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2016. 11. 24. 0:27
긍정파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부가가치세에 대하여 가부간에 말하지 마라. 좋다는 말도 하지 말고 문제 있다는 말도 하지 마라. 말하고 싶으면 옷을 벗고 나가서 말해라." - 1981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청와대 사정비서실이 중심이 되어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의 폐지문제를 제기하자 했던 말의 내용 중, 기업과 정부의 극렬 반대에 맞서 전두환이 부가가치세를 채택-유지한 결과 부가가치세는 오늘날 정부 예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세목 중 하나가 되었다
"이봐요, 서 박사. 환율인상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에요. 환율을 올린다고 수출이 장기적으로 늘어난다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물가상승 효과도 함께 따져봐야 할 게 아니오? 환율을 올리면 물가를 자극할 게 뻔한데, 왜 그 생각을 못하는 거지? 물가가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는 내 앞에서 환율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시오." -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서상목 KDI 부원장의 환율인상 건의에 반발하며 했던 말의 내용 중, 국제수지가 적자인 가운데 수입개방정책을 추진할 때였으므로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 환율을 인상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경제부처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그 결과 물가안정은 전두환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 자료들을 수집하여 글로 올린 이유와 방법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 자료들을 수집하여 묶어 이렇게 글로 올리게 된 계기는 전두환이 분명 씻지 못할 과오가 있지만, 그의 공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이 되어 조명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이전에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자료들도 수집하여 올린 바가 있기 때문에 올리게 되었으며,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각계 각층의 전문가들의 냉철한 평가와 관련된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된 것이 별로 없는 것에 자극을 받아 이렇게 올리게 되었다. 본 글에서 인용될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관련해서는 아주 정확한 출처를 통해 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언급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음을 앞서 밝히는 바이며, 이를 통해 보다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연구가 온라인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자들이 보다 균형잡힌 사고를 할 수 있길 바라는 뜻에서 이렇게 올린다.
"전 대통령의 반대자들이 시인하든 시인하지 않든 간에 전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한국의 이념적 스펙트럼(분광)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다. 대부분 전 대통령의 공적으로 돌려야할 업적으로서 경제와 학원, 그리고 지방행정에 대한 중앙통제를 완화했다." - 1985년 3월 11일 미국의 가 논평한 그의 내용 중
"우리나라는 1960년~1970년대에 경제개발 시대에 매년 두자리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으며 1970년대에는 물가상승률이 24~25%에 이른 적도 있었다. 이런 인플레이션이 잡힌 것은 5공화국이 들어서고 전두환 정권이 강력한 물가안정책을 펴면서부터이다." - 2013년 6월 5일 <조선비즈>가 논평한 글의 내용 중
"현실적인 운영으로 국위를 높인 한국대통령 - 취임 후 6년 4개월이 지난 전 대통령의 통치역량은 강력하다. 집권기간중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플레를 억제하는 등 내정면에서의 실적과 88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 88서울올림픽유치 성공 등을 통해 국위를 내외에 고양시킨 것이 큰 업적이다." - 1987년 1월 3일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신년특집 기사에서「87년 국제정치를 움직일 인물」 21인 중 한 명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선정하면서 밝힌 내용 중
"경제는 언제나 전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이다. 지난 80년 한국경제가 격심한 불황을 겪고 있을 때 집권, 그해 실질적으로 5.2%의 감소를 경험했으나 경제성장을 되찾고 인플레를 진압했다. 작년(84년) 경제성장은 7.5%를 기록했고 소비자물가는 2.3%의 상승에 그쳤다. 유리한 조건의 외화차관도 한국의 국제적 신용도를 말하는 것이다." - 1985년 10월 2일 영국의 가 논평한 글의 내용 중
"그가 죄업만 잔뜩 지은 것은 아니다. 재임 7년 6개월 동안 3저 호황 속에 국민 1인당 국민총생산(GNP)을 1500달러에서 4300달러로 3배가량 성장시켰고, 수출 규모는 100억달러 남짓에서 600억달러로 6배 가까이 키웠다. 물가는 안정적이었고 올림픽 유치도 성과다. 상왕 노릇을 하려다 좌절됐지만 단임을 실천한 것도 의미가 있다. 정치인 전두환의 공(功)은 이처럼 적지 않다." - 2005년 5월 17일 <세계일보>가 논평한 글의 내용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손님을 맞았다. 미국 예일대 경영대학원생들로 한국인 지도교수를 따라 1980년대 한국경제의 압축성장 비결을 듣겠다며 간담회를 요청하자 받아들인 것이다.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이순자 여사는 현직 영부인시절처럼 연보랏빛 한복을 차려입었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간담회에서 전 전 대통령은 7년 단임으로 임기를 마친 것과 관련해 뒷얘기를 소개했다." - 2012년 3월 14일 수요일 JTBC에서 했던 JTBC 뉴스10이 단독으로 취재했던 것의 내용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에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경제정책의 3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들 세 마리의 토끼 가운데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아 쩔쩔매는 판에 그는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이같이 경이로운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만큼 국민들에게 인기 없는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는 점이다." - 1987년 전두환 정권의 임기말에 미국의 경제신문으로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이며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경제지인 에서 논평한 글의 내용 중
"2차 오일쇼크때 전두환 정권은 말 그대로 동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결했다. 임금도 동결했고, 예산도 동결했으며, 추곡 수매가까지 동결했다. 물가가 두 자리 숫자로 폭등하던 시점에서 국민들에겐 대단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신군부 정권의 가공스런 위세 앞에서 이 모든 것은 가능했다. 그러기에 ‘제2차 오일쇼크’는 인플레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지 않고 그후 고성장, 경상수지 흑자로 반전될 수 있었다." - 박태견,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문화일보, 국민일보, 평화방송의 정치부, 경제부, 국제부 기자를 거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을 창간해 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주간을 역임했다.〈손석희의 시선집중〉등 MBC, KBS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경제 및 시사해설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 ‘뷰스 앤 뉴스’ 대표로 있다ㅣ2008년 7월 29일 내일신문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정철학으로 물가 잡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전 정부 출범 직전 해인 1980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대였다. 이는 2차 석유파동 후유증 때문이었다. 전 전 대통령에게는 `경제는 곧 물가'였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라면 공권력까지 동원했다. 라면은 전 정부 7년간 개당 100원으로 꽁꽁 묶였다. 공공요금 동결은 예사였다. 물가를 쥐잡듯했다. 그 덕택에 1982~1987년 평균 물가상승률은 3.5%로 떨어졌다." - 2010년 12월 27일 <강원일보>에서 논평한 글의 내용 중
"한국의 IT산업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엘리트 관료, 특히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시절 사실상 '경제대통령' 역할을 맡았던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 1980년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게 된 김재익은 이후 오명을 경제과학 비서관으로 발탁했으며, 오명이 1981년 5월 체신부 장관으로 진출하는 데도 적극 지원함으로써 향후 한국전기통신공사 발족,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CDMA 상용화 등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세계적인 성공사례인 1980년대의 한국의 정보통신혁명은 이처럼 한 조용한 개혁주의자의 창조적 발상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 류현성, 서울대 불문과 출신으로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연합뉴스에서 정보통신 분야 기사를 10여 년간 다뤄온 현장기자이다. 연합뉴스에서는 외신부, 국제경제부,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 정보과학부, 경영기획실 등에서 근무하였고 뉴미디어 전략기획팀장을 맡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 중반기부터 정보통신부 출입을 시작해 참여정부(노무현 정부)와 현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IT분야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기사화했다. LG 상남재단의 지원으로 미국 미시간주립대학(MSU)에서 1년간 미국 IT정책 분야에 대해 연수를 했으며, 2007년에는 서강대학교 OLP(오피니언리더스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현재 연합뉴스 산업부 부장대우이다ㅣ그의 저서 신화는 계속된다> p16, p24
"전두환 정부 시기에는 주로 과학기술 관련 연구기관들이 발달하였다. 비록 민주화 요구에 따라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국가 주도의 정책지식 생산 구조가 유지되는 양상을 보였다. 안팎으로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 처해 있었던 전두환 정부는 정통성의 결여로 인해 경제적인 성과에 집착하였다. 이후 어느 정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자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졌으며,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라는 파고에 직면하여 국내 산업의 대대적인 개편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기업들이 민간 경제연구소를 연이어 설립하면서 정책지식 생태계 내에 변화가 일어난 것도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책지식 생산기관들이 싹을 틔운 것은 1987년 이전 권위주의 정부 시기로, 그 설립 배경이 정부의 필요와 무관하지 않았다. 몇몇 기업 부설 연구기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책지식 생산기관들이 정부 주도로 설립되어, 1987년 이전의 정책지식 생태계는 다른 부문에 비해 공공 부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 김선빈(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김창욱(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 예상한(객원수석연구원), 윤순봉(부사장), 윤영수(경영전략실 연구원), 이갑수(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채승병(경영전략실 연구원), 강원택(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권기붕(경희대학교 NGO 대학원 교수, 김웅희(인하대학교 국제통상학부 교수), 박인휘(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소준섭(국회도서관 입법정보실 해외자료관), 이준웅(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준(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공동저술한 <대한민국 정책지식 생태계> p90~p91
"박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신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사실 그는 통치력은 있었지만 경제에는 문외한이었다. 제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까지 겹쳐 1980년대 초반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이다 보니 간섭할 수도 없었고, 사실 간섭도 거의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경제는 순수 관료와 석학들의 몫으로 돌아갔고, 우리나라 경제 역사상 이처럼 독립된 경제 시스템을 가진 적도 없었다. 당시 경제사령탑인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전권을 위임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아무리 힘 있는 천하의 권력자라도 나라 곳간에 함부로 간섭하거나 손을 댈 수 없는 독립체제로 굴러갔던 것이다. 일부 친인척과 개인 비자금 문제는 있었지만 경제 관료들의 국가 경제관만큼은 뚜렷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덕분에 우리나라는 경제구조상 가장 높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중동 특수도 특수지만 개별소득도 고르게 상승되었고, 국가 경제도 전반적으로 원만했다. 동시에 3저 호황에 따른 국제수지 흑자로 시중 돈도 넘쳐나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은 부분적 투기와 전반적 상승 현상을 보였지만 그때그때마다 부양책과 안정대책을 번갈아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고도 경제성장치 + α 정도였다. 따라서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에게나 희망이 보일 정도로 안정되었다." - 이승화, 건국대를 졸업하였고 서울시공무원과 보험회사의 보험금심사 법무담당으로 일했으며, 제4회(1989년) 공인중개사로 중개업계에 입문하였다. 부동산중개협회의 ‘전문상담위원’으로 수많은 상담업무를 맡아왔고, ‘미래부동산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부동산 시장과 정책을 다각도로 연구하였다. '미래를 생각하는 공인중개사들의 모임’의 강사와 선임연구원 역을 해온 순수 된장파 이론가로 손꼽힌다. 8.31부동산 대책 등 정부 측과 시민단체에도 자문과 이론을 제공하기도 했다ㅣ그의 저서 <꾼들의 부동산 투자비법> p95~p96
