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의 혼란이 시작되려는 때 느닷없이 국부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 된다. 부주석은 여운형, 내무부장관은 김구였다. 국내외 그 어떤 승인도 받은 적 없는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된 국부 이승만은 취임 의향 조차 타진 받은 적 없이 타의에 의해 국가수반이 되었다.
명성 높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세워 허수아비를 만들고, 요직에 자신의 수하를 심고 자신의 국내 지지기반으로 권력을 쥐려는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후 20여일이 지나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여운형의 하룻밤 불장난이었다.
광복을 4개월 앞두고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모리스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다. 카이로 선언 후 연합국의 거두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 스탈린은 소련의 얄타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장제스는 모택동과 내전 중에 있어 불참 했다. 이승만은 얄타회담에 임시정부가 참석할 수 있게 부던히 노력했지만 초청을 받지 못했다. 얄타회담은 카이로회담에서 선언한 적당한 절차의 조건이 붙어 있는 조선독립의 후속조치와 독립 후 처리 문제가 비밀에 붙여졌다. 이승만은 비밀에 붙인 내용을 알아보기 위하여 백방으로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힘들어 하는 이승만에게 에밀 구베로가 찾아온다. 그는 비밀에 붙여진 내용을 알려 주었다. “얄타 회담에서 미국·영국 및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조선을 일본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의 영향 아래 두며, 미국과 영국은 조선에 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기로 했다” 라는 소식이었다. 조선의 모든 문제는 러시아에 맡겨졌다는 의미이다.
에밀 구베로를 보낸 사람은 이승만이 조직한 한미협회의 이사 윌리엄스였다.
공산주의 위험성을 1922년부터 경고하여 왔고, 소련의 야망을 오래 전부터 꽤뚫고 있었던 이승만은 사안의 급함을 알고 친구였던 언론재벌 윌리엄 랜톨프 허스트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하여 요로요처에 편지를 썼다. 얄타 회담 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에 오른 투르먼은 국무부 극동국장 대리 프랭크 록하트를 통해 이승만이 알고 있는 내용은 거짓소문 이며 카이로 선언에 따라 조선에 관한 정책은 충실히 이행 될 것이라고 공식적인 답장을 보내왔다.
윌리엄 허스트는 이승만의 언론 활동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세계가 요동칠 때 이승만을 지지하며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아이젠하워를 비겁하다고 맹렬하게 비판하여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했고 한미동맹이 출범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17개 도시에서 일간지, INS 통신사, 3개의 방송국, 출판사 등을 가지고 있는 언론재벌이며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하는 등 미국정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허스트 소유의 각신문사를 통해 얄타회담 밀약이 미국전역으로 퍼졌다. 특히, 그의 간판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에 강력한 비판 기사가 실리며 미국을 비롯하여 국제적인 파장으로 번졌다.
“만일 사실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각서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이곳에 모인 연합국 회의에 외교적 폭발물이 될 것이다”
영국에서도 얄타회담 의혹은 정가를 달구며 처칠은 의회로부터 추궁을 받게 되었다. 처칠은 “비밀 협약은 없었지만, 많은 주제가 다루어졌고, 몇 가지 대체적 양해사항이 있었다”라며 특정되지 않은 양해사항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양해사항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것이 사실화 되고 있었음이다.
레닌은 세계공산화 전략으로 “빚은 동방으로부터 온다”라며 극동지방이 세계공산화의 린치핀 임을 지적했었다. 바닷길이 모두 얼어 붙어 대양진출이 불가능했던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부동항 확보에 기갈이 들려 있었다. 폭력을 정당화 하는 세계공산화전략은 대양으로 해군력을 투사할 수 있는 극동의 부동항은 생명줄과 같았다.
