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맥주, 백화점, 택시가 생겨난 것은 언제, 어디일까?
세계 열강의 각축창이 되었던 상해 또는 홍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국이다.
일러전쟁의 전리품으로 일본은 러시아가 부설한 만주를 관통하는 남만주 철도를 얻었다. 일본은 남만주 철도에 당시 일본이 가진 기술력을 집중하여 증기기관으로 최고속도 130Km를 달릴 수 있는 특급열차 아시아호를 만들었다. 당시 아시아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기차였고, 아시아호의 기술력을 발전시켜 오늘날에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신간선을 가지고 있다. 부산에서 신경 - 베이징을 시속 100Km로 누비며 만주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14일에 도착했다. 동양에서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건설했다.
만주국을 일본의 괴뢰국 정도로 치부하며 그곳에 있었던 조선인 선각자를 친일파로 매도하기 바쁘다. 황실의 후예인 영친왕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육군중장까지 진급했다. 같은 조선인 홍사익 장군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각고면려의 노력으로 일본군 중장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노예근성에 찌들은 조센징은 영친왕은 당대의 애국자로 홍사익장군은 친일파로 욕하기 바쁘다. 황실의 피라면 배라도 가르고 죽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충직하게 일본에 협조하고 육군중장까지 진급하며 호의호식했다. 아니 등신새끼 고종의 피붙이 모두가 일본의 개가 되어 호의호식했다.
그러나 홍사익 장군은 육군중장까지 오르며 온갖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조선인의 이름으로 죽었다. 민비 같은 개쌍년을 명성황후라 빨아주며 노예근성에 찌든 조센징에게 홍사익 장군의 가치를 말해본들 입만 아풀 것 같다. 홍사익 장군은 조선인을 자유롭게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입교한 조선인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김 없이 배워라.
만주국을 일본의 수탈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모지리 밖에 없다. 만주국 건국 직 후 포드 자동차와 제너럴모터스 등 미국 기업, 홍콩과 상하이 은행, P&O 영국기업 등을 비롯한 각국의 대기업들이 만주국에 지점을 두고 영업하였다. 만주국에는 러시아와 교역하기 위한 영구, 안동, 대련, 뤼순 등 자유무역도시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및 독일 무역상과의 교역을 위한 치치하얼, 하얼빈, 훈춘 등 자유항도 있었다. 만주국은 일본과 수탈관계의 식민국이 아니라 영국과 미국처럼 교역관계의 독립된 분업적 교역관계였다. 만주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동서양의 문명이 만나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1920년대 앞다투어 동경을 갔지만, 1930년대에는 너도나도 앞다투어 만주로 갔다. 만주국의 새롭게 건설 된 문명과 질서는 미개한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의 지식인과 젊은이에게 그토록 갈망하는 새로운 국가와 세상의 갈증을 풀어준 더 없는 기회였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만주족 등 다민족이 어우러진 다민족 다문화 국가의 수도 신징(新京·현재의 창춘)은 시가지, 상·하수도, 수세식 화장실 등에서 근대의 첨단을 달렸고 경제, 산업, 건축, 도시계획, 영화, 음악, 체육 이 폭발적으로 팽창되고 발전하였다. 이민의 나라 미국이 이질적인 모든 문화를 녹여 미국을 만들었듯 문화의 용광로가 만주벌판에 펼쳐진 것이다. 불과 철도로 14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유럽으로부터 선진문명이 직수입되고 다민족의 문화와 융화 되어 만주국이라는 새로운 문명이 창출 되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타들어가듯 목이 마른 조선의 지식인과 젊은이에게 만주국은 타는 목마름을 기꺼이 적셔 주었다.
새로운 문명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모더니즘과 창작에 목마른 조선의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봉건질서 잔재에 신음하는 재능있는 조선의 예술가들이 만주로 몰려 들었다. 대한민국 실내악의 초석을 다진 전봉초를 비롯해서 김동진, 안병소, 이재옥 등 조선인 음악가들은 신경교향악단 내에서 중추로 활약했고, 만주국은 이들이 직업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는 귀중한 무대를 제공했다. 한국 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윤봉춘도 만주에서 자라며 새로운 문명의 DNA를 이식했다. 만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고 그 시대를 풍미한 유치환, 이태준, 한설야, 강경애, 백석, 김팔봉ㆍ민태원 등의 문학가들이 만주에서 활약했다.
경제발전과 산업화는 예술을 꽃피우는 두터운 거름이 되었고 일본 천엔 지폐에 새겨진 일본 근대문학의 개척자 나스메 소세키도 만주국에서 활약했다.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중공 군가의 아버지가 된 정율성,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도 만주에서 컸다. 이들의 작품에 중국, 일본, 러시아, 조선, 서양의 요소들을 뒤섞었다. 화려한 대중문화도 꽃을 피웠다. 부산 ~ 만주 ~ 베이징을 잇는 탄환처럼 달리는 특급열차 안에는 지금도 열광하는 트롯트 대중가요가 울려 퍼졌고 조선과 일본에는 500여곡이 넘는 만주를 소재로 한 유행가가 거리를 휩쓸었으며 조선의 유랑극단이 만주벌판 구석 구석을 누비며 엔카를 통해 고향의 향수를 달래 주었다.
만주국은 조선의 지식인에게 그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었다.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일권 국무총리, 만주건국대 교수를 역임한 최남선, 최규하 국무총리, 강영훈 국무총리, 동국대 총장 이선근, 김일환 내무부 장관, 이한림 건설부 장관, 황종률 재무부 장관, 오정수 상공부 장관, 고재필 보건사회부 장관, 서범석ㆍ박창해ㆍ강문봉ㆍ강필선 국회의원, 이주일 감사원장, 이인기 숙명여대 총장, 이민재 강원대 총장, 신기석 영남대 총장, 송석하 민속박물관장, 원용덕 헌병사령관, 조권순 유한양행 사장, 배응도 신동아상사 사장, 백선엽 참모총장, 김백일 일군단장,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 해병대 사령관 김일환 상공부 장관 등 수 많은 인재들이 만주의 건국대학교, 대동학원, 신경군관학교, 봉천군관학교에서 수학하고 만주국 경영에 참여했다.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인은 만주국의 3.4%에 불과했으나 조선인 의사는 전체등록의사의 13%에 이르렀고, 1만명에 이르는 관료와 공무원, 3천명에 이르는 교사가 활약했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은 고스란히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의 초석이 되었다. 만주국의 경험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패망 후 일본경제 재건의 밑거름이 되었다. 만주국 산업화를 이끈 기시 노부스케와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훗날 수상과 외교부장관이 되어 패전 후 일본재건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과 지식은 대한민국으로 전수 되어 한일국교정상화와 대한민국 산업화에 막대한 공헌을 남겼다.
일제식민시대가 근대사법 질서의 도래와 사유재산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주었다면 만주국은 봉건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미개한 사회에서 근대문명 국가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대구사범학교의 교사직을 벗어 던지고 어느날 만주로 간 박정희의 운명은 앞으로 펼쳐질 대한민국의 운명과 궤적을 같이하게 된다.
박정희의 운명을 결정지은 만주국의 발전은 청년 박정희의 더운 피를 끓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진 박정희의 어깨는 만주국에서 시작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