"전두환 정권 때의 강권정책들이 모두 국민의 반감을 샀던 건 아니다.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몇몇 민생정책에선 군인다운 '과감한' 추진력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삼청교육대만 해도 그렇다. 무자비한 조치로 전국에서 6만 여명이 영장 없이 체포돼 군부대에서 가혹한 '순화교육'을 받았고, 무려 54명(국방부 통계)이 교육 중에 사망했다. 하지만 억울한 피해와는 별개로, 항간에선 "못된 놈들 다 끌려 가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말도 나돌았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강권은 경제정책에서도 작동했다. 그 때 제2 오일쇼크의 여파 속에서 물가를 안정시킨 것도 어찌 보면 강권통치의 '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저물가정책은 고도성장 시대 이후 새로운 경제발전 방향으로 '성장 보다는 내실'을 강조한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안정화 기조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물가를 잡는 덴 김 수석에 대한 전두환의 전적인 지원과 금융과 산업 전반에 걸친 정부의 강력한 가격 개입이 작용했다. 당시 국민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또 하나의 강권정책 중의 하나가 바로 1980년 '7ㆍ30 교육개혁조치'에 따른 과외금지조치다. 삼청교육대처럼 이 조치도 계엄 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체제에서 강행됐다. 사교육 폐해가 민생불안 요인으로 꼽힐 정도로 심각하자 일거에 대학 재학생의 과외교습 및 입시 목적의 재학생 학원수강 등을 아예 금지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몰래바이트'니 '비밀고액과외'니 하는 신풍속도 생겨났지만 전반적으론 과외와 재학생 학원수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과외금지조치는 당시 여론조사 등을 보면 꽤 폭 넓은 지지를 얻었던 게 사실이다. 현대사회연구소 등이 5공화국 당시 6차례에 걸쳐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61~85%가 과외금지에 찬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 2012년 10월 28일 <한국일보>에 장인철 논설위원이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경제안정을 통해 서민이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국내 경제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1979년 18퍼센트에 달했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980년에는 상승 속도를 더욱 높여서 물가가 30퍼센트 가까이 올랐다.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중화학공업 부문에서는 중복, 과잉투자로 인하여 거의 모든 중공업업체들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였다. 억압적인 경제정책으로 시장은 자율성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난감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경제는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김재익을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모셔왔다. 김재익은 1980년 9월부터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순직하기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경제수석으로 일했지만 이 시기 동안 그가 계획했던 정책들은 우리 경제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토대가 되었다.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낮은 금리와 낮은 물가를 유지하는 정책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그의 경제관이 그대로 경제정책에 반영되어 안정과 자율, 개방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정책이 세워졌다. 즉 성장에서 물가안정으로, 정부주도 경제운용에서 민간주도의 시장경제로, 국내산업 보호에서 수입개방과 경쟁 촉진으로 경제정책의 틀이 바뀌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독과점을 규제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한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목적으로 1980년 12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정부가 한 자리 수의 물가안정을 내걸었을 때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국가가 물가안정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1982년 물가상승률 5퍼센트 대의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83년에는 국민소득이 2천 달러를 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그동안 적자를 기록했던 자동차, 전자, 철강 등의 중화학공업 분야 기업들의 매출액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경영실적이 좋아져서 모두에게 이익을 내게 되었다. ······ 1986년부터 1988년까지의 3년 동안 한국경제는 경이적인 경제 실적을 기록했다. 10퍼센트가 넘는 경제 성장률과 3퍼센트 미만의 물가안정, 연 100억 달러를 웃도는 국제수지 흑자는 일찍이 꿈꿀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러한 실적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시장중심의 경제체제로 바뀐 경제정책의 효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장 상황이 한국 경제에 아주 유리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른바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라는 3저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 석혜원, 서울대학교 소비자 아동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현재 메트로은행 서울지점 부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ㅣp105~p106, p125
2009년 3월 17일 프레시안에서 논평한 글의 내용 중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을 받은 1980년(-1.5%)과 IMF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6.9%) 두 해를 제외하고 매년 성장해왔다. ······ 정권별로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따지면 전두환(9.3%), 박정희(8.5%) 등 군부독재시절이 가장 높다. 당시 한국이 산업화를 막 시작한 개발도상국가였다는 점, 국가주도 경제체제, 대외 경제여건의 호조, 올림픽 특수 등의 결과다. ······ 전두환 정권의 높은 경제성장률은 세계경제 호황 덕을 많이 봤다. 2차 오일쇼크(79-80년)로 엄청난 오일머니를 챙기게된 중동이 이 돈을 풀면서 또 한번 중동건설 붐이 불었다. 또 각국이 침체된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실시하고 85년 '플라자 합의'로 세계경제가 본격적인 호황기에 접어들게 됐다. 이후 86-88년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3저 호황'이 펼쳐졌다. 또 전두환 정권은 국가 주도의 물가안정정책, 산업정책 등을 통해 고성장을 이룩했다." - 2009년 3월 17일 프레시안에서 논평한 글의 내용 중
1997년 10월 6일 경향신문이 '전문가 30인이 본 역대대통령 리더십'에 대해 총 전문가 30인이 평가한 목록을 차트로 만들어 썼던 기사의 내용 중
"전대통령의 경우는 김재익씨 등 뛰어난 테크노크라트들을 발탁, 자신이 모르는 분야는 전적으로 위임하고 신뢰해 일정부분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지적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나머지 대통령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위한 행정·경제지식이 미흡했다. 다만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취임하자마자 밤새워 경제공부를 하면서 지적능력 향상에 노력한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1997년 10월 6일 경향신문에서 '전문가 30인이 본 역대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평가의 내용 중
<한국대통령통사>에서 분류한 '전두환 대통령 업적과 평가'의 내용 중
2006년 7월 10일 머니투데이가 국내 유수의 헤드헌팅 회사에서 활동 중인 32명의 헤드헌터(기업의 임원이나 기술자 등 고급인력을 필요로 하는 업체에 원하는 인력의 선정에서부터 평가, 알선까지 조사과정을 거쳐 적정인력을 소개하는 직업)들을 대상으로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과 총리, 경제부총리 등의 적정 연봉을 직무 능력을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
"대통령과 총리, 경제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에게 적당한 연봉은 얼마일까.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인재를 추천하는 헤드헌터들은 이들의 몸값을 어떻게 평가할까. 전·현직 대통령이나 국무위원 경력자 가운데 헤드헌터들이 가장 잘했다고 평가하는 인물은 또 누구일까. 헤드헌터들에게 시장경쟁 원리에 의해 경력자들 중에서 대통령과 총리, 경제부총리 등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누구를 뽑을까. ······ 머니투데이가 국내 유수의 헤드헌팅 회사에서 활동 중인 32명의 헤드헌터들을 대상으로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과 총리, 경제부총리 등의 적정 연봉을 직무 능력을 기준으로 조사해 봤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1억9704만원으로 2위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 헤드헌터들이 대통령의 연봉을 평가하면서 기준으로 삼은 것은 경제발전, 물가안정, 양극화해소, 사회통합, 평화외교 등이다. ······ 이번 평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헤드헌터들의 평가다. 전 전 대통령의 적정 연봉은 0원에서 30억원까지 극과 극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테타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주범이지만 경제발전과 물가안정 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 2006년 7월 10일 머니투데이가 국내 유수의 헤드헌팅 회사에서 활동 중인 32명의 헤드헌터(기업의 임원이나 기술자 등 고급인력을 필요로 하는 업체에 원하는 인력의 선정에서부터 평가, 알선까지 조사과정을 거쳐 적정인력을 소개하는 직업)들을 대상으로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과 총리, 경제부총리 등의 적정 연봉을 직무 능력을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의 내용 중
2008년 7월 2일 중앙일보에서 인용한 국회 예산정책처의 발표
"1980년대 이후 한국을 이끈 5명의 대통령 중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경제 성장률이 가장 높았다. 1일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우리 경제는 전 대통령 재임기간(1981~87년) 연평균 8.7% 성장했다. 노태우 대통령(8.36%), 김영삼 대통령(7.1%), 김대중 대통령(4.38%), 노무현 대통령(4.42%) 시절을 훨씬 능가했다." - 2008년 7월 2일 중앙일보에서 국회 예산정책처의 발표를 인용하여 정권별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비교한 내용 중
2007년 12월 18일 동아일보가 양정호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교수가 1982년부터 2007년까지 통계청의 가계조사 자료 중 납입금과 교재비, 문구류 등을 제외한 순수 사교육비(보충교육비) 지출현황을 분석한 결과
"성균관대 양정호(교육학) 교수가 1982년부터 2007년까지 통계청의 가계조사 자료 중 납입금과 교재비, 문구류 등을 제외한 순수 사교육비(보충교육비) 지출현황을 분석한 결과 참여정부에서 가계의 연평균 사교육비 지출이 21조 원대로 최고 수준인 것으로 17일 나타났다. ······ 사교육비는 과외금지 조치 영향으로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완만하게 늘어나다 1996년까지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외환위기를 맞은 1998년 다소 주춤했으나 다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특히 2002년 12조7545억 원이었던 사교육비는 참여정부가 들어서던 2003년 17조8100억 원으로 크게 뛰었고, 올해는 3분기까지 23조6474억 원을 기록했다." - 2007년 12월 18일 동아일보가 양정호 성균관대학교 교육학과 교수가 1982년부터 2007년까지 통계청의 가계조사 자료 중 납입금과 교재비, 문구류 등을 제외한 순수 사교육비(보충교육비) 지출현황을 분석한 결과를 인용하며 썼던 기사의 내용 중
2013년 6월 9일 경향신문이 올린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한국투자증권 투자전략부 투자전략담당과 굿모닝신한증권 투자분석부,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 SK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을 역임했고 현재 대우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으로 있는 김학균 팀장의 자료
"1970년대에는 물가가 큰 폭으로 올랐다. 2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1980년에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28.7%에 달했다. 동일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한 해에 30% 가까이 올랐으니, 당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데, ‘인플레이션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인식이 많은 사람의 머리에 각인된 것도 1970년대에 경험한 물가 급등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출범한 전두환 정권의 최대 국정 목표 중 하나가 ‘물가 안정’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어다. 물가를 잡아야 했으니, 기업이나 상점 등에서 제품 가격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 김학균,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한국투자증권 투자전략부 투자전략담당과 굿모닝신한증권 투자분석부,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 SK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우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으로 있다. 2004년과 2005년, 2006년, 2007년에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조선일보 선정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선정되었다ㅣ2013년 6월 9일 경향신문이 인터뷰한 내용을 글로 올린 기사의 내용 중
<한국은행 통계시스템>이 역대 정권별 경제성장률 및 물가상승률을 그래프로 나타낸 모습,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제2차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고도성장 및 평균 최저치 수준의 물가안정을 이루었다
<평가 목차>
국내 경제학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20인)
국내 정치학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10인)
국내 행정·경영학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5인)
국내외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9인)
총 44인
<국내 경제학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20인)>
남덕우, 제14대 국무총리로 전 재무부 장관