레닌의 동방전략은 막대한 공산화 자금이 조선 공산당에 뿌렸졌다. 레닌의 공산화자금은 2번의 국제공산당자금사건을 일으켰다. 이동휘, 한형권 등은 레닌으로부터 수백만 루블을 공산화자금으로 받아 썼다. 이동휘의 수하 김립은 레닌자금을 관리하다 김구로부터 분노를 사고, 김구의 수하 노정균 등에 암살을 당했다. 독립자금으로 레닌이 준 돈을 김립이 횡령했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자금집행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4선을 지낸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얄타 회담에 참석할 때 극심한 건강상 난조를 보였다. 오랜 전쟁의 피로와 고령까지 겹처 치매의혹까지 받으며 급성 심부전을 앓고 있었다. 루즈벨트의 건강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딸 애나를 비서로 대동하고 회담에 참석했다. 루즈벨트의 건강이상을 미리 알고 있는 스탈린은 소련의 남부의 크림반도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 얄타까지 심신미약자나 다름없는 루즈벨트를 불러들였다. 8,000Km를 비행 한 루즈벨트는 초주검이 되었고 이는 스탈린의 계략이었다.
UN 창설을 주도한 앨저히스는 소련 간첩으로 밝혀졌다. 루즈벨트 행정부 국무차관을 지내며 이승만의 대미정부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무력화 시켰던 인물이다. 미국의 극동아시아 전략, 전후처리문제, 루즈벨트의 건강 등 고급정보는 앨저히스에 의해 스탈린에게 속속 보고 되고 있었다.
얄타회담에서 전쟁 피로감에 시달리며 심신미약 상태에 빠진 루즈벨트는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 하는 약속을 받아 냈지만, 동유럽 지배권을 모두 소련에 넘겨주어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며 공산화 되는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따라서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 하에 둔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전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 일본의 패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날은 불과 천황의 항복이 있기 일주일 전 이었다.
얄타회담이 스탈린의 뜻에 따라 돌아 갔고 있단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처칠은 귀국길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마음에서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공산당을 전략을 훤하게 꽤고 있는 이승만은 얄타회담의 밀약의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한미협회, 기독교 네트워크 인맥 등을 총 동원하여 언론전을 벌렸고, 백악관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밀약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미국과 영국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자 소련이 가세했다.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의 무책임하고 황당한 주장"
이승만은 "밀약설이 사실이 아니라면 3국 정상들이 한국에 관한 비밀 협정을 부인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라"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갈수록 비판강도가 거세졌고, 이승만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트루먼의 입장이 점점 난처해지고 있었다. 결국 일제 패망 직전 3국 정상은 일본에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 포츠담에 모여 회담을 열었고 “카이로 선언의 요구 조건이 이행 될 것” 이라는 조항을 넣어 선언문을 채택한다.
거짓말과 기망, 약속의 파기는 공산당의 정체성이다. 소련은 한반도 점령 계획은 확고했다. 전 후 수습에 바쁜 미국의 사정은 소련의 먹이감이었고 일본항복 일주일 전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진공에 나선다. 원자폭탄으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은 저항을 포기하여 순식간에 만주는 소련에 점령 당했다.
한반도에는 치안 유지 목적으로 주둔한 일본의 군경을 외에는 위협이 될 만한 병력이 없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즉시 육군과 해군 157만명을 동원하여 한반도 점령에 나선다, 1945년 8월 11일 웅기, 나진, 청진, 나남을 점령하고 8월 21일에는 해군과 상륙부대가 원산항을 점령하였고, 함흥과 평양은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점령한다.
동두천까지 점령한 소련의 거칠 것 없는 남진을 본 미국은 그때서야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알아챈다. 다급해진 미국은 부랴 부랴 급조한 조정안을 소련에게 내놓는다. 카이로 선언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보장을 약속했고, 이승만의 공격으로 소련과 밀약했다는 도덕적 비판에 시달렸고, 얄타회담 밀약을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부인한 미국은 다급했다.
"38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38도 이남은 우리가, 이북은 당신들이 점령합시다.“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점령 될 다급한 상황에서 한반도 분할선을 찾기 위하여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과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은 지오그래피에서 제작한 벽걸이 극동지도를 뜯어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38선을 군사경계선으로 소련에 제의 했다. 3.8선은 그렇게 미군 대령 두명에 의해 불과 몇 십분 만에 그려져 탄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트루먼 대통령과 관계자들은 오히려 소련이 흔쾌히 제안을 받아 들인 것에 놀랐다.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 절반 이상을 점령한 상태였고, 미군은 한반도에서 1000Km 떨어진 오키나와에 소련군의 삼분의 일에 불과한 50만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은 38선에 반대하며, 서울 이남으로 훨씬 남쪽을 군사경계선을 하자고 하여도 당장의 방법이 없었다. 동두천까지 내려왔던 소련군은 회군하면서 동두천 은행의 현금을 모두 털어 갔고, 개성에서는 한뿌리의 인삼도 남기지 않고 탈취했다.
