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사무라이 한명은 조선관군 10명 정도는 모두 베어버릴 수 있는 살인병기로 조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무력을 통하여 사무라이 칼을 제압하는 것은 곧 칼로 칼을 부르는 꼴이었다.
칼의 질서인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쿠가와 막부는 장차 열어갈 전쟁 없는 평화 시대에 배신과 반란의 유전자로 조련 된 살인병기의 사상적 해체는 가장 큰 정책 아젠다였다. 그래서 전쟁이 나도 책임을 전가하며 도망다녔던 등신 선조에 충성을 바치는 한반도 모지래미들의 통치이념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며 사무라이 사상해체를 통해칼을 버리고 책을 들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참근교대와 천하보청으로 번주(다이묘)의 돈줄을 철저하게 말리면서 돈이 융통되며 경제가 융성해졌다. 또한 유럽 문명이기와 학문이 네덜란드를 통해 교역 되면서 문화와 지식은 가공할 정도로 발전했다.
당시 세계의 바닷길과 무역을 장악한 것은 칼빈주의 이념으로 인류 최초로 공화국을 건국한 네덜란드였다. 칼빈주의로 건국한 네덜란드는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고 노동을 신성시 했다. 그 소명은 네덜란드 황금 시대(Dutch Golden Age)를 열게 했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데지마섬을 통한 제한적인 쇄국정책이었지만 서양의 첨단문명과 학문이 속속들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문명의 수입은 일본 에도시대 폭발적인 문화발전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학문은 융성했고 조선의 개씹선비 문화와 학문을 압살하는데는 충분했다.
에도시대 경제 부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조선에서 쫒겨난 은제련 전문가였다. 은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기술을 개발한 장인 김감불과 장례원은 조선에서 천대를 받으며 등신 취급을 받았다. 일본은 그들로부터 회취법(연은분리법)을 배워 이와미 은광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며 은본위 시대 네덜란드와 교역하며 떼돈을 벌었다. 또한 조선에서 건너간 도공 이삼평 등의 활약으로 최고 품질의 채색 도자기가 개발 되면서 유럽을 열광시키며 돈을 긁어 모았다.
에도막부는 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관학(官學)으로 삼게 되면서 개조선의 서원이나 향교 제도를 가져다 260여개의 번에 번교를 세웠다. 번교는 사무라이 교육기관으로 성장하며 사무라이의 정신세계 중심에 주군(主君)에 대한 충(忠)으로 채웠다.
번교에서는 성리학이 그토록 물고 빠는 예학(禮學)은 물론 사서오경, 역사, 주자학 윤리를 가르쳤다. 돈과 영지만 주면 칼질부터 하는 사무라이의 사상은 점차 성리학적 이념이 채워졌다. 이는 사상통제였고 감시였다. 일본 열도 260여군데의 번은 경쟁적으로 번교를 세웠고 에도막부는 주자학 커리큘럼을 표준화까지 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번교 정착에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피로인(被虜人, 임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 본토로 끌려간 조선인)이었던 조선의 성리학자 강항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수영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뱃길에 올랐다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은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당시 일본의 유학은 수양서 또는 관념론에 불과했다. 강항은 그런 일본에 조선식 주자학을 정통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르쳤다. 즉, 조선의 경학, 윤리, 정치 질서가 결합된 모델을 제시함으로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현실정치 이념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곧 통치 기술이라는 실전성을 덧입혀주었다. 그 외 사서오경 강의, 주자 주석 해설, 조선 학문 방식 전수했다.
강항의 이러한 활약으로 배출된 인물들이 번교 교관, 각 번의 학문 책임자, 막부 성리학 수용 창구가 되었다. 조선에서 이미 추악한 정치이념의 극단을 보여준 예학(禮學)이 정치 윤리의 시스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즉 통치에 있어 정적 숙청의 명분과 무기가 되었다.
강항의 활약으로 일본 지식인 사회에는 “성리학의 정통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 있다”라고 인식하게 되었고 일본 성리학의 권위 기준이 된다. 막부 관학을 만든 인물로 평가되는 하야시 라잔의 주자학은 이미 조선에서 정제된 형태로 주자학이 통치 친화적, 원리주의적 형태로 정착 됨으로서 개조선 개씹선비 사회의 온갖 못되고 추악한 버르장머리가 그대로 자리잡게 된다.