"예정대로 김재익을 경제기획국장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새로운 안목으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편성했고, 경제기획원을 찾아오는 외국 신문기자나 기업인들에게 한국 경제의 실상과 개발계획을 재치 있게 설명하여 그들을 감탄케 했다. 그로 인해 경제기획원의 대외적 이미지가 높아지고 동시에 투자 유치에도 긍정적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전자교환기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위해 나를 크게 도와주었다. 김재익은 철두철미한 안정주의자였다. 경제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종종 전통적 관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수석비서관이 된 것은 한국 경제를 위해 크나큰 다행이었다. 그는 전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얻어 한국 경제의 숙제인 물가 안정화에 큰 몫을 했다. 물론 전 대통령의 영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남덕우, 국민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와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민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초청교수,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 제24대 재무부 장관, 제12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국무총리 서리, 제14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한국태평양 경제협력위원회 회장, 국정자문회의 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코리아헤럴드 회장, 제18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대한상사중재원 이사장,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이사, 재우회 회장, 제19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경기도민회 회장, 제20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국무역협회 명에회장, 동아시아경제연구원 회장과 제1대 재경회 회장, 우석문화재단 이사, 동아대학교 이사, 제2대 재경회 회장,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 IBC 포럼 이사장을 지냈으며, 청조근정훈장과 수교훈장 광화대장, 제5회 한미우호상, 욱일대수장, 제21회 시장경제대상 공로부문상을 받았다. 현재 민족중흥회 고문, 한국무역협회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국내 원로자문단, 경기도민회 고문, 서강포럼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윤리위원회 위원, 해공 신익희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한일협력위원장 회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 있다ㅣ그의 저서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p254~255
정운찬, 제4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서울대학교 경제학 명예교수이자 제36대 한국경제학회 회장
"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물가를 잡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가안정책을 통해 성장의 기반을 다진 점을 높이 평가한다." - 정운찬,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마이애미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조교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 미국 하와이대학교 초빙 부교수, 영국 런던정경대학 경제학과 객원 부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학부장, 제8대 한국금융학회 회장, 한국금융연구원 자문위원, 독일 보쿰대학교 초빙교수,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발전위원회 위원장,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 제36대 한국경제학회 회장,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 회장, 제1대 서울대학교 금융경제연구원 원장, 제4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현재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운영위원회 위원장, 제1대 제주영어교육도시 명예시장으로 있다ㅣ2009년 10월 6일 연희동 자택을 방문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했던 말의 내용 중
강경식,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으로 전 재무부 장관, 경제부총리
"안정화 시책이 실제 정책기조로 자리 잡은 것은 전두환 제5공화국 때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책전환을 결정했다. 정책전환을 누구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본인이 여러 번의 토론을 토대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시장경제 강화를 골자로 하는 안정화 시책이 우리나라 경제발전 토대가 됐다. 한국 경제가 발전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안정화 시책 이후 우리 경제가 시장경제로 전환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개방이다. 이 두 가지로 인해 좌파정권 10년이 있어도 한국 경제가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 강경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맥스웰 행정대학원 석사, 세종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재무부 국고국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원 예산국 사무관, 예산총괄과장,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국장, 예산국장, 기획차관보를 거쳤다. 1982년 재무부 장관, 1983년 대통령 비서실장, 제12대, 14대, 15대 국회의원을 거쳐 1997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역임했다. 2000년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민간부문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동부그룹의 금융보험부문 회장을 거쳐 현재 동부그룹 상임고문직과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 청소년 경제 교육 기관인 JA KOREA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ㅣ2011년 9월 5일 매일경제와 인터뷰한 내용이 올려진 글의 내용 중
박진근,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로 제4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전두환 정부는 중화학 부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면서 대외개방 폭을 넓혔다." - 박진근,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UCLA 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조교수와 한국개발연구원 초빙연구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교수, 한국경제신문 비상임 논설위원, 국무총리실 정책자문위원, 재무부 정책자문위원,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학과장, 연세대학교 재무처장,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학장, 한국동북아경제학회 회장, 제27대 한국경제학회 회장, 한국응용경제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원장,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이자 한국수출보험공사 경영고문, 한국금융연수원 자문위원, FTA 국내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제4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으로 있다. 한국무역보험공사 무역보험공로상을 수상했다ㅣ2009년 8월 7일 매일경제가 '한국 역대정권의 주요 경제정책'을 소개하면서 인용해서 쓴 글의 내용 중
김용하, 순천향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금융보험학과 교수로 제14대 한국재정정책학회 회장
"1979년 경제위기를 극복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적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김용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 주임연구원,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보험수리추게전문위원회 위원, 국민복지기획단 사회보험분과 전문위원, 보건복지부 제도개혁위원회 사회보험분과 실무위원, 국민연금제도개선기획단 전문위원, 삼성금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국사회보험연구소 소장,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상근상임자문위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정세제위원회 위원장, 사학연금제도개선협의회 전문위원회 위원장, 제9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 제14대 한국재정정책학회 회장, 제10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순청향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금융보험학과 교수이자 보건복지부 국민연금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 통일문제연구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있다ㅣ2012년 8월 20일 파이낸셜뉴스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태동,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전공 교수로 제10대 한국금융학회 회장
"성장지상주의의 한계를 인식한 학자의 도움으로 전두환 독재정부는 물가안정, 균형재정에 힘써 한국경제가 80년대 후반 3저호황의 호기를 활용할 수 있는 기틀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 김태동,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교대학원 경제학 석사, 예일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과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제10대 한국금융학회 회장과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전공 교수로 있다. 은탑산업훈장과 미국 뉴욕주립빙햄톤대 한국동창회 최고영예 동문메달, 청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ㅣ2006년 3월 16일 세계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로 전 세계경제발전연구소 연구원
"대통령으로 폼 잡을 일 많다. 경제는 최대한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큰 정책 방향을 설계하고 그들이 올바르게 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5공화국 때 전두환 대통령이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경제를 믿고 맡긴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치사회적으로 정말 나쁜 일을 했지만, 경제정책에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수석은 80년대 중반 박정희식 개발 모델을 극복하기 위해 금융과 긴축 재정을 통해 물가안정에 적극 나섰었다. 또 기업과 금융 쪽에선 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을 추진했었다." - 유종일,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경제발전연구소 연구원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무처장, 대통령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로 있다ㅣ2008년 3월 6일 오마이뉴스가 인터뷰한 글의 내용 중
홍철,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국토개발연구원 원장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구하기 위하여 스탠포드대학 출신의 경제학자 김재익을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하였다. 김재익 수석은 한국경제의 고질병이었던 인플레(연간 10~20%)를 근절하는 수술부터 시작하였다. ‘연간 물가상승 3%’라는 획기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재정지출 동결`공무원 봉급 동결`추곡 수매가 동결, 심지어는 기업의 임금인상 자제` 이익배당 억제 그리고 물가안정을 위한 대국민 경제교육실시 등 가히 혁명적인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과보호된 재벌기업 독과점 품목의 과감한 수입 개방을 통하여 기업들의 경쟁력을 제고시켰고, 쌀을 제외한 농산물(밀, 콩, 옥수수 등)의 수입도 확대하여 국내 식품가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정부주도 경제’를 ‘민간주도 경제’로 돌려놓기 위하여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혁명적인 개혁이 공직사회에서 단행되었다.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재무부를 무장해제하고, 실질적인 기업회장 노릇을 하던 상공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김재익의 경제개혁은 지방정책에서도 이어졌다. 울산`창원 등 국가산업단지에 입지한 대기업 공장들의 정상가동을 위하여 대대적인 구조조정 작업을 벌여, 재벌들의 방만한 문어발식 경영에 메스를 가하였다. 대기업과 지방 중소기업의 연계를 강화시켜주기 위해서는 부산의 사상공단과 대구의 성서공단을 재정비하고, 중소도시와 농어촌 곳곳에 농공단지를 조성하였으며, 중소기업진흥공단을 만들어 중소기업에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도록 했다. 산업화가 가져온 최대의 부작용인 인구와 산업의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한 강력한 수단인 ‘수도권정비계획법’을 제정하였다. 생활권 중심의 지방도시 육성에 역점을 둔 ‘제2차 국토개발종합계획’을 수립하는 등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특별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구하고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한판 승부를 벌인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차관상환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오던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외국은행장들에게 김재익 수석은 한국경제의 개혁상황을 브리핑해주고, 차관상환연기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김수석의 경제개혁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김재익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일개 비서관에 불과하며 대통령의 결심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관연장을 주저하였다. 바로 이때 전두환 대통령은 외국 자본가들과 김재익 수석을 대통령집무실로 불렀다. “경제는 이 사람이 대통령이야!”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한마디에 외국 자본가들은 한국경제의 장래를 확신하고, 차관 상환연장에 서명하였다. ‘경제대통령’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낸 전두환 대통령의 믿고 맡기는 폭넓은 인사정책이 한국경제를 살려낸 것이다." - 홍철,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동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과 국토개발연구원 원장, 중국 칭다오시 경제고문, 국토연구원 원장, 제3대 인천대학교 총장, 건설교통부 국토정비기획단 자문위원, 전국시도연구원협의회 회장, 경제정의실천연합 도시개혁센터 고문, 대구경북연구원 원장,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 있다ㅣ2010년 8월 3일 매일신문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대구경북 연구원장