원폭 투하로 패전이 완연해지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총독부는 남하 하는 러시군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었다. 대책회의 끝에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도 있기 전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을 만난다.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명령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거래를 제안한다.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는 대신 조선인들이 자력으로 독립된 정부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련군이 나진, 청진을 점령 하고, 평양 하늘에는 소련군 공수부대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 올 때 여운형은 일제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일본 패망을 무엇이 불러 왔는지, 국제관계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 생각 조차 없는 여운형은 패잔병에 불과한 조선총독부와 달콤한 밀약에 취해버린다.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한 여운형은 소련의 한반도 점령 소식을 듣자 건준위에 공산계열 인사의 적극 참여를 독려하고 나선다. 하얀 종이 위에 연필 한자루 들고 일사천리로 건국 된 조선인민공화국은 어느덧 내각 까지 구성 되어 국부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등극 시켜 놓았다.
개인적으로 여운형은 참 해괴한 사람이다.
신학교로서 조선 최고 권위를 가진 평양신학교를 다녔고,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워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적극적인 YMCA 활동도 하였다. 야구는 선수급 기량을 가져 야구단을 이끌고 동경에 가서 야구시합을 하고, 조선을 기독교적인 낙원을 만들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빨갱이 교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며 교리서에 못 박았다. 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물론과 유물사관이 바탕이 된 공산주의는 기독교 최대의 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공산주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도 없다.
여운형은 레닌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고 활동하고 있는 이동휘와 같이 1921년 고려 공산당을 창당한다. 박헌영과 같이 이르쿠츠크 공산당 대회도 참여하며 고려공산당의 촉망 받는 최고 지도자 중의 한명이 된다. 소련을 여행하고 여행기를 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상국을 칭송할 정도로 골수분자가 된 여운형의 공산당 활동은 한 때의 잘못된 판단, 또는 치기 어린 무지로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소련에 가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고 유창한 영어로 볼세비키 혁명을 찬양한다. 상해로 가서 모택동을 만나고, 호찌민과 만나 교류한다. 필리핀까지 날라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 하여 혁명자대회를 개최하려다 쫓겨 나기도 한다.임시정부에서 우익과 좌익의 내부 알력으로 심각한 분열이 일었을 때 여운형은 공산세력을 대거 이끌고 이탈하여 임시정부가 방세 조차 낼 수 없는 한 없이 쪼그라 들게 만들어 김구와 원수지간이 된다.
어느 때는 독립운동 하다 옥고를 치루기도 하고, 전향서를 써서 총독부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천황 반자이를 외치며 반도학생출진보를 써서 조선인 학도병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미군정기에 좌우합작에 전면에 나서고. 좌우합작을 위해 월북하여 수차례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결국 혼란한 해방정국 한복판에서 한지근이라는 청년이 쏜 권총에 암살당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여운형은 그리스도인이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고, 독립운동을 하며 조선 학도병모집에 나서고, 선교사로부터 영여를 배웠음에도 미제국주의 타도에 나서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았다.
여운형은 일본, 중국, 동남아 등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고,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 유창한 영어로 연설을 할 정도로 학식을 갖추었음에도, 조선총독부의 권유와 거래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이 할 수 있을 것 같아 패잔병 조선총독부와 밀약과 거래를 한 것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능성도 없고 명분도 없는 몽니를 부린 이유를 모르겠다.
여운형이 국부가 되는 밀약의 단꿈을 꿀 때 국부 이승만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난마처럼 헝클어진 국제정세에 촉각을 세우며 피 말리는 외교전과 언론전 전선에서 홀로이 싸웠다.