에도 막부는 성리학을 보다 확실한 사무라이의 통제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교조화였다. 에도 막부는 간세이 이학금지령(寛政異学の禁)을 내려 주자학(성리학)을 정통으로 고정하고 다른 유학(특히 양명학 등)은 공부하지 못하게 했다. 도쿠가와 막부에 성리학 만이 유일한 정통이었고 이외의 모든 학풍은 통제했다. 드디어 치사량에 해당하는 성리학 독극물이 사무라이 우물에 퍼지기 시작했다. 즉, 260여개의 번에 세워진 번교(藩校 한코, 藩学, 藩学校)는 유교 탈레반의 성지가 되었다, 독버섯의 온상이 된 것이다.
일본 주자학 발전은 하급 사무라이들에 의해 주도 된다. 에도시대 장기 지속 된 평화시대에 상공업이 융성하고 경제가 화려하게 꽃피우게 되면서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상인(초닌, 町人)과 장인에 의해 사무라이의 지위가 격하되고 밀려나게 되면서 칼 잡은 손 반대 손은 자연스럽게 책이 쥐어졌다. 그러나 가난과 신분 격하에 대한 울분은 수백년을 지속하며 축척 되었고, 주자학을 공부하여 운 좋게 번의 하급관리가 되는 것 정도 외에는 사무라이가 할일이 없었다. 몰락한 사무라이라는 울분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주자학을 공부하는 사무라이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근원적인 의문이 자리잡았다. 즉 주자학의 인식론적인 고민이 생긴 것이다. 에도시대는 260여개의번으로 나누진 천황의 제후국을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리렸고, 천황은 막부가 던져주는 개밥그릇이나 빨며 뒷방에 처박힌 늙은이로 기침이나 콜록 거리는 존재로 아무런 권한도 없었고 군대도 가지지 못했다.
성리학 충의 대상은 군주이다. 즉 뒷방 늙은이로 기침이나 콜록 거리는 천황을 위한 충을 도쿠가와 막부가 독점했다. 이러한 도쿠가와 막부가 독점한 충은 주자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꼴이었다. 더구나 상인계급이 지배계층으로 부상하며 천대와 가난에 시달리는 하급 사무라이들은 불만은 충을 독점한 도쿠가와 막부를 향했다.
가난과 소외에 지친 사무라이들은 각성했다. 사무라이의 칼을 통제해야 할 쇼군과 다이묘는 하급 사무라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지 않았다, 사냥개에 고기를 주지 않는다면 주인을 물어 뜯는다. 사무라이들은 우리가 왜 쇼군과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우리의 충은 천황에 바쳐져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불만은 응축되어 미토학으로 발전한다. 미토번의 유학자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신론(新論)을 통해 주자학적 충(忠)은 천황에 있어야 함을 선언했다.
“일본의 국체(國體)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다. 막부는 어디까지나 통치 위임 기구에 불과하다”
충의 궁극적 대상은 천황이 되어야 한다는 미토학의 존왕양이(尊王攘夷)는 메이지 유신의 분기점이 되는 대정봉환으로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미토번의 유학자 후지타 도코는 충을 독점한 도쿠가와 막부의 도덕성을 공격했다. 이러한 명분은 점차 퍼지며 존왕양이 사상은 대중화 되고 정치화 되었다. 19세기 도쿠가와 막부는 천황의 권력을 도적질한 공공의 적이 되었고 하급 사무라이들은 언로를 만들어 더욱 집요하게 도쿠가와 막부를 공격했다.
미토학은 성리학적 역사관까지 무장한다, 17세기 대일본사를 저술한 도쿠가와 미쓰쿠니에 의해 천황 중심의 일본사가 체계적으로 정리 되며 유교적 역사 정통론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일본 고대사가 까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해석되고 정리되며 천황은 신의 후손이라는 신성성의 철학적 개념이 입혀졌다. 조선이 개국하며 만주벌판을 쏘다니며 사냥이나 다니던 이성계의 조상이 용(龍)으로 신격화 되어 육용이 되는 개구라가 일본에도 그대로 재현 된 것이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에 의해 신론(新論)이 저술되며 천황은 단순한 정치 군주가 아니라 짱깨의 천손(天孫) 개념을 입혀 신의 계보를 잇는 존재로 신성(神性)이 천황의 정체성에 입혀졌다. 즉 인간 개백정 개정은 집구석의 백두혈통의 개뼉따구가 생겨나듯 천황은 태양의 후손이라는 신성한 개뼉따구 혈통의 존재로서 태양신이라는 신성(神性)이 정체성에 자리 잡게 된다.