남성일,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전공 교수이자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이 책에는 또한 전 대통령이 직접 만든 물가안정에 관한 자필 강의록이 실려 있다. 전 대통령은 물가가 세 가지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고 봤다. 첫째,대외요인으로 원유가,원자재가 및 국제고금리를 꼽았다. 둘째,대내요인으로 노임단가,통화안정과 함께 한국적 상황으로 환율안정을 꼽았다. 둘째,대내요인으로 노임단가,통화안정과 함께 한국적 상황으로 환율안정을 꼽았다. 그리고 물가안정은 가격경쟁력과 수출을 통해 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봤다. 전 대통령은 이 강의록을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주고 교정을 의뢰했으나 김 수석은 고칠 데가 없어 한 자도 고치지 않고 정서시켰다고 한다. 지금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전 대통령의 경제에 대한 식견 뒤에는 김재익을 필두로 한 탁월한 경제보좌진의 역할이 있었다. 김재익은 안정,자율,개방이라는 분명한 기조를 가지고 경제안정화 속의 성장을 추구했다. 우선 물가안정에 힘을 쏟았다. 당시 경제팀은 무조건 물가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원유가 급등 등 해외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가격상승은 과감히 받아들여 가격을 현실화했다. 당시 경제팀은 무조건 물가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원유가 급등 등 해외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가격상승은 과감히 받아들여 가격을 현실화했다. 예컨대 추곡수매가 인상률을 정치권이 요구하는 수준의 3분의 1로 최소화했다. 더욱 과감한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정부 예산동결을 실행한 것이다. 김재익은 1982년에 이 구상을 처음 시도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83년에 마침내 대통령의 결심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대통령과 경제팀의 이러한 안정화 노력에 힘입어 1980년 28.7%이던 물가상승률은 83년에는 3.5%로 떨어졌고 성장률은 10.7%로 상승했다." - 남성일, 서강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로체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업대책위원회 자문위원, 정책평가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전공 교수이자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으로 있다ㅣ2008년 6월 3일 한국경제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으로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이자 헤럴드 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이 중단된 것은 독재의 대명사 격인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였다. 그의 집권 당시 연평균 30%에 육박하던 물가상승률은 그의 집권 5년 동안 연평균 3.5%로 떨어졌다. 지금 우리나라의 물가 안정 기조는 전두환 정권 때 다져졌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두환, 그는 독재자였고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우직하게 통화팽창의 유혹을 이겨낸 점만은 칭찬을 받을 만하다." - 김정호,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수료)을 거쳐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숭실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지 문제와 회사법, Cyber Law 관련 이슈들을 자유주의적, 법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에 독보적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주임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 규제연구실장을 역임했고 청와대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에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자유기업원 원장으로서 시장경제의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으며,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헤럴드 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ㅣ그의 저서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운대행 버스> p212
정장식, 대구대학교 석좌교수로 전 경제기획원 사무관
"지난 1980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경제가 정말 어려웠다. 그 당시 나라를 구했다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뛰어난 경제관료가 고 김재익 경제수석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스스로 ‘지금부터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야’라고 할 정도로 경제에 관한한 모든 결정을 김 수석에게 맡겼다. 전권을 맡은 김 수석 또한 정직하고 청렴하고 소신 있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물가안정이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변수에 정책의 최우선을 두고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경제정책을 집행해나감으로써 드디어 1980년대 중반 유례없는 경제호황을 이룰 수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저유가, 저금리, 낮은 달러와 같은 3저(低)의 영향도 있었지만 여하튼 국내물가는 매우 안정된 가운데 높은 성장과 국제수지의 안정을 함께 달성했다. 이른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 정장식,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사와 동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킬크리스티안알브레히트대학교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용인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대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12회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경제기획원 사무관, 대통령비서실 행정수석실 행정관, 내무부 재정국 재정과 과장, 경상북도 상주시 시장, 대통령 비서실 행정수석실 행정비서관, 내무부 지방자치기획단 단장,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내무전문위원,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공약팀 팀장, 경상북도 포상시 시장, 대구대학교 석좌교수,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ㅣ2008년 9월 9일 서울경제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정희수, 제19대 새누리당 전 한국일보 백상경제연구원 원장
"전두환 정권은 물가 안정에 치중하면서 명분 없는 쿠데타로 인한 국민의 반감을 조금씩 씻어 나가는 한편, 공정거래법 제정 등으로 민간 부문의 자율과 경쟁을 촉진시켰다. 1980년대 한국 경제의 특징은 전반기 ‘안정 속의 성장’과 후반기 ‘3저 현상’(저유가ㆍ저금리ㆍ저달러화)으로 압축된다. 특히 80년대 후반기에는 외화가 서울 증시로 밀려들면서 주식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88년 올림픽 개최 효과 덕에 서비스 산업 등 내수가 급격히 확대됐다. 1985년도 납입자본 기준 5대 기업은 삼성물산, 대우, 현대상사, 유공, 호남정유 등이었다." - 정희수, 성균관대학교 사회학 학사와 아주대학교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과 한나라당 경제분야 대선공약 개발 TF팀, 제17대와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나라당에서 부동산대책특별위원회 위원과 공공부문개혁특별위원회 위원, 경제활성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 포스코경영연구소 경영전략연구센터 센터장, 한나라당 서민경제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한국일보 백상경제연구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제19대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있다. 2010 우수국회의원연구단체 시상식 최우수상과 대한민국 헌정상 우수상을 수상했다ㅣ2004년 10월 14일 주간한국이 인터뷰한 내용을 올린 글의 내용 중
윤창현, 서울시립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로 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비록 전두환 전대통령의 국민적 인기는 부족하지만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의 노력 그리고 그와 함께 노력한 경제 엘리트들의 면면은 출중했고 그들의 업적은 화려했다. 경제에 관한 한 5공화국은 화려한 업적을 기록한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인물은 김재익 경제수석 비서관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원래 관료 출신이었고 스탠포드 대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바 있으며 연구기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가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화폐교환방정식을 암기하도록 했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재정적자가 나타나면 화폐를 더 많이 찍게 되고 이로 인해 인플레가 발생하면 부동산 가격이 오르게 되어 서민들이 힘들어집니다. 재정적자부터 없애시죠” 그의 경제교육은 분명하고 명쾌했다. “경제는 자네가 대통령이야” 하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재정적자는 사라지고 물가는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5공화국의 경제 기틀을 잡고 화려한 한국경제의 부상을 예비해놓은 김 수석은 뒤이어 전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획책한 북한의 공작으로 인해 버마 (지금은 미얀마)의 아웅산 사태에서 서석준 장관 등과 함께 북한이 설치한 폭탄이 폭발하면서 사망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그 이후로 봇물이 터지듯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부상하면서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한바 있다. 경제관료들의 능력이 출중했고 그 만큼 경제발전이 압축적·효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며 이 과정에서 관료부문의 수많은 엘리트가 배출된 것은 그리 이상할 것 없는 사실이다." - 윤창현, 서울대학교 물리학 학사와 경제학 학사,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객원교수, 명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로 있다ㅣ2008년 4월 28일 한국금융신문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안재욱, 경희대학교 시장경제센터 소장이자 경제학부 교수
"전두환 정부 시기에는 경제 안정화와 자율화 정책으로 인해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지속되었다." - 안재욱,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을 역임했으며, 경희대학교 시장경제센터 소장과 한국은행 통화정책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ㅣ그의 저서 <얽힌 실타래는 당기지 않는다> p124
김학균, 대우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으로 전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
"1970년대에는 물가가 큰 폭으로 올랐다. 2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1980년에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28.7%에 달했다. 동일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한 해에 30% 가까이 올랐으니, 당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데, ‘인플레이션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인식이 많은 사람의 머리에 각인된 것도 1970년대에 경험한 물가 급등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출범한 전두환 정권의 최대 국정 목표 중 하나가 ‘물가 안정’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어다. 물가를 잡아야 했으니, 기업이나 상점 등에서 제품 가격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 김학균,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한국투자증권 투자전략부 투자전략담당과 굿모닝신한증권 투자분석부,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 SK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우증권 투자전략팀 팀장으로 있다. 2004년과 2005년, 2006년, 2007년에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조선일보 선정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선정되었다ㅣ2013년 6월 9일 경향신문이 인터뷰한 내용을 글로 올린 기사의 내용 중
서상목, 인제대학교 석좌교수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강력한 물가 안정화 정책은 고도성장과 더불어 물가 안정과 국제수지 흑자 기조를 구축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의 계기가 되었다." - 서상옥, 앰허스트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과 민정당 정책조정부실 실장, 보건복지부 장관, 제13, 14, 15대 국회의원과 명지대학교 정보통신경영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인제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ㅣ2013년 4월 26일 조선닷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장규,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초빙교수로 전 중앙일보 경제전문대기자 상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물가를 안정시키고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불러왔다’" - 이장규, 서강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미주리대학교 대학원 신문학을 수료했다. 중앙일보 편집국 사회부 기자와 경제부 기자, 제1경제부 기자와 중앙경제신문 편집국 정경부 차장, 중앙일보 뉴욕특파원, 중앙일보 편집국 뉴욕특파원 부장, 경제1부 부장, 금융발전심의회 은행분과 위원, 중앙일보 편집국 국제부 일본총국 총국장, 중앙일보 기획실 전략기획실장, 회장비서실장과 전략기획실장 이사대우와 편집국장 이사, 경제전문대기자 상무와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대표이사, 하이트진로그룹 부회장, 하이트홀딩스 부회장, 하이트진로그룹 경영기획본부 본부장, 하이트홀딩스 대표이사, 하이트맥주 대표이사, 하이트진로그룹 고문을 역임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초빙교수와 삼정KPMG 부회장으로 있다ㅣ2012년 11월 19일 매경ECONOMY가 그의 책 <대통령의 경제학>을 소개하면서 쓴 글의 내용 중