얄타회담 합의서 한 장으로 동유럽 전체가 소련의 수중에 떨어지고 한반도 점령을 위해 150만이 넘는 소련군이 동원 되고, 미장교 2명이 고작 몇십분만에 3.8선을 결정하는 숨가뿐 국제정세를 여운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고서도 조선총독부와 밀약을 맺고 그것을 믿었다면 권력욕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장 6절)
나름 지명도와 영향력을 가진 최고 지도자 중 한명으로 꼽혔다는 여운형이 1945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그 즉시 사라진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는 것이 그 시대의 지식 없는 무지를 표상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소련의 야욕을 알고 있는 이승만은 소련에 농락당한 미국을 전세계에 보여질는 국가체면을 놓고 매섭게 질타했다. 그 덕분에 3.8선이 그어져 남한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이는 기적이었다.
피를 나누며 전쟁을 했어도 하루아침에 베트남을 넘겨주는 냉혹함이 국제 질서이다. 더욱이 당시는 미소 대립의 시대도 아니었다. 전쟁의 피로감에 지친 미국은 동유럽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을 두고만 보았다.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고 해서 미국이 나서야 할 이유도 없었다.
원폭 두 방은 전적으로 조선을 독립시켰다. 그 조차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김구는 백범일지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광복으로 준비 된 광복군 300명을 국내 진공을 시키지 못했다며 분개했다. 그것이 분개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이 독립의 공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분개하는 것 같다. 지식 없어 내 백성이 망함을 자초하고 있을 때, 뜨거운 가슴과 차거운 이성, 빛나는 지성으로 고군분투하며 숨막히도록 긴장 된 국제정세를 읽고, 공격하며 투혼을 불사른 국부 이승만의 노력이 진정한 독립운동이 아닐까 싶다.
김구의 지시를 받은 윤봉길 의사가 홍쿠 공원에 폭탄을 던져 한쪽 다리를 잃은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는 절뚝 거리며 전함 미주리호에 오른다. 그는 의족을 차고 천황을 대신하여 항복문서에 조인을 했다. 시게미쓰 마모루의 의족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함이지만 그 항복문서 조인한 것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 때문일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 된 핵폭탄 때문일까. 무엇이 광복을 가져 왔는지 계산 못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여운형의 낭만적인 건국의 꿈이 돌아 다니고, 한편에는 백주대낮에 저격하여 서로 죽고 죽이며 극단으로 치닫던 좌우대립, 그 속에 수십개의 집단이 얽혀 진흙탕 싸움으로 극단적으로 혼란해진 지식 없어 망할 수밖에 업는 해방정국에 미군주둔은 당연했다.
스탈린과 밀약을 맺은 루즈벨트는 얄타 회담 2달 후 뇌출혈로 사망한다. 4선으로 미국 최장 수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대전을 극복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존경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얄타회담의 과오로 생존을 위태롭게 했다,
가장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공산주의와 대항한 트루먼이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고, 남한의 소련군 점령을 막은 것 그리고 6.25 사변에 즉각 참전을 결정하여 남한을 지켜 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주말에 고향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은 트루먼은 자정이 다되어 급하게 울리는 전화를 통해 6.25 사변 보고를 받고 당일 참전을 결정했다. 그 때는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를 회의적으로 보고 에치슨라인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파병을 결정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트루먼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대답했다.
국부 이승만에게 얄타회담의 밀약을 알려 준 에밀 구베로는 우리에게는 영웅이며 은인이다. 한국에 파송 되어 돌아간 선교사들과 그 가족, 선교사들의 후원자, 이승만의 미국 내 교회를 통해 구축한 인맥이 주축이 되어 조직 된 한미협회는 2만명이 넘는 거대조직이었고 왕성한 활동으로 미국 내 조선에 관한 여론을 주도하며 활발한 언론 활동과 백악관과 미정가에 압력을 넣어 이승만을 도왔고 재정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에밀 구베로를 이승만에게 보낸 사람이 한미협회의 윌리엄스 이사였다. 언론인이었던 제이 제롬 윌리암스는 이승만이 건네 준 3.1운동 자료를 보도하여 미국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승만을 평생 도운 인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여사는 평생을 남편과 같이 조선에 복음을 전하며 근대사의 현장을 지켜 보았다. 평생 근대사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 본 그녀는 어느 날 “조선은 돕기로 하나님이 작정한 것 같다” 라고 했다.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역사의 변곡점에 어김없이 하나님의 돌보셨음을 본다. 지독한 산고 속에 태어난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귾임없이 은혜를 부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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