불교가 전래 되기 전 일본의 토속신앙은 남방계 정령신앙 즉 모든 만물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남방계 정령신앙이 작리 잡고 있았다. 산, 강, 바위, 나무. 부뚜막, 똥뚜간, 산속을 뛰노는 곰과 원숭이 등 모든 만물에 신성이 깃든 만물 가미(神)신앙이 일본 토속신앙의 정체성이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며 신도를 대체하지 않고 윤회, 업, 극락, 지옥 같은 관념을 그대로 얹어 신불습합(神仏習合)의 형태로 결합되었다. 부처는 일본 가미(新)로서 일본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타난 모습으로 날조되고 그려지며 독특한 일본불교와 일본신도가 합쳐진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것을 가져다 천황의 정체성에 얹어 천황은 살아 있는 신으로 해석 되었다.
우리나라 절간에 산신령이나 삼신할미를 모셔 토테미즘을 불교가 흡수 포섭하여 병존시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듯 일본은 애니미즘의 정령신앙을 불교애 혼합시켜 신불습합(神仏習合)의 형태로 굳이 신과 부처를 구분하지 않는 정체성이 일본의 신도를 형성한 것이다.
한반도는 무당이 작두에 올라 널뛰며 푸닥거리 하고 천수경을 독송하는 미친년이라면 일본 열도는 부처 마빡에 똥뚜간 가미를 붙여 놓고 대가리 조아리며 화엄경을 독송하고 있는 또라이 이다.
이러한 열도의 정령신앙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신도(神道) 유교 탈레반 교리서인 주자학이 덧붙여지며 천황은 살아있는 신(現人神)으로 초월적 존재로 만들어 충의 대상으로 삼는 미토학(水戸学 ( みとがく))이 완성 된다. 천황은 통치자를 넘어선 신으로 재창조 한 것이다.
사무라이는 고기만 던져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물어 뜯는 주군(主君)의 사냥개였다. 따라서 사무라이는 어떠 고기를 던져주느냐에 따라 칼을 뽑는 단순한 존재였다. 더 많은 질 좋은 고기를 던져 준다면 당장이라도 오늘의 주인을 물어 뜯었다. 그것은 사회질서를 지키는데 칼과 돈이라는 두가지 요소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며 더 이상 사냥개에 칼과 돈을 던져줄 필요가 없었다. 성리학이라는 최강의 가성비 넘치는 이념 통제 수단이 생겨났고 세치혀를 놀려 사냥개를 묶어 둘 수 있었다.
나름대로 사냥개 사무라이 세계는 자신들만 물고 뜯고 싸우면 되었다. 사무라이 칼날이 서로를 겨누었을 뿐 백성을 향하지는 않았다. 백성은 편했다. 그러나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되면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무라이들은 백성의 살과 피를 뜯어 먹으며 명분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신성(神性) 군국주의(軍國主義)로 표출 된다. 즉 개조선 개씹선비 사회처럼 백성의 살과 피로서 통치 되는 추악한 사회가 열리게 됨을 의미했다. 개조선 개씹선비 사회처럼 백성은 그저 뜯어 먹히는 가련한 고기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일본 백성이 조선의 백성 그 꼴이었다.
에도시대라는 중상주의 시대가 깊어 질수록 배고프고 소외 받는 사무라이라는 사냥개는 더 이상 굶주림을 참을 수 없었다. 생존을 위해 사냥개는 고기를 던져줄 주인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천황이라는 고기를 던져줄 주인을 가공해서 만들어야만 했다. 욕심 많은 도쿠가와 막부의 고기를 빼앗는 방법을 천황에서 찾은 것이다. 사무라이는 무든 사냥물을 천황에게 주고 사무라이는 천황으로부터 고기를 뜯어 내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냥개의 고기를 독점한 도쿠가와 막부를 쓸어 버릴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한 성리학적 사무라이가 고민해서 만든 계산법이 천황을 태양신의 후예로 만들고, 살아 있는 신으로 창조하고 일본 열도라는 사냥물을 천황에게 통째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이 된 통치권과 토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호칸)과 판적봉환(版籍奉還, 한세키호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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