우석훈,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로 전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경제학자가 볼 때 정치는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이 될 때도 많다. 그건 꼭 우파 입장에서 하는 얘기도 아니다.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잘못 흔드는 것보다는 잘 모를 때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전두환 때 그랬던 것 같다. 그때 경제에 대해 한 것이 없다. 경제 관료들과 기업가한테 맡겼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시장주의냐 하면 그게 아니라 계획경제였다. 정치권에서 개입하는 게 적었다. 잘 안다면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도 한 방법이다. ······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가 조절하는 경제 같은 거였다. 특정 부분이 너무 커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두 사람 다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상당한 강조점을 갖고 있었다. 분명히 재벌, 대기업과 손을 잡은 건 마찬가지인데, 중소기업을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특정 재벌 업체가 가지고 있는 건설업체만 밀어준다고 해서 잘사는 것은 아니라는 그 정도의 기초 인식을 했던 것 같다. 나머지 경제부처에서는 잘되는 경제만 살린 게 아니고, 지금은 어렵지만 이런 건 살려야 우리가 먹고 산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 같다. 그걸 모아내 보면 건설 같은 쉬운 것 말고도, 어려운 것들을 나름대로 지원한 거 아닌가? 박정희 때는 그린벨트나 조림처럼 자본의 룰로 설명이 안 되는, 위에서 보는 조절자의 역할들을 자기도 하려고 했다. 일방적으로 건설이 확 커지지 않는 유형이 거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 때 나온 그런 수치 같은 것을 보면 경이적이다. 이건 단순히 '국제 유가가 낮고 환율이 좋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게 나타난다. 전두환 본인이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약한 것들도 좀 살려야 하지 않겠나 하는 지시정도는 했겠다 싶다. 지금도 중소기업이라든가 지역경제에 뭔가 넣다보면 형태가 건설이 줄고 다른 쪽 투자가 느는, 그런 유형이 나올 것 같다. 저도 아직 해석은 어려운데, 그때 한국 경제가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본구조를 상당히 갖춘 게 아닌가 생각한다. ······ 박정희 후기에는 건설이 높아졌다. 늘 그랬다고 하기는 어렵다. 전두환 때랑 노무현 때를 수치만 놓고 비교해보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전두환은 자기 약점이 있으니까 눈에 안 보이는 것도 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노무현은 약점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무도 당당하게 인기 위주로 간 것 같다. 한국에서 인기 위주는 땅값 올리는 거다. 전두환 때 한국 경제가 튼튼해진 게 그때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잡았다. ······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 즉 한국경제의 '영광의 30년'을 많은 사람들이 좋았던 시절이라고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은 그 시절에 국민소득이 높아서만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SKY 대학이라고 부르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그리고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육사 출신이 아니더라도 성실하게 경제생활에 임한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기회와 다양한 패자부활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입체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지금의 20대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40대와 50대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만큼이나 지금의 20대가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이 있었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우석훈,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학사와 파리제10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서부발전 사외이사,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서울산업대학교 산업기술대학원 겸임교수, UN 기후변화협약 기술이전전문가그룹(EGTT) 위원, 총리실과 국무조정실, 산업심의관실 전문위원,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타이거픽쳐스 자문을 역임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로 있다ㅣ그가 인터뷰한 저서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p30, p246~p247와 <88만원 세대> p140
김동호, 중앙일보 사회부문 데스크로 경제분야 저널리스트
"그는 무엇보다 강력한 물가안정정책을 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 1980년 1인당 국민소득은 1660달러를 기록하고 있었다. 국민은 보릿고개에서 벗어나 살림살이가 펴지기 시작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가안정 없이는 경제안정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한국 경제가 세계의 중심에 진입할 수 있도록 발판이 된 중화학공업도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집중한 결과 원자재 수입 가격과 땅값 상승의 여파로 경제가 만성적인 인플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산업구조조정을 통해 중화학공업 부문의 중복투자를 해소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국내 기업들은 첨단 분야의 제조업 진출을 본격화했다. 기업들이 박정희 시대에 기틀이 마련된 조선·조선·철강·건설을 토대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반도·신소재·유전공학·컴퓨터·통신 등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여기에 1986년부터 본격화한 3저 호황은 이들 분야에 진출한 기업들이 급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한국 경제의 핵심 경쟁 분야가 이때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에 물가안정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가격 인상을 억제하고 임금 인상도 자제하게 했다. 이런 강력한 물가안정 드라이브로 1980년 28.7%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은 불과 2년 만에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1982년 7.19%를 기록한 물가상승률은 그의 임기 동안 2%대까지 내려갔다. 소비자들은 만성적인 물가고에서 벗어나자 전두환의 경제정책을 환영했다. ······ 집권 후반기에는 환율·금리·유가 등 경제 운용의 필수요소들이 모두 한국 경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전두환 정부는 3저 호황의 덕을 톡톡히 봤다. 내부에서 물가안정으로 내실을 다지고 밖으로는 훈풍이 불어와 한국 경제는 왕성한 성장세를 보였다. 박정희가 물려준 성과에 살을 붙여 키우고 선진 경제제도 도입에도 힘을 쏟았다. 부패 해소와 효율 제고를 위해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고 더 나아가 공정거래법과 소비자보호법을 시행했다. 기업들을 압박하는 이런 제도들은 훗날 국내 기업의 경쟁률을 높이고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는 선진 경제제도 발전이 기여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함으로써 한국이 경제, 사회, 국제적으로 크게 업그레이드된 계기도 전두환 정부에서 만들어졌다. 정통성 결여에 따른 대국민 인기정책으로 폄하돼 온 스포츠·스크린(영화)진흥, 컬러TV 도입도 국민 여가 증진과 기업의 글로벌화, 경제 고도화의 디딤돌로 작용했다. 과외 금지와 본고사 폐지, 단계적인 평준화 조치도 고비용 구조를 낮추는 개혁정책이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폐지 목소리가 높았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이어나간 것도 안정적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단군 이래 첫 호황을 누린 전두환 정부의 경제성장은 결국 국민소득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시민의식을 높여 한국이 민주화로 가는 디딤돌을 만들었다. ······ 군인 출신으로 경제에는 문외한이었던 전두환이었지만 이처럼 여러 경제·사회정책이 합리성을 갖고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권위주의 시대에서 가능했던 강력한 정국 장악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6공 이후 민주화가 만개하면서 사회 각계에서 욕구가 분출함에 따라 모든 정책에는 이익집단의 정치적 고려가 과도하게 개입되기 시작했다. 이는 공정하고 균형 잡힌 정책을 도출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정책 표류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높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전두환은 경제 문외한이었다. 육사 11기 출신 군인이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를 배우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치열했다. 증언에 따르면 경제기획원은 1981년 5월부터 전두환에게 모두 10차례에 걸쳐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을 브리핑했다. 1962~1981년 모두 4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뒤 전두환은 그 명칭을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변경해 추진했다. 명칭에서 보듯이 전두환은 앞만 보고 달려 온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대통령이 됐다. 경부고속도로건설이 상징하듯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왔다면 5공 정부는 간선도로와 지방국도를 고루 살피면서 앞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 시절 경제성장은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대기업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덩치를 키우는 성장 일변도였기 때문에 피로현상이 적지 않았다.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국민이 인내했고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 위주의 양적 팽창은 고질적인 인플레 구조를 만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오르는 시절이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과감한 정책 전환이 불가피했지만 성장 지상주의는 개발연대의 성역이었다. ······ 브레이크 없는 성장 일변도의 정책 목표는 전두환이 전면에 나서면서 비로소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마침 5공이 출범한 무렵 세계 경제는 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크게 후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적·사회적 불안까지 가중되면서 1980년 한국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20%대를 훌쩍 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극심한 물가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두환으로선 한국 경제를 다지고 점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정책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통찰력이 작용했다. 육사 시절부터 선두주자로 달려 온 그는 리더십과 용인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일은 전문가를 통해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 경제의 키워드는 성장에서 안정·능률·균형·자율·개방으로 바뀌었다. 물가안정·개방화, 시장경쟁의 활성화, 지방 및 소외 부문의 개발이 주요 정책대상이 됐다. 전두환은 이런 경제안정화정책을 받아들여 총통화공급을 줄이고 금리인하를 목표로 하는 금융정책을 허용했다. 그 결과 1976~1978년 사이 연평균 35%에 이르던 총통화 증가율이 1979~1981년 25% 수준으로 낮아지고 1983~1985년에는 14%선까지 안정됐다. 사람으로 치면 언제 뇌졸중이 올지 모를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낮추게 된 것이다. 기조 변화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물가안정이었다. 전두환은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서민을 괴롭히는 물가는 반드시 잡겠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강력한 물가안정정책을 폈다. 이 정책이 주효하면서 1981년 소비자물가는 상승률이 13.8%로 안정되고 이듬해에는 2.4%를 기록했다. 1981년의 물가억제 목표가 20%였음을 감안하면 기적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물가안정은 후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향하는 선진경제의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경제불안에 휘둘리는 국가들은 예외 없이 살인적인 물가상승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경제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선진국 문턱에서 길을 잃고 낙오된 아르헨티나는 물론 브라질·멕시코·베네수엘라 등 남미 주요국가들은 극심한 인플레 때문에 1980년대 잇따라 경제위기에 빠졌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후진국들은 2000년대 이후에도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오르는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북한이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해 2009년 화폐개혁에 나선 것도 물자부족에 따른 극심한 인플레 현상의 여파다. 1997년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인플레가 엄습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베트남 등이 극심한 인플레 고통을 받았다. 전두환은 물가를 잡았다는 점만으로도 민생경제 분야에서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성과는 외국에서도 높게 평가됐다. 전두환 집권이 끝나가던 5공 말기에 이르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 기간에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경제정책의 3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들 세 마리의 토끼 가운데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아 쩔쩔매는 판에 그는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경이로운 업적을 쌓았다"고 썼다. 그의 집권 기간 중 한국 경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기록했다는 것은 경제지표는 물론 당시 국민들이 느낀 체감경기를 통해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다. 이는 대통령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경제제일주의의 정책을 펴나간 데 따른 결과다. 이는 안정화정책을 받아들여 물가만큼은 잡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가능했다. 시대 변화에 맞춰 경제 체질을 바꾸는 노력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 시작된 3저 호황까지 겹치면서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매년 10%를 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이는 1980년대 전반기 정책의 중심을 물가안정에 맞춘 덕분이었다. 이는 1980년대 전반기 정책의 중심을 물가안정에 맞춘 덕분이었다. 한국은행 본관 로비에는 '물가안정' 현판이 걸려 있다. 중앙은행 운영의 궁극적 목표가 물가안정이라는 의미다. 통화가치가 안정돼야 경제발전의 과실을 국민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든 선진국 문턱에 이르기 전에는 만성적인 인플레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이런 악순환에서 처음 벗어난 것은 전두환 정부 들어서다. 민주화를 희생해가면서 일으킨 경제개발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고 안정화정책을 통해 그 체제를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고 체질을 강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김동호,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KDI국제정책대학원에서 MBA 학위(BANKING & FINANCE 전공)를 받았다. 1991년부터 취재현장에서 주로 경제정책, 재정, 금융, 증권 분야를 담당해왔고, 최근에는 복지와 고용, 교육, 지방자치로도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일본의 경제와 기업, 문화에 대해서도 천착하고 있다. 지금은 일부 기관의 명칭이 바뀌었지만 중앙일보 경제부문에서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공정거래위원회, 산업자원부,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 농림부, 금융감독위원회, 한국은행, 증권거래소, 코스닥 등 주요 경제부처와 기관, 시중은행·증권사·보험사·카드사 등 금융시장을 담당하면서 격동과 위기의 한국 경제를 취재했다.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방문연구원을 거쳐 도쿄특파원으로 일할 때는 자민당 몰락과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지켜봤다. 현재는 중앙일보 사회부문 데스크로 지방자치·복지·고용·교육 등을 두루 보고 있다. 사회부 탐사취재로 서울언론인클럽상과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경제부에서는 국민연금·공무원연금·의료보험 등 7대 사회보험제도 개혁 기획으로 한국기자상을 또다시 수상했다. 경제 정책과 제도 개혁을 시리즈로 내보낸 기획으로 씨티그룹 언론인상을 받아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ㅣ그의 저서 <대통령 경제사> p148~150, p153~p159
