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의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으로 루터교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제세례파의 독일 계통 메노나이트파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어머니가 읽어주는 독일어 성경을 읽고 자랐다.
아펜젤러가 순교하기 1년 전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주일 오후, 아버지는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성경을 읽으셨던 모습이 생각난다.”라며 슬픔을 달랬다. 아버지의 권유로 아펜젤러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프랭클린 앤 마샬신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아버지의 신앙적 영향을 깊이 받았다.
독일은 종교개혁의 출발지이며, 종교개혁의 중심에 섰던 마르틴 루터의 고향과 활동무대 또한 독일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뇌관은 면죄부(Indulgentia) 판매이다. 성베드로성당 건축으로 천문학적인 몫돈이 필요한 교황 레오 10세, 금융재벌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 교황에게 뇌물을 바치고 대주교가 된 알브레히트 주교, 면죄부 마케팅 전문가 요한 테첼은 교황청에서 얽힌 존재의 대사슬 이었다.
테젤의 세일즈 카피는 탁월했다.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면죄부만 사면 깨끗이 벌을 용서받을 수 있다"
"현세의 자손들이 낸 동전이 헌금함에 '쨍그랑' 소리가 나는 순간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직행한다“
격분한 루터는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다. 루터가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 대문은 대중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리는 게시판 역할도 하고 있었다.
95개조 반박문 제6조와 제35조는 돈에 미친 교황의 가슴을 찢어 버린다.
“교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할 뿐이지 인간의 죄를 사하지는 못한다”
"진심으로 회개한 모든 신자들은 면죄증서 없이도 벌과 죄를 완전히 사할 수 있으리라"
당장 돈줄이 막히게 된 교황은 누구든 면죄부 효력과 판매권한에 대한 논쟁만 하여도 파문을 시키겠다고 맞섰다. 루터에게 회개와 순명을 요구했다. 교황청의 권위와 청문회로 압박했고, 파문장으로 주며 이단으로 몰았고, 암살도 시도했었다. 그러나 루터는 불사조처럼 살아 남았고 열렬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루터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것은 인쇄술 덕분이었다. 루터가 교회 대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의 복사본은 전단지로 인쇄 되어 보름만에 독일전역에 퍼졌고,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면죄부 판매로 돈을 긁어 모으고 있는 교황은 분노로 들끓고 있는 대중이 두려웠다.
루터는 "독일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 대한 고함"을 써서 곪고 있는 교황 상처에 한줌의 소금을 집어 문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교황이 준 라틴어 파문장을 비텐베르크 시민들 앞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읽어주고 그자리에서 불태우며 조롱했다. "독일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 대한 고함"은 초판 4,000부가 인쇄되어 2주만에 매진이 되었고 15판이나 더 인쇄를 했다.
무소불위의 교황을 무기력하게 만든 인쇄술 발전에 대하여 독일작가 세바스티안 브란트는 이렇게 말했다.
"인쇄술의 발달로 한사람이 과거에는 수천일 동안 필사해야 생산할 수 있었던 양을 단 하루만에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교황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를 향한 나약한 저주 뿐이었다.
"주님의 포도밭에 멧돼지 한마리가 날뛰고 있나이다!!"
인쇄술의 위력을 깨달은 루터는 30년 동안 15일에 한 번씩 책이나 팸플릿을 쓰는 초인적인 집필활동을 통해 종교개혁을 완성시켜 간다. 루터는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글 절반 이상은 8쪽 이하의 전단지 형식으로 짧게 썼고, 독일 국민은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쉽게 독일어로 썼다.
대중은 루터가 짧고, 읽기 쉽게 작성한 몇 장의 팸플릿을 읽으며 불치병에 걸린 카톨릭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루터의 책과 팸플릿은 1년에 수십만권이 인쇄되어 뿌려졌고 종교개혁의 거대한 물결이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루터의 책과 팸플릿을 읽은 대중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열광했다. 프로테스탄티즘 출판물은 거대한 자본을 가진 카톨릭의 출판물을 압도했고 루터는 독보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고종의 후궁 엄비는 한성감옥 서장으로 부임하는 자신의 측근인 김영선을 따로 불렀다. 한성감옥에 수감 된 이승만을 잘 보살피라고 지시한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초인적인 집필활동과 번역작업, 독서를 했다. 김영선은 이승만의 집필활동에 방해 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하여 주었고 이승만의 부모 등 가족의 생활비를 보태주곤 했다.
매일밤 처형되는 사형수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생사를 넘나들며 하루에 15시간씩 독서와 집필을 했다. 초인적인 집필활동과 선교사들이 넣어준 세계 최신서적 500여권을 읽고, 번역도 하였다. 감옥에서 명저 독립정신을 비롯한 수십편의 책을 썼고, 영한사전을 만들고, 수백편의 논설을 썼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수감 되기 전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 제국신문의 주필로 활약하며 조선백성의 각성을 위해 살인적인 집필을 하며 논설을 실었다.
한성감옥에 수감 되기 전 제국신문 편집인으로 활약했던 이승만에게 제국신문의 사장 이종일은 끊임없이 논설을 부탁했다. 새끼줄 처럼 꼬아서 감춘 논설문은 간수와 면회자를 통해 몰래 빠져 나가 제국신문에 실렸고, 논설은 기명 또는 무기명으로 제국신문에 실었다. 죄수였기에 대부분 무기명으로 기고했다. 기명 논설만 75편에 달했다.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가 정기적으로 논설을 쓰면 신문 판매 부수가 늘었고 정치적 압력으로 쓰지 못하면 다시 줄었다.
