다. 아마도 박 대통령이 미국이나 프랑스나 독일 대통령이었다면‘저축은 국력 이라는 휘호는 세계 방방곡곡에 나붙었을 것이다. 8 ․ 3 사채동결[私債凍結]긴급조치[ 緊急措置] 미국의 경기후퇴로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외환율은 급격히 절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채상환비용은 급격히 증가되고 외채상환은 1970 년에 1 억 6 천만 달러, 1971 년 2 억 3 천만 달러. 7 2 년에는 4 억 5 천 5 백만 달러로 늘어났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은 누적되고 급한 기업은 45% 의 사채에 의존하게 되었다. 기업은 연쇄 파산되고 급기야는 금융신용제도의 파탄까지 우려하게 되었다. 미국도 1971 년 경제불항[經濟不況]을 타개하고자, 제1 차 대전 후 대공황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한 긴급경제조치를 취하였다. 닉슨은 임금 동결, 물가의 동결, 각종 조세감면조치, 재정지출의 삭감,
대외 금융 환[金兌換] 정지, 달러의 평가절하, 공정 환율제도의 변동 환율제도의 변동, 대외원조의 삭감 등의 일대 긴급조치를 단행하였다. 고리사체[高利私債] 지급 유에[支給猶豫]로 기업의 이자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한국도 1 년 후 1972 년 8 월 3 일에 8 ․ 3 조치 즉, 사채동결 긴급조치[緊扱措置]를 단행하였다. 기업이 공개주식으로 자금을 조달할 경우 불황으로 이익이 안 나면, 배당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은행융자, 사채는 자금을 조달할 경우 불황에 이익이 발생하지 않아도 고리채[高利債]를 반드시 내어야 한다.
결국[結]局 기업은 부실해지고 기업연쇄부도사태가 우려되었다. 금융신용제도의 위기를 극복하고 1972 년 8 월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모든 기업의 고리사채를 동결 단행하였다. 신고[申告]된 고리사채는 3 년 거치 5 년 상환 융자로 전환되며, 년 40% 의 고리채가 16.2 % 로 인하되었다. 신고[申告]된 고리사채의 총액은 통화량의 약 80% 에 달하였다. 긴급조치로 고리채에서 기업을 살리고, 금융기관의 부실도 대폭 감소시켰다. 1973 년에 투자는 40% 증가하였고, 수출은 100% 증가되었다.
73 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19.3% 로 전년도 6.4% 의 3 배에 달하였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사채동결조치의 성공은 많은 비서관들, 재무부 관료들의 공로가 다대[多大]하였다. 기업공개로 경제력의 과도한 대기업 집중시정도 유도 하였다. 1956 년부터 1973 년까지 17 년간 66 개 기업이 공개되었으나, 1974 ~ 1979 년 사이에 309 개 기업이 공개 증권시장에 상장되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 후, 대기업 집중 경향은 시정되지 않았다. 고속도로 건설[高速道路 建設] 선 개통 후 보완정책 선택 당시
일본의 고속도로 건설비가 Km 당 5 억 원인 것을 한국형[韓國型] 고속도로 건설로 1 억 원으로 건설. 철근 콘크리트보다 비용이 싼 아스팔트로 건설하였다. 4 차선 확장에 필요한 토지를 미리 확보한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박 대통령은 선진국 고속도로 비용의 5 분의 1 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고, 나머지 5 분의 4 로 경인, 호남, 남해, 동해, 구마, 언 양 총 8 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결국 전국토가 1 일 생활권으로 경제생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기타 지역에도 4 차선 토지를 매입하였다.
경부고속도로는 물론 강릉, 속초 4 차선 도로에 필요한 용지도 박 대통령이 매입해 놓은 것이다.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위하여, 방위산업을 위한 계획된 중화학공업 250 만 예비군을 무장시킬 병기공장 건설하라! 미일의 비협조로 결국은 오원철의 아이디어를 대통령에 보고하여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의 동시추진 결정. 기간이 4 ~ 5 년이 걸린다. 대통령은 2 ~ 3년을 원했다.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못 만들고 있는데,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화포, 탱크까지 생산하고 포탄 류는 자급자족하고 군함과
잠수함까지 만들고 있었다. 나는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일석이조의 계획을 세워 박 대통령의 동의를 받았다. 나는 방위산업 육성에 중화학공업이 전제가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북한의 공업력[工業力] 특히 화학공업을 압도하게 되면, 북한의 도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結局] 당초에 5 개년 경제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100 억 달러 투자가 되는 대사업으로 확대되어 갔다. 어떤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정부는 중화학공업의 주요
공업부분으로 방위산업과 직결되며 연관효과가 크고 산업전반에 대한 성장기여도와 부가가치가 높은 국제적 수준에 이를 수 있는 내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철강, 비철금속, 조선, 전자, 화학, 기계 등 7 대 중화학공업을 선정했다. 각각 특별법을 만들어 재정, 금융, 조세, 외환부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철강부분에서 1973 년 7 월에 완공한 포항제철도 연간 850 만 톤으로 확장하는 사업추진을 하였고, 조선 산업도 울산 옥포, 삼성 죽도 조선소가 이때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미에
전자공업단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가난한 집안의 청소년들에게 박 대통령이 선사한 꿈의 선물은 세계기능올림픽에 출전 세계를 십 수 회 재패[制覇]하고 가슴에 금, 은, 동메달을 획득한 어린 영웅들에게 시가행진을 시켜, 기술기능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준 것은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축복이다. 특히 후임 대통령들이 이 문제를 실사구시[實事求是]하라. 영감[靈感]을 얻으리라. 특히 박 대통령은 기술자 양성에 심혈을 다하였다. 박 대통령은 기술자 양성이 도시 중산층 형성에 기여하고,
사회 안정의 기반이 이룩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78 년 9 월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 시험발사 성공. 1979 년에 첨단무기를 제외한 무기의 양산체제가 되었다. 중량이 중형인 M 48 탱크도 만들고,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을 개발 시험발사에 성공하였다. 카터의 철군정책이 방위산업 발전의 촉매제가 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80 년 후반 3 저 호황에 고도성장의 효자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도탄 개발[誘導彈 開發]의 꿈 1978 년 9 월 26 일은 우리나라가 미사일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불기둥을 뿜으며 수직으로 솟아오르고 1 단계 다음 2 단계 점화되어 몇 분 후 목표물에 명중했다는 신호에 통제소[統制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7 번째 유도탄 개발 보유국이 되었다. 그 날 밤 박 대통령의 일기에는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 년 5 월에 유도무기 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돼 불과 4 년 만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관계관들의 참관[參觀]하에 역사적인 시험 발사가 있었다. = 내일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