박용채, 경향신문 경제부장 겸 경제에디터
"전두환 정권이 아이러니다. 재벌정책의 효시인 공정거래법을 만들고, 기업집단 제도도 도입했다. 정치적 민주화 과정이었지만 헌법에 경제민주화란 개념이 도입된 것도 5공 때다." - 박용채, 외국어대학교 일본어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경향신문 국제부와 경제부를 거치며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도쿄특파원으로 활동한 일본통이다. 한국 부동산 시장의 반면교사로 여겨지는 일본의 중심 도쿄에 체재하며 부동산 거품과 몰락을 겪은 일본인들의 경제상과 일본 정부의 정책, 부동산 시장의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현재 경향신문 경제부장 겸 경제에디터로 있다ㅣ2012년 8월 18일 경향신문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국내 정치학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10인)>
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참 멋있는 전직 대통령" - 노무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나왔고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알제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원광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이후 제17회 사법시험을 합격해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후, 제13대 국회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제15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카타르 독립대훈장과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ㅣ2006년 10월 10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틑날에 청와대에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한 오찬의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난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를 말리는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의 내용 중
정몽준, 제19대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전 전 대통령께서 대통령을 맡았을 때 우리 경제가 잘 되고 88서울 올림픽도 유치했었다. 당시 올림픽 유치 경쟁을 벌였던 일본을 거의 더블 스코어차로 이겼던 게 기억난다." - 정몽준, 정몽준,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메사추세츠공과대학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존스홉킨스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체육대학교 명예박사와 전주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강원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과 대한양궁협회 회장, 현대중공업 회장, 제13대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제, 제18대 국회의원과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 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특별초빙교수, 경희대학교 체육과학대학원 객원교수,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석좌교수,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제19대 새누리당 국회의원이자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국제축구연맹 명예부회장, 아시아 소사이어티 재단이사, 울산대학교 이사장으로 있다ㅣ2009년 9월 14일 한나라당 대표에 취임하자 연희동 자택을 방문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했던 말의 내용 중
안상수,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이자 대표최고위원
"그 때 (전두환 대통령) 재직 시 물가 안정을 이루어서 당시에 상당히 높이 평가받았다. 대통령 재직 시 김재익씨나 경제 관료들이 잘해서 물가를 잡은 것으로 평가 하고 있다." - 안상수,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제17회 사법시험 합격으로 각 지역의 검찰청 검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공보이사, 경향닷컴 객원논설위원회 위원,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회 위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입법위원회 위원, 한국유권자운동연합 발기인 공동대표, 제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미래전략특별위원회 위원장,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행정안전위원회 위원,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 국토해양위원회 위원, 운영위원회 위원, 정보위원회 위원,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위원,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장애인복지정책특별위원회 위원,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여수세계박람회유치 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한미의원외교협의회 부회장과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위원,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대표 특보단 단장과 부총무, 대변인, 총재 특별보좌관, 인권위원회 위원장,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장, 원내대표, 제18대 국회의원,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원내대표,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제4회 대한민국 나눔대상 대표상을 받았다ㅣ2010년 7월 20일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해서 연희동 자택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정인봉, 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자 전 박근혜 국회의원 법률특별보좌관
"과외금지는 진보성향의 강준만 교수가 '전두환 대통령이 유일하게 잘한 정책'이라고 칭찬할 정도로 사교육 열풍을 막은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나중에 위헌 결정을 받았지만, 당시 헌법재판관이 '이 정도로 사교육이 문제될 줄 알았으면 위헌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할 정도로 사교육을 막기 위한 획기적인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 정인봉,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와 동 대학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제17회 사법시험을 합격하여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판사,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판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위원,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회 위원, 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위원장, 박근혜 국회의원 법률특별보좌관을 지냈다. 현재 정인봉법률사무소 변호사로 있다ㅣ2008년 3월 18일 오마이뉴스와 가진 전화통화의 내용 중
김영환, 주체사상 교범이었던 <강철서신>의 작가로 주사파 이론을 처음 소개한 인물
"전두환 정권의 통치자금 횡령 등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점 때문에 전두환 정권을 통째로 나쁘게 매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개인 전두환은 집권과정에서의 문제점으로 인해 세월이 지나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문제 등을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경제위기 극복, 경제 발전, 물가 안정, 올림픽 유치 등은 높이 평가해줘야 하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이고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무척 어렵기는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화에 대해 평가를 하려면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도 피해가서는 안된다. 특히 1987년 6.29선언을 통한 전두환 정권의 양보는 그 동기가 정국안정이든, 위기모면이든, 평화적인 민주화든 상관없이 매우 훌륭한 것이다. 이후 한국의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에서 매우 귀중한 토대가 되었다. 집권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6월민주화운동이 단기적으로 치명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양보가 필연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세력이 단기적으로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도 집권세력의 관성상 적극적으로 양보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약 일방적으로 밀리는 식으로 민주화가 추진되었다면 그 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전두환 정권의 양보를 폄하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전두환 정권을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더라도 1987년 정치위기를 한국발전의 기회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해주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 김영환, 서울대 공법학과를 다니면서 교내 동아리「고전연구회」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에 투신,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에 관련돼 지명수배되자 도피, 제적됐던 인물이다. 1980년대 중반 대학가 주체사상 교범이었던 <강철서신>의 작가로 국내에 주사파 이론을 처음 소개한 인물로 '주사파의 대부'로 불렸다. 86년 11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그후로는 89년 2월부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서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실무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91년 서울대에 복학하고 졸업하였으며, 이후에「시대정신」이란 잡지를 창간하여 편집위원으로 지냈다ㅣ2007년 6월 7일 자유주의연대의 주최로 열린 '6월항쟁 2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말했던 내용 중
김충남,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전 육군사관학교,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위기 관리를 잘 했다.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완성으로 남긴 한강의 기적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유가 급등 문제 등 경제문제가 박정희 대통령이 비운에 간 간접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중화학공업을 많이 벌여 놓았는데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그대로 민주화가 됐다면 오늘날의 삼성, 현대,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때 올림픽 외교를 명분으로 세계 각국 시장을 타진하고 수출과 투자 유치에 힘써 비로소 한국의 기적을 세계에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육사 동기생이고 12.12사태의 책임자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전두환 정부의 정책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대통령이라는 박정희 대통령 때도 인플레이션이 심했다. 전두환 대통령 때 물가가 안정된 건 기적이다. 사회복지도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부터 차근차근 추진했다." - 김충남,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를 지냈다. 청와대에서 사정비서관, 정무비서관, 공보비서관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세 분의 대통령을 9년여에 걸쳐 보좌했다. 미국 RAND 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정책센터의 자문위원을 10여 년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자문경력이 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10여 년간 연구위원으로 있었고 현재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있다ㅣ2011년 7월 13일에 뉴데일리가 인터뷰한 내용을 올린 글의 내용 중
문정인,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미국 듀크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겸임교수
"박정희 대통령이 개발독재라는 명분으로 경제를 비정치화시켰는가 하면 전두환 대통령은 안정화 정책과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강압적 경제 정책을 전개한 바 있다. 물론 박정희의 경제개발과 전두환의 경제회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 문정인, 연세대학교 철학 학사와 메릴랜드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켄터키대학교 정치과 조교수와 부교수, 재미한국인 정치학회 이사와 사무총장, 한국정치학회 국제위원장, 미국국제정치학회 이사와 부회장,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과 한국평화학회 회장,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미국 듀크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겸임교수, 동아시아재단 이사이자 GlobalAisa 편집인으로 있다ㅣ그가 공동저술한 <사회과학의 이해> p89
김영명,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전두환 집권기에 경제는 순항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이른바 '3저 호황'(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으로 경제와 사회가 순탄했고 1988년의 서울올림픽도 예정되어 있어서 여러 면에서 국가 위상이 올라가는 시기였다." - 김영명,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뉴욕주립대학교(버팔로)를 졸업하였으며,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한글문화연대 대표를 역임하였고, 한림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국제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에는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한글문화연대 고문으로 있다ㅣ그의 저서 <좌우파가 논쟁하는 대한민국사 62> p141
안철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이자 정치외교학과 교수