엄비가 새로 부임하는 교도소장 김영선을 불러 특별히 부탁한 것은 제국신문에 실린 신문 논설 때문이었다. 고종의 부인 엄비도 국부 이승만의 신문논설에 열광했던 애독자 중 한 사람이었다.
국부 이승만은 평생 글을 썼고 신문을 발행하고, 잡지도 발행했다. 수천편의 기고문과 논설을 썼다. 수십권의 책을 저술했고, 독립정신은 영원한 보수의 신앙고백서가 되었고, Japan Inside Out (일본내막기)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군정청 시절 80%가 공산주의 국가를 염원하는 국민을 꺽고 대한민국을 자유주의 민주국가로 건국한 이승만의 초인적인 의지는 글쓰기에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은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에 학생회를 만들도록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승만은 협성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며 일반인도 협성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여 학생회를 넘어 사회활동으로 확대시켰다. 협성회는 협성회회보를 만들어 신문과 같이 논설과 내보와 외보를 실어 발행 되었다. 당대의 문장가 이승만의 시작은 협성회회보 주필로 활약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웨슬리안이다. 아펜젤러는 요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를 조선선교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읽어주는 독일어 성경을 들으며 자랐고, 아버지가 믿은 루터교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독일 태생 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교황청을 굴복시킨 인쇄술에 주목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중국에서 16년간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에게 한국으로 와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올링거 선교사는 중국 최초로 근대학교인 복주 중서학원을 설립하고, 중국 최초의 한문신문인 “순산사자”를 발간하였으며 많은 전도서를 출판하였고, 그가 쓴 설교학과 목회학 저서들은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 신학교 교재로 채택 되어 쓰여질 정도로 유능한 베테랑 선교사였다.
아펜젤러와 올링거는 배재학당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한다. 올링거 선교사는 아펜젤러가 설립한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자 의사 박에스더에게 세례를 베풀며 아펜젤러의 선교을 도왔다.
아펜젤러는 봉건사회의 조선을 깨우기 위하여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과 출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재학당 교내에 설립한 것이 삼문출판사 이다.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위원회를 이끌며 성서번역을 주도했다. 번역 된 성서는 삼문출판사에서 출판했고, 기독교 신문인 대한그리스도회보를 발행하였다. 많은 기독교 소책자를 인쇄하여 복음을 전했다.
삼문출판사는 이승만이 주필로 활약하는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일반인도 읽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하고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게 하여 세계지리학 등을 가르치게 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인쇄를 삼문출판사에서 했다.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많은 대중이 읽게 되면서 독립협회가 만들어지고 잠든 백성을 깨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이며 여행가인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자신의 저서에 독립신문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
“서울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서재필 박사가 1896년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 한 것이다. 이 신문은 영어와 조선어판으로 3주에 한 번씩 나오는 쪽 신문이다. 『독립신문』은 1897년 초에는 네 쪽으로 증면되고 영어판과 국어판으로 나뉘어 발행되었다. 그 자신의 나라와 시국에 대해 무지한 조선 사람과 서울의 떠도는 소문에 그가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들은 이러한 시도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으며 국민을 계몽하는 데 최대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사법부와 행정부의 비행에 대하여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신사로서 자신의 조국이 부강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언문으로 된 신문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소년들의 모습과 가게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들의 광경은 1897년에 나타난 진귀한 장면이다.
이승만은 협성회회보를 매일신문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1998년 5월 16일자 매일신문을 통해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이권을 요구한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에 인접한 사방 10리의 토지 매입을, 프랑스는 평양의 석탄광산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부설공사에 사용하겠다며 고종에게 외교문서를 보낸 것을 폭로한 것이다.
분노한 여론이 들끓자 궁지에 몰린 프랑스와 러시아는 계획을 철회했다. 제국신문은 청년 이승만이 러시아와 프랑스를 굴복시킨 사건을 두고 “외국 공영사도 이 무세(無勢)한 종이조각을 꺼리기를 군사 몇 만명 보다 어렵게 여겼다”라고 논평했다.
1901년 1901년 1월 21일 필라델피아 강연장에서 출판물을 통한 선교활동 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우리 감리교출판소(삼문출판사)는 1896~1900년 사이에 14,500,000면에 달하는 감리교 문서를 팔거나 나누어주었다. 우리 성도들은 감리교 책값으로 1898년에는 161원, 1899년에는 231원, 1901년 1월부터 5월 9일까지 200원을 지불했다(중략) 책과 전단들을 가장 활발히 읽는 곳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두어 들인다는 점을 발견한다"
1896~1900년, 4년동안 아펜젤러는 1,450만 페이지 에 달하는 인쇄물과 전단지를 배포했다. 루터가 뿌린 인쇄물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출발은 토마스 선교사가 준 성경을 박영식이 벽지로 쓰던 종이가 귀한 그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이 되지 못하던 시절 이었다. 심각한 문맹율로 신음하던 시대이다. 1450만페이지의 성서와 계몽 전단지가 퍼져나가며 대중에게 문자생활을 보급했다. 더하여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 매일신문까지 매일 매일 배포되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지적했다. 개화의 3요소는 교회와 학교, 신문이다. 이 땅의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는 개화의 3요소를 모두 가지고 봉건폐습에 신음하는 조선사회의 사회적 성화에 위해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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