"경제성장의 여건이라는 측면에서 전두환 정부는 초기에는 좋지 않은 여건을 물려받았으나 세계경기가 호황기로 들어가면서 중기 이후에는 성공적인 고도성장을 이루어 냈다. 즉 70년대 말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와 외채 누적으로 위기를 맞은 한국경제는 산업구조조정과 물가안정 정책 등에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경쟁력, 거기에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3저 호황'을 맞아 80년대 초의 경제위기를 벗어나 자본축적 구조를 강화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경제는 70년대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과잉투자와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이은 세계경제의 침체로 1980년에는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위기에 몰렸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유신정부 말기 권력과의 유착으로 방만하게 전개되었던 중화학공업의 과잉 중복투자를 정리하는 산업합리화 정책을 실시, 부실기업을 정리하면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 같은 산업구조조정은 재벌과 이미 유착되어 있었던 박정희 정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첨단산업화, 자동차 및 기술개발 투자의 확대를 통한 성장산업에서의 고부가가치화와, 쇠퇴하는 산업의 업종전환과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그리고 생산 및 기업경영의 합리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부 이래 계속 추진된 고성장 정책을 포기하고 물가 안정을 바탕으로 한 안정정책으로 기조를 바꾸게 된다. 개발도상국에서 물가를 잡으려면 공공부문의 축소와 통화량 남발 억제 그리고 민간부문의 가격지도책이 필수적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물가 안정을 위해 예산을 전년 대비 동결시켰고 통화량 관리도 해냈다. 게다가 1979년의 2차 오일쇼크로 엄청난 오일머니를 챙기게 된 중동이 그 오일머니를 풀기 시작하고 세계 각국이 침체된 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실시하면서 OPEC 회원국들이 고정유가제를 폐지하는 등 80년대 중반에 불어 닥친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시대는 세계경제의 호황과 함께 한국경제에도 엄청난 호황을 가져왔다. 1979년에 1,500달러 수준이었던 1인당 GNP는 1988년에는 3,700달러로 뛰어올랐고 8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1979년에는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로 경상수지 적자가 41억 달러를 넘어섰으나 1988년에는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로 경상수지도 138억 달러 흑자로 돌아섰다. 1979년에 20%대에 달했던 도매물가상승률 역시 80년대에는 연평균 2.7%를 기록했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텁게 등장했다. 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가 되었는데 이들이 이후 한국 민주화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 안철현,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경성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다ㅣ그의 저서 <업그레이드 특강 한국현대정치사> p199~201
김승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로 전 한국정치학회 연구위원
"경제제일주의도 전두환의 중요한 국가통치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은 국가경영 차원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재임 중 다른 어떤 것보다 경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것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경제전문가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든가 “아무리 정치가 잘돼도 경제가 잘못되면 잘된 정치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경제우선주의에 대한 절대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두환의 집권을 전후한 1979~1980년 한국은 부마항쟁, 10·26사태, 제2차 석유파동 같은 사회정치적 불안요인으로 물가상승률 24.9%, 실업률 5.2%, 경제성장률 -3.9%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악조건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경제제일주의로 연평균 GNP 성장률 7.57%, 실업률 4.1%, 수출증가율 15.8%를 기록했고, 한국경제 사상 처음으로 1986년과 1987년에 각각 47억달러, 1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그리고 임기 내내 5% 안팎의 물가안정을 유지했다. 중화학공업의 연평균 성장률은10.8%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1년 55.4%, 1982년 52.5%에서 1987년엔 57.5%로 증가했다. 아울러 비교적 낮은 수준의 불균등 분배를 유지함으로써 후세에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큰 치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 김승채,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정치학회 편집, 연구위원과 한국국제정치학회 감사, 한국세계지역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방문학자,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연구실 실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ㅣ2007년 5월 25일 신동아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국내 행정·경영학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5인)>
조동성,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로 전 한국경영학회 회장
"1979년 2차 석유위기 때에는 1980년 대 전두환 대통령 집권 때에는 경제성장보다는 물가를 잡는데 주력했고 이것도 엄청난 히트를 쳤다. 70년대의 고성장이 80년대에 안정돼서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됐었다. 1980년 경제위기 와중에 등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와 관련해 철저한 불개입정책을 고수했다. 경제정책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물가안정과 균형발전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했으며 그 결과 한국경제는 성숙 단계로 연착륙했다." - 조동성,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학사와 볼링그린주립대학교대학원 경영학 석사,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인제대학교에서 철학 명예박사, 헬싱키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경영대학 객원교수, 일본 아세아 경제연구소 초청연구원,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초청부교수, 프랑스 구주경영대학원(INSEAD) 초청교수, 일본 도쿄대학교와 히도츠바시대학교 초청교수, 산업정책연구원 원장, 호주 시드니대학교 경영대학원 초청교수, 미국 미시간대학교 초청교수, 미국 듀크대학교 초청교수,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중국 남개대학 객원석좌교수, 한국경영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제6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관장으로 있다ㅣ2008년 8월 14일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에서 열린 '건국60년, 60일 연속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했던 답변의 내용과 2009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함성득,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학과 교수로 한국대통령학회 회장이자 이사장, 소장
"(전두환 대통령은)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취임해 경제발전과 물가안정을약속했고 집권 3년 만에 12.2%라는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과 임기 내내 5% 안팎의 물가안정을 이뤘다. ······ 임기 중 국회의 정부제출 법률안은 모두 455건으로 이 중 413건이 가결돼 90.8%의 높은 통과율을 보였다. 철회되거나 부결된 법률안은 하나도 없어 국회에 대한 행정부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 함성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와 텍사스대학교오스틴캠퍼스 대학원 석사, 카네기멜론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8회 행정고시를 합격했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 행정학과 및 정치학과 조교수,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정책대학원과 경영대학원 조교수,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아시아공공정책연구소 소장,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후보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과정 주임교수,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경영대학원 자본시장연구소 연구교수,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학과 학과장,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대학원 주임교수,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부학장,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행정학과 교수이자 한국대통령학회 회장이자 이사장, 소장으로 있다ㅣ한국정치학회보 2000년 겨울호에 발표한 논문의 내용 중
이창양,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물가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물가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한자리수 물가"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고 결국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 이창양, 서울대학교 정치학,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9회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산업자원부에서 산업정책과장, 사무관, 서기관, 산업정책과 과장을 역임했다. 현재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로 있다. 제33회 매일경제 매경이코노미스트상과 송곡과학기술상을 수상했다ㅣ2000년 7월 18일 한국경제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임창열, 경기일보 대표이사 회장으로 전 재정경제원 장관
"전두환 대통령 때가 대표적이다. 그 분이 다른 것은 몰라도, 물가 안정만은 확실하게 시켰던 분이었다. 그런 결과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김재익 수석한테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야당에서 김재익 전 수석에 대해 정치적인 모함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걸 다 방패막이 해주면서, 끝까지 소신껏 밀어붙이라고 얘기하셨다. 그런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김 전 수석이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다.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수석에 고 김재익씨를 발탁해 경제정책의 조율을 일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스로 경제에는 문외한이라는 점을 시인하고, 경제분야에 관한 한 김 수석을 절대 신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임창열,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와 윌리암스대학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무부 증권국 국장과 제15대 조달청 청장, 제13대 과학기술처 차관, 제1대 해양수산부 차관, 제3대 통상산업부 장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경기도 지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경기일보 대표이사 회장으로 있다ㅣ2006년 8월 31일 이코노믹리뷰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고승철, 나남출판 주필이자 부사장이자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강사로 전 동아일보 출판국 국장
"전두환 정권의 경제 성적표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강력한 정부의 힘으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 재정동결, 물가안정 등을 꾀하면서 역설적으로 시장자율화 기반이 마련됐다. 1980년의 마이너스 성장에서 1981~1982년엔 6~8%의 성장률을 보였고, 1986~1988년엔 대호황을 누렸다. 1987년의 성장률은 12.3%에 달했다.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됐고 LG와 삼성전자의 컬러 TV가 중저가 상품으로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1986년의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한국인의 자긍심은 올라갔다." - 고승철,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와 연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경향신문에서 파리특파원과 경제정책팀 팀장과 효성 이사, 한국경제신문 산업2부 부장, 동아일보에서 편집국 경제부 차장과 부국장, 그리고 인력개발팀 팀장과 광고국 부국장, 출판국 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나남출판 주필이자 부사장,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강사로 있다. 제1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을 수상했다ㅣ2013년 2월 26일 신동아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9인)>
제임스 R. 릴리, 전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겸임교수이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그로부터 34년 후 나는 아내 샐리와 함께 활기를 되찾은 한국에 왔다. 서울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크게 발전했다. 현대식 대도시의 화려하고 복잡한 시설을 모두 갖춘 인구 1,000만 명 거대 수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국은 그동안 놀라운 경제 성장으로 소위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하나로 불리고 있었다. 1986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12퍼센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괄목한 만한 성과였다. 게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또 하나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 제임스 R. 릴리,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뒤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중앙정보국에서 요원으로 30년 동안 근무했으며,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이후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로 활동했다.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와 대만미국연구소 대표, 국가안전보장회의 동아시아 수석 전문가로도 활동했다ㅣ그의 대사시절 기록이 담긴 <대사관 순간의 기록> p15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과 교수
"전두환 정권은 수출지향형 경제정책을 계승하면서 인플레이션 완화, 국제수지 개선, 산업구조 고도화를 목표로 민간주도형 경제건설을 추진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저달러·저금리·저유가의 '3저' 경기에 의해 100억 달러 가까운 경상수지 흑자를 실현했다." - 요시자와 후미토시, 니가타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과 교수ㅣ그가 공동저술한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시작> p155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이자 칼럼니스트
"전두환 대통령은 수입자유화를 추진해 국내시장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1980년대 후반에 3%의 물가안정, 10%가 넘는 고성장, 100억 달러가 넘는 국제수지 흑자를 동시에 실현하는 이른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성과를 올렸다. 全 대통령이 기여한 것 중에서 한 가지만 들라면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경제운용 방식을 전환한 것과 공정거래제도 도입 등 시장경제체제를 확고히 구축한 것이라고 하겠다." -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로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의 입사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로 활동하며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를 비판한 글을 자신 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다. 또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ㅣ2012년 2월 8일 뉴데일리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윤태,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교수
"1980년 12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이 재벌그룹의 경제집중과 가족지배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공정거래법의 제정은 1980년대 초반 집권한 신군부 세력과 경제관료, 대기업, 중간계급, 민중부문 사이의 복잡한 정치 과정의 결과이다. 1970년대 정부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급성장한 재벌들의 경제집중과 가족지배는 심각한 대중적 비판에 직면했다. 경제관료도 1970년대 후반의 경제불황이 정부와 재벌들의 과도한 투자와 비효율적 경영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제6장 참조). 민중운동은 기업이 소수의 가족집단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사회적 부가 불공정하게 분배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중소기업가들도 기업 사이의 경쟁이 왜곡되고 중소기업들이 재벌들에 비해 차별을 받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에 1980년 전두환 정부는 재벌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산업합리화 정책과 중화학공업 조정 등을 급속하게 추진함과 동시에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기로 했다. ······ 한국 경제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는, 중상주의적 경제체계가 시장원리에 충실한 더욱 국제화된 체계로의 전환이 일어난 1979년과 1981년 사이에 발생하였다. 발전국가의 약화는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으로 이행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왜 이 시기에 전두환 정권은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발전국가의 경제체계를 바꾸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1979년과 1980년에 발생한 발전국가의 위기와 정치불안을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전두환 정권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산업화 전략을 지향하도록 이끈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와 경제관료들을 등장시킨 것에 주목해야 한다." - 김윤태, 고려대학교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과 영국 런던대학교 버벡 칼리지의 객원연구원,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연구위원을 거쳐, 국회정책연구위원과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국회도서관장, 건양대학교 초빙교수,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초빙교수,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이자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있다ㅣ그의 저서 <재벌과 권력> p141~p142, p168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은 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와 함께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외채망국론이 제기되었는데 한국한테 유리한 저달러, 저금리에 저유가까지 겹친 3저 시대를 맞아 3년 동안 13%를 오르내리는 기록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단군 이래 최고 호황'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1인당 GNP가 1980년 1,592달러에서 1987년에 3,110달러가 되었다. 3년호황을 거치면서 한국인은 식생활과 의생활이 크게 변하고, 자동차 보유도 1985년 5월 1백만 대에서 1988년 12월에 2백만 대를 돌파해(1992년 5백만 대 돌파) 초고속으로 증가하고, 해외여행도 급증했다. 이때부터 '과소비', '낭비벽'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 서중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대사 1호 박사로 유명하며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사 기자로 재직했다. 또한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비평」편집주간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역사 관련 저술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ㅣ그의 저서 <한국현대사 60년> p200~p201
홍성태, 상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장악했던 시기는 반동기이자 이행기였다. 경제성장에 힘입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갈수록 높아졌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도 갈수록 커졌다. 1980년에는 제2차 석유위기와 정치불안으로 말미암아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제4차 경제개발계획(1977-81)은 전체적으로 5.8%, 제5차 경제개발계획(1982-86)은 8.6%, 그리고 제6차 경제개발계획(1987-91)은 무려 9.8%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1인당 GNP는 1981년 1734달러에서 1991년 6498달러로 늘어났다(통계청 1992 43쪽). 이런 경제성장에 따라 1980년대에는 새로운 여가문화가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이른바 '소비사회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컬러TV방송, 프로야구 출범, 통행금지 해제, 한강종합개발 등은 단순히 경기부양책이나 정치적 유화책의 산물이 아니라 경제성장에 따른 새로운 문화적 수요의 등장이라는 구조적 변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 홍성태,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 부위원장과 정보공유연대 대표, 참여연대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상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있다ㅣ그의 저서 <개발주의를 비판하다> p251
윤진효, 진주산업대 창업학과 조교수이자 창업비지니스 센터장으로 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선임연구원
"전두환 대통령(1980~87년)의 기술발전 리더십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국가적인 범주의 연구개발활동 방향의 획기적인 변화를 들 수 있다. 즉, 1962년에서 1981년까지의 4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정에서는 기술정책이 경제발전의 지원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기술이 경제성장을 선도할 수 있도록 하는 과학기술개발의 목표와 전략이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기술개발 촉진세제의 개편, 기술금융을 전달할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의 설립, 기술인력개발비 면세제도 신설, 민간연구소에 대한 각종 혜택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산업정책도 기술-집약적인 산업의 확대와 생산성 증대를 위한 산업구조조정에 역점을 두고, 특정산업육성(industrial targeting) 대신에 기술개발, 과학두뇌 양성 등 산업-중립적인(industrial-neutral) 촉진제도인 기능적 접근법(functional approach)으로 전환하였다. 이를 위해 전두환 정부는 효율성이라는 명분 하에 정부의 전략적 기술개발사업의 양대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추진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운영·감독을 모두 과학기술처 중심으로 운영하는 집중형 과학기술행정체제를 구축하였다. 대통령은 1980년대 당시 과학기술처 산하 7개 출연연구기관, 상공부 산하 4개 기관, 동력자원부 산하 3개 기관, 전매청 산하 2개기관 그리고 국방무·체신부·공진청 각 1개 기관 등 총 19개의 정부출연연구기관 중에서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과학재단 등 3개판을 제외한 16개 출연을 9개 기관으로 통합개편하여 과학기술처 산하로 일원화하였다. 당시 경제수석 비서관이었던 김재익은 국가의 2단계 경제발전에서 국가기술능력의 향상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확신하고 기존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5개의 정부부처 산하에서 상호조정 없이 운영되고 있는 시스템적인 문제점에 주목하였다. 김재익 경제수석과 과학기술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을 과학기술부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둘 것을 제안하였고, 젇누환 대통령이 이 제안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대규모 연구개발사업인 특정연구개발사업과 공업기반기술개발사업 등 국가 연구개발프로젝트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조직하였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기술드라이브 정책을 구현하기 위한 거국적인 기술개발체제의 일환으로 1982년에는 기술진흥확대회의를 그리고 1984년에는 기술진흥실의회의를 차례로 설치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경제 및 산업발전 전략이 수출촉진 중심에서 기술개발 촉진 중심으로 전환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정부출연연구기관 시스템을 통한 연구개발 유도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의 연구개발비 지원액이 확대되어 1980년대 정부의 연구개발비 투자가 대폭 늘어났다. 즉, 한국의 전체 과학기술투자가 1981년 GNP 대비 0.89%에서 1990년 2.24%로 변모하는 등 1980년대에 걸쳐 급격히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시기에 정부로부터 경제활동의 자율성을 확보한 민간부문이 자체 판단과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에 힘입어 연구개발투자가 정부의 그것을 훨씬 앞서게 되었다. 정부 대 민간의 연구개발투자가 1981년 59 : 61에서 1990년에 28 : 72로 역전되어 실질적인 민간주도의 기술개발체제가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기술발전이 산업발전의 중요한 독립변수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오랜 지인을 2명이나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하여 청와대와 과학기술처 중심으로 기술정책을 주도함으로써 여타의 경제 및 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간 및 정부 관료제의 반대나 비판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기술발전 리더십을 행사하였다. ······ 한편, 전두환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리더십을 과학기술 종합조정 및 자문기구의 운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1980년대 들어 전두환 대통령이 기술우위의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과학기술정책의 종합조정보다는 대통령의 기술우위의 산업화전략을 전달하고 추진을 공고히 하고자 기술진흥심의회의와 기술진흥확대회의를 개최하였던 바, 동 회의는 정부 각 부처뿐만 아니라 산업계의 연구개발 노력을 제고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기술우위의 시장주도의 산업화로 국가 경제발전의 방향을 전환하면서, 기존의 금융독점권을 은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환으로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해서도 허용규정 열거방식에서 금지규정 열거방식으로 전환하여 직접투자를 기본적으로 자유화하게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외국인 직접투자 자유화는 한국내 기업들의 높아진 기술수요를 외국인 직접투자 도입을 통해 충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윤진효, 고려대학교 정경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석사를, 고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였고, 여러 대학에서 기술정책론, 클러스터이론, 기술경영론, 정책평가론 등을 강의한 바 있다. 현재는 진주산업대 창업학과 조교수이자 창업비지니스 센터장을 맡고 있다ㅣ그의 저서 <한국기술정책론> p95~98
임종건, 한남대학교 정치언론국제학과 예우교수이자 서울경제신문 대표이사 사장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물가를 전공으로 삼았다. 국방예산을 동결하는 등의 긴축재정으로 인플레이션 억제와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10ㆍ26사태로 성장률이 마이너스(-) 6%까지 떨어졌던 우리 경제를 성장세로 돌리고 1986년 마침내 무역수지 흑자원년의 대통령이 됐다. " - 임종건, 중앙대학교 학사학위를 받았고 서울경제신문에서 논설위원, 사회문화부장, 편집국 국차장, 논설위원실 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경제신문 발행인이자 편집인, 인쇄인으로 있으며 서울경제신문 대표이사 사장이자 한남대학교에서 정치언론국제학과 예우교수로 있다. 중앙언론문화상 신문잡지부문에서 수상했다ㅣ2013년 6월 3일 서울경제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의춘, 데일리안 편집국장으로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그는 5공 군사정권 기간 경제전문가를 자임하며 경제 안정화 정책에 통치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가 경제에 올인했던 것은 그 길만이 집권 과정의 정치적 후유증을 희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는 경제에 관한 한 백지상태였다. 그 백지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김재익 경제수석이었다. 김 수석은 전 대통령에게 수요ㆍ공급의 원리, 물가안정 및 건전재정, 경상수지 흑자의 중요성을 주입시켰다. ‘학생’ 전 대통령은 ‘스승’인 김 수석의 가르침을 토대로 경제안정화 정책을 우직스럽게 밀어 붙였다. 이는 집권 초기 물가불안 등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중ㆍ후반기에는 단군 이래 최고 호황을 누리며 물가 성장 경상수지,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밑거름이 됐다.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이었지만, 경제 성적만은 후한 점수를 받았다." - 이의춘,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서강대 경제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경희대 경제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울경제신문과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한국일보에서 산업부장, 경제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재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써왔다. 현재 <데일리안> 편집국장으로 있다ㅣ2008년 5월 17